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비디오 > 비디오 카페
잠자는 비디오공주
2002-02-27

비디오카페

그 사건도 비디오를 보는 우리만의 이상한 버릇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언니는 비디오를 빌려와서 바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디오데크 근처에 내버려뒀다가 시간이 지나고 반납기일이 가까워올 때쯤 주섬주섬 찾아본다. 게다가 빌려온 비디오에 연체가 붙기 시작한 이후 반납은 빌린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이상한 무언의 룰이 있다.

몇천원 상당의 연체료를 큰맘먹고 청산한 바로 다음날 밤 언니가 비디오를 빌려왔다. 그게 <소름>이란 걸 안 순간 바로 긴장감이 느껴졌다. 최신 프로인데다가 밤에 빌려왔으니 반납기한은 바로 내일. 게다가 언니는 아침에 나가 늦게 들어올 것이 분명하므로 볼 시간은 당장 오늘밤뿐! 물론 하루이틀 연체되는 것 정도는 우리에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나, 굳어 있던 연체료를 바로 청산하고 난 이후엔 약간의 결벽증이 생기게 마련. 어쨌거나 다행스럽게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언니는 바로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언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난 뒤 나는 데크 속의 비디오가 3분의 1밖에 감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연락해본 결과 언니는 졸려서 그냥 잤다면서 오늘 볼 거니까 반납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언니는 밤마다 찔끔찔끔 3일 만에 <소름>을 간신히 관람했다. 이미 가게에서는 반납을 독촉하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름>의 출처부터 확인했다. 언니는 없고 <소름>은 데크 속에, 데크 위에, 혹은 언니의 책상 위에 항상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정말 소름이 끼쳐왔다.

어느날 밤 언니가 가방 안에 비디오를 넣었으니 내일은 꼭 성공할 거라고 했으나 다음날 저녁 그녀가 하루종일 <소름>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온 걸 알았을 때 둘 다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름> 사건은 내가 언니의 신발에 그 비디오를 야무지게 꽂아놓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놀랍게도 연체료는 그간의 소름지수에 훨씬 못 미치는, 우리로서는 ‘겨우’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4500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한 습관은 없애기엔 너무나 역사와 뿌리가 깊다. 지금 데크 속에는 <트래픽>이 며칠째 잠자고 있다. 저건 2개짜리이지 않나? 손원평/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