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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일의 은밀한 트리트먼트] 만들지 않고 짓는 것

Episode 07. 제목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군도: 민란의 시대>

“천성일? 보자…. 쉽게 될 일도 어렵게 돌아가고, 고생은 하는데 돈이 안 따라주고, 작은 성취는 보이지만 큰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겠네.”

취재 중 만난 용하다는 도사님께서 성명학에 기초해 이름 풀이를 해주셨다. 백번 옳은 말씀이라 믿고 따르고 싶었지만 개명을 하라는 권유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름만 바꾸면 명예, 권세, 재물을 얻을 뿐 아니라 가정이 화목하고 태평하여 다복하게 천수를 누린다는 말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은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은 허상이고 존재가 실제인데 허상을 바꾼다고 실제가 바뀌리오, 풍의 깊이 있는 성찰이 있어서도 아니다. 아버지가 지어주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정성 때문에.

이름은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짓는다고 한다. 반찬은 만든다고 하지만 밥은 짓는다는 표현을 쓴다. 집 역시 만든다 하지 않고 짓는다 한다. 만드는 것과 짓는 것의 차이를 한동안 모르고 살았다. 두 단어의 정의를 내리느라 고민하다 나름 결론을 내렸다. 만든다는 것은 기술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짓는다는 것은 정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

영화를 ‘만드는’ 전 과정에서 ‘짓는 것’은 오직 하나다. 제목.

캐릭터를 만들고 사건을 구성하고 반전의 묘미를 살리는 것보다 힘든 것이 제목을 짓는 것이다. 전설이 된 명작들의 제목은 어찌 그리 탐나는지, 성공한 영화의 제목은 어쩜 그렇게 영화와 딱 맞아떨어지는지 부러워하며 살기를 17년. 아직 최고라고 생각하는 제목은 지어보지 못했다. 제목 하나만으로 관객의 기대와 호기심을 살 수만 있다면 시나리오도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영화 <해적>도 몇번의 부제를 단 끝에 <해적: 바다로 간 산적>으로 결정됐다. 하필이면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회오리바다>와 비슷한 시기, 유사한 장르에 제목 스타일까지 닮아버렸다. (<명량-회오리바다>는 제목을 <명량>으로 바꿨다.-편집자) 시나리오 집필 시점과 제작 일정 등을 이미 알고 있으니 누가 누구를 따라하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모두 같은 고민으로 같은 정성을 기울여 지어냈을 것이다.

영화가 군대라면 제목은 가장 앞에서 싸우는 선봉부대다. 선봉이 무너지지면 예봉이 꺾인다. 작가에게 제목을 짓는 일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제목 때문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는 관심 밖이었고, 오로지 제목 하나 때문에 <김상궁의 은밀한 매력>(임지영 지음)이란 책의 판권을 살까 고민했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부담은 더 커진다.

사람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영화는 제목으로 기록된다. 작가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산 중에 제일 난해한 코스가 제목일 것이다. 제목을 지을 때면 시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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