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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속죄양 이론으로 <공공의 적>을 뜯어보다
2002-02-28

아니, 부시가 공공의 적이라고?

● <공공의 적>을 봤다. <꽃잎>에서, <유령>에서, <송어>에서 그리고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씨를 봤으니 이번에 그를 다섯 번째 본 셈인데, 나는 매번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낯설었다. 내 시력 탓일 거다. 기억력이나 주의력 탓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매번 배역 속으로 배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경구씨의 연기가 그만큼 탄력이 있다는 뜻이겠다. <공공의 적>에서 그가 맡은 강철중이라는 사내를 보며 자꾸 <파이란>에서의 최민식씨(영화 속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가 생각났다. 껄렁껄렁함, 천진난만한 얼굴, 추리닝 바지.

내가 강우석 감독의 영화로 처음 본 것은 아마 <투캅스>였을 것이다. 그 영화와 <공공의 적> 사이의 거리가 아득하다. 작품의 얼개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폭력성/잔혹성의 거리 말이다. 한국 형사물의 원조라고 할 만한, 그리고 <공공의 적>에서도 표나게 언급되는 <수사반장>과 <공공의 적> 사이의 거리는 또 얼마나 먼가? 물론 이번에도 폭력성/잔혹성의 거리 말이다(갑자기 최 반장, 김 형사, 조 형사 등이 그리워지는구먼. 최불암씨의 바바리코트도…. 그런데 그 바바리코트는 혹시 형사 콜롬보 역을 맡았던 피터 포크의 바바리코트를 본뜬 게 아닐까?) 관객은 폭력성/잔혹성에 점점 면역이 생기고, 제작자들은 그 면역체계를 뚫기 위해 폭력/잔혹의 강도를 점점 더 높인다. 이래도 되나 잘 모르겠다(내가 점점 문화적 보수주의자가 돼가나?). <공공의 적>에서, 그 코믹과 잔혹의 공존/대비는 왠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폭력/잔혹에 관한 한 이제 한국영화는 할리우드를 따라잡았다.

영화를 보며 문득 든 생각. 폭력물에서,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주연은 때리고 조연이나 단역 배우들은 맞는다. 이제 우리도 영화 촬영중에 그저 때리고 맞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때리고 진짜로 맞을 것이다. 그리고 출연료는 때리는 연기자가 (주연이니까 당연히) 더 받을 거다.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엄혹한 법칙이 아닌가 싶다. 영화 바깥의 세계에서도, 벌이가 나은 사람일수록 일이 우아하고 수월하다. 세상의 이런 불공평은 아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불공평을 시정하고자 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싸움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공공의 적은 범죄자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강력범이다. 그 강력범은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그래서 반드시 뿌리뽑아야 할 암종 같은 것이다. 그러면 공공의 적이 사라져버린 공동체는 평화로울까? 그것은 확실치 않다. 선인들의 통찰대로 만약에 공공의 적/범죄자라는 것이 흔히 명백하고 객관적인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기보다 집단적 증오의 대상을 이르는 말이라면, 그런 공공의 적은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이 ‘속죄양’이라고 명명한 그 공공의 적과 공동체의 안위 사이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탐색한 바 있다. 사실 그것을 알아채기 위해 대단한 이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태고 이래로 권력자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속죄양/공공의 적에는 표지가 있다. 빨갱이라는 표지, 테러리스트라는 표지, 전라도 사람이라는 표지, 장애인이라는 표지, 외국인이라는 표지, 이교도라는 표지….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재판은 그런 속죄양/공공의 적을 응징해서 기존 체제에 평화와 안녕을 베풀기 위한 ‘최소한의’ 분란이었다. 긴장이 사라지면 체제가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공공의 적이 없으면/사라지면, 권력자들은 억지로라도 새로운 공공의 적을 만들어낸다. 1989년부터 몇 해 사이에, 지구 위에서는 어이없이 빠른 속도로 빨갱이 국가라는 공공의 적들이 속속 사라졌다. 이건 미국 정부와 자본가들로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할리우드로서도 황당한 일이었다. 물론 빨갱이 나라들이 비운 자리는 곧 이슬람 국가들이 채웠다. 그리고는 이제, 부시가 연두교서 발표 이후 보인 말의 광란에서 드러나듯, 북한이 거기 추가됐다. 그러고보니 북한은 아직 망하지 않은 ‘잔당’ 빨갱이 국가로군.

그런데 공공의 적이라는 표현이 걸치고 있는 아이러니의 옷을 벗기고 강철중의 순정한 눈으로 요즘의 국제정세를 살피면, 부시야말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공공의 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인류의 평화보다는 전쟁을, 안녕보다는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강력범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강철중을 졸졸 따라다니는, 개그맨 신동엽씨 비슷한 사람(감찰반 소속의 암행 경관?)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들은 혹시 SBS의 <기분 좋은 밤>이라는 프로그램에 있었던 ‘악마의 속삭임’ 코너를 패러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코너에서 신동엽씨는 몰래카메라팀을 이끌고 사람들을 미행하며 그들의 약한 구석을 찾아내기 바빴다. 그 ‘악마의 속삭임’ 코너는, 만약에 그것이 미리 짜고 하는 쇼였다면 시청자를 기만한 것이고, 쇼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해치는 비윤리적인, 사실은 법으로 걸자면 못 걸 것도 없는 ‘공공의 적스러운’ 놀음이었다.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