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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눈을 감고 감각을 공유하며

제15회 장애인영화제 9월26일부터 29일까지

<서른 넷, 길 위에서>

삶이 곧 투쟁이라는 말은 장애인에게는 단지 비유적인 표현일 수만은 없다. 그들의 삶에서 작은 것 하나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9월26일(금)부터 29일(월)까지 4일간 목동 방송회관, 대한극장에서 열리는 제15회 장애인영화제는 서로 다른 방식의 ‘투쟁의 삶, 혹은 삶의 투쟁’의 기록을 만날 수 있다. 연민 대신 배려와 지지의 시선을 기다리는 5개국 29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개막작으로는 호주 출신 감독 제네비에브 클레이-스미스의 단편 세편이 연달아 상영된다. 그중 <인터뷰어>는 유명 법률회사의 면접을 보게 된 남자가 특별한 면접관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짧은 이야기다. 감독은 오랫동안 다운증후군 환자 등 장애인과 영화 제작 워크숍을 이어왔는데 <인터뷰어>는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학생들은 배우, 미술, 스크립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작에 참여했다. 만드는 이들의 유쾌한 에너지가 영화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체장애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공간은 지하철역이다. 그곳은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제기할 만한 투쟁의 장소가 되어왔다. 다큐멘터리 <서른 넷, 길 위에서>를 보면 최근 달라진 운동 경향이 엿보인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 중인 두 지체장애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기존의 남성 중심의 투쟁 이야기와 거리를 둔다. 투쟁의 현장에 자신의 20대를 다 바친 문애린씨는 집회에 대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음을 고백하며 “사람이 싫어졌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과 글은 ‘투쟁이 불가능한 시기에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세명의 지체장애인들의 특별한 외출에 관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네 바퀴와 함께 하는 외출>은 어찌보면 개인화된 투쟁의 장에 대한 은유일 수 있겠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인물의 일상을 추적해 그들에게 벌어지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다룬다. 지하철 리프트를 타고 이동하던 장애인의 빈번한 추락사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 이제 장애인들은 관리자의 동행하에 리프트를 이용하게 된다. 문제는 대개 관리자가 너무 늦게 나타난다는 것. 장애인이라도 마음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젊은이들 못지않다는 인터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리프트 이용이 불가능한 중증장애인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갈아타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지하철 갈아타기 전쟁 못지않게 엘리베이터 갈아타기의 지난한 과정을 체감도 높게 보여준다.

머리에 띠를 두르는 것만이 투쟁은 아니다. 사랑 역시 가장 온건한 방식의 투쟁일 수 있다. <케인>은 맹인 남자와 농아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맹인 남자가 지하철에 떨어뜨리고 간 지갑을 농아 여자가 주워주려고 따라 내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을 각각 입이 없는 여자와 눈이 없는 남자로 표현한 작화가 인상적이다. 두 사람이 장애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시각화한 장면에서는 커다란 울림을 준다. 반면 <호두>는 장애를 가진 이들의 결합에 대한 판타지를 깨부수는 영화다. 다리를 저는 택배 기사 인숙과 지체장애인 남편 석기의 이야기로, 늘 자신을 누르며 살아온 인숙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영화는 인숙의 현재 상황과 돌발적인 심리 변화를 내밀하게 포착한다. 특정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반대로 다른 차원의 감각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눈을 감으면>은 점점 시각을 잃어가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눈이 흐려질수록 그녀의 가장 예뻤던 때에 관한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해외 초청작 <실명에 관한 노트>는 신학자 존 마틴 헐이 시력을 잃은 뒤 남긴 오디오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청각, 촉각이 깨어나는 모양을 형상화한 감각적인 화면이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