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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표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Claudia Cardinale

<레오파드>

이탈리아 배우인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이탈리아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녀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칠리아 출신 부모 아래 태어나 그곳에서 10대까지 자랐다. 당시 튀니지는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카르디날레는 튀니지의 프랑스 학교에 다녔다. 프랑스어로 교육받고, 튀니지 친구들과는 아랍어로 사귀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탈리아어, 정확히 말해 시칠리아 지역어를 썼다.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말 그대로 ‘다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지역주의에서 벗어난 개방성이 카르디날레의 개성이 됐는데, 이런 특성은 훗날 역시 개방적인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를 만나, 활짝 꽃핀다. 북아프리카에 숨겨져 있던, 시칠리아 말도 겨우하던 이탈리아 소녀는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를 통해 세계의 스타로 성장하는 것이다.

튀니지의 프랑스 문화권에서 성장

카르디날레가 배우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피에트로 제르미의 <형사>(1959)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10대 소녀로서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면, 여기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카르디날레는 조연인 하층민 하녀로 출연한다. 비교적 짧은 등장이지만 훗날 그녀의 특성이 되는 불안한 눈빛, 관능적인 몸매, 어딘가 비밀이 있을 것 같은 태도 등이 이 영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다. 특히 영화의 주제곡인 ‘죽을 때까지’(Sinno Me Moro) 사랑한다는 애절한 가사의 노래는 카르디날레의 테마곡으로 쓰이며, 그녀의 개성으로까지 비쳤다.

불안한 눈빛의 하층민 여성이 죽도록 사랑할 것 같은 이미지는 발레리오 추를리니의 멜로드라마 <가방을 든 여인>(1961)을 통해 더욱 확산된다. 카르디날레는 당대의 급격한 경제부흥기를 맞아 신분상승이라는 헛된 꿈을 꾸는 시골 출신 여성으로 나오는데, 도시의 약삭빠른 남성들에게 실컷 이용만 당할 뿐이다.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대상은 10대 소년이 유일하고, 영화는 소년과의 사랑과 어른과의 타락을 대조하며, 카르디날레의 추락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여기서 미나가 부르는 주제곡 <방 안의 하늘>(Il Cielo In Una Stanza)은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카르디날레의 마음으로 읽혀, 역시 그녀의 테마곡으로 오랫동안 기억나게 했다.

비스콘티와는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을 통해 처음 만났다. 하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알랭 들롱을 비롯한 남자들이었고, 카르디날레의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가난한 남부 출신으로, 산업도시인 밀라노로 이주한 뒤 정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비스콘티는 <레오파드>에서 카르디날레에게 역시 신분상승을 달성하는 부르주아 여성 안젤리카 역을 맡겼다. 주체할 수 없는 부를 축적한 부친 덕분에 사실상 ‘신세계의 공주’처럼 행세하는 당찬 여성이다. 구질서를 상징하는 귀족 버트 랭커스터와 신질서를 상징하는 부르주아 여성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함께 추는 왈츠 장면은 영화 속 안젤리카의 ‘여왕 대관식’이나 다름없었는데, 이 순간은 실제로 카르디날레의 세계 영화계의 ‘여왕 대관식’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카르디날레의 명성은 세계 속으로 퍼져나갔다.

비스콘티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정도로 프랑스 문화에 밝은 감독이다. 카르디날레는 현장에서 프랑스어로 감독과 소통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했다. 특히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감독의 태도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기도 했다. 카르디날레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의 다문화 배경과 비스콘티의 개방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레오파드>는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당시에 카르디날레는 세계 영화계의 스타덤으로 ‘표범’처럼 뛰어오르고 있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표범’

튀니지 카르타고에 있는 사범학교에서 초등교사 자격증까지 딴 카르디날레가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서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개최한 ‘튀니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성’이라는 미인대회에 참가하면서다. 큰 키(170cm)와 약간 검은 피부, ‘바비 인형’ 같은 몸매, 그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카르디날레는 1등에 당선됐다. 초등학교 교사를 희망했던 소녀는 갑자기 베네치아로, 로마로 초대되는 행운을 누렸다. 특혜를 받아 로마국립영화학교의 연기과정에 입학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였다. 그녀의 이탈리아어 실력으로는 수업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카르디날레는 문화적으로 볼 때, 당시에는 여전히 프랑스 소녀였다. 카르디날레의 데뷔작도 프랑스영화인 <고하>(Goha, 1958)다. 초창기 영화들에서 그녀는 프랑스어로 연기했고, 이탈리아어 더빙이 덧붙여졌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탈리아어를 연기한 것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1963)이 처음이다. 카르디날레는 이탈리아에서의 갑작스런 변화들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겨우 20살도 안 된 카르디날레는 영화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튀니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카르디날레의 장래성을 알아보고, 다시 영화계로 끌어낸 인물이 이탈리아의 유명 제작자이자 한때 남편이기도 했던 프랑코 크리스탈디이다. 비스콘티와 더불어 카르디날레의 영화 경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카르디날레는 마리오 모니첼리의 코미디 <마돈나 거리의 한탕>(1958)에 나오며 이탈리아영화의 데뷔에도 성공하고, 곧바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에겐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 영화를 찍을 때 아직 10대였는데,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아기의 부친은 영화계의 프랑스 남자라고만 전해진다. 10대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카르디날레의 경력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비밀을 관리하며, 카르디날레를 스타로 성장시킨 조력자가 크리스탈디이다.

아들에 대한 비밀은 7년간 유지됐다. 뒷날 그 죄책감의 무게를 고백했던 카르디날레는 특히 <가방을든 여인>을 찍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가방을 든 여인>의 주인공은 실제의 자기처럼 비밀의 아들을 둔 채 처녀 행세를 하는 여성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죄의식의 비밀이 배우 카르디날레를 더욱 성장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혼모 스캔들이 알려진 뒤에도 카르디날레의 스타덤은 견고했다. 배우로서의 빼어난 경력이 이미 사적인 스캔들을 넘어갔기 때문일 터다. 카르디날레는 크리스탈디와 결혼(1967년)한 뒤,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에 출연하며, 다시 세계의 스타로 사랑을 받았다. 세계 영화계에서의 경력을 따져, 카르디날레는 지나 롤로브리지다, 소피아 로렌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여배우’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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