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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로봇 합체 장면을 보면 두근거린다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4-12-01

국내의 독보적 탱고뮤지션이자 반도네온 연주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고상지

탱고의 변방에서, 고독하지만 꿋꿋하게, 누구보다 아름다운 방식으로 반도네온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여전사.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정재형, 김동률 등 음악에 관해서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는 유명 뮤지션들의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해왔던 그녀에게 올해는 특별한 한해였다. 아홉곡의 자작곡이 수록된 첫 정규 앨범 ≪Maycgre 1.0≫을 발매했고, 10월엔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으며, 오는 12월4일부터 ‘일본의 아스토르 피아졸라’라는 평가를 받는 유명 반도네온 연주자 료타 고마쓰의 일본 투어에 그녀는 한국 출신 반도네온 연주자로서 처음으로 참여한다. 수많은 ‘처음’으로 점철된 한해였지만, 고상지에겐 순간의 기쁨을 곱씹는 것보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음악에 대한 몰입이 더 중요해 보였다. 애니메이션과 롤플레잉 게임의 열렬한 팬이며, 호전적이고 똑 부러지는 애니메이션 여주인공들을 사랑한다는 고상지의 취향과 그녀의 음악은 서로 닮아 있었다.

-일본 투어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원래 11월 말쯤에 보컬리스트가 참여하는 싱글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투어 때문에 내년으로 발매 일정을 미뤘다. 내게 너무나 소중한 기회이고, 절대 못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료타 고마쓰라는 보석 같은 반도네온 연주자가 있다. 선생님과 20인조 오르케스타가 도쿄(테아트르 1010), 오사카(빌보드 라이브 오사카) 등 일본 도시를 순회하며 다섯번의 공연을 하는데, 그 멤버로 참여하게 됐다. 이번 공연의 의미가 선생님에게 남다른 건 처음으로 해외 출신의 반도네온 연주자들과 함께한다는 거다. 한국에선 나와 우리 밴드에서 바이올린을 맡은 윤종수씨가 참여하고 대만에선 세계 반도네온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던 우영룽이라는 연주자가 참여한다. 사실 일본에도 뛰어난 반도네온 연주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우릴 부른 것은 탱고의 본고장인 아르헨티나 출신이 아닌, 변방에서 탱고를 하는 아시아인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레퍼토리의 수준도 역대 최강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오르케스타 멤버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번 공연의 완성도가 높다.

-공연에서 어떤 곡들을 선보일 예정인가.

=아무래도 곡 선정에는 료타 고마쓰 선생님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었다. 연주와 편곡의 천재였던 반도네온 연주자 빅톨 라바쟨, 내가 탱고뮤지션 중에 가장 존경하는 호세 콜란젤로의 곡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음악이 포함되어 있고, 탱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La Cumparsita> <Libertango> 등의 곡을 굉장히 어려운 버전의 편곡으로 연주할 예정이다. 이외에 일본, 한국적인 특색이 반영된 곡도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모노노케>의 오프닝 곡을 반도네온에 맞게 편곡했고, 한국곡으로는 정규 앨범에 수록된 <출격>을 오르케스타 티피카(아르헨티나 탱고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뜻한다.-편집자) 버전으로, <暗>과 <Ataque>는 퀸텟 버전으로 연주할 예정이다.

-이 공연을 한국에서 볼 기회는 없는 걸까.

=아직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내년에 료타 고마쓰 오르케스타가 내한할 계획이다. 아마 그때 볼 수 있지 않을까.

-료타 고마쓰는 당신의 스승이기도 하다.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연이 너무 긴데…. 간추려 말하자면, 료타 고마쓰의 한국팬이 나를 발견하고 선생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더라. “한국에서 홀로 열심히 반도네온을 하는 여자애가 있으니, 고마쓰상이 파이팅 한번 해주면 그녀가 기뻐할 거다”라고. (웃음) 그러면서 내 이 메일 주소를 선생님께 알려드린 것 같은데, 정말로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기뻤고,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첫 정규 앨범 ≪Maycgre 1.0≫ 얘기를 해보자. M부터 E까지, 앨범 제목의 일곱 이니셜(<에반게리온: 파>의 마키나미, <에반게리온>의 아스카,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요코, <슈타인즈 게이트>의 크리스, <베르세르크>의 그리피스, <에반게리온>의 레이.-편집자)은 당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곡 작업을 할 때에도 애니메이션의 특정 장면에서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번 앨범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곡을 쓸 때, 애니메이션이나 어떤 영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사실 많은 뮤지션들이 곡을 쓸 때 나름의 개인적인 추억을 떠올린다고 하지 않나. 나는 그보다도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영상의 BGM(배경음악)으로 적합할지를 늘 생각하며 곡 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종종 영감을 받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장면을 틀어놓고 음소거로 설정한 다음, 내 곡을 거기에 맞춰보는 작업을 한다.

-이번 앨범에선 특히 어떤 영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궁금하다.

=1번 트랙 <출격>은 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의 예고편을 보고 작업했다. 아스카와 마키나미가 도약을 하고, 에바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그런 밝고 희망찬 느낌의 곡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번 트랙 <Red Hair Heroine>의 경우, <천원돌파 그렌라간>이라는 가이낙스의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에서 로봇이 합체할 때마다 굉장히 두근거리곤 하는데,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도 요코라는 빨간 머리 여자애가 합체에 두근거려하는 모습이 나오더라. 그 표정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하며 쓴 곡이다. (웃음) 8번 트랙 <Envy>는 가장 마지막으로 쓴 곡인데, 처음에는 일반 대중이 ‘탱고’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슬프고 우울한 감정의 곡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곡을 써보자!’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꼭 곡이 안 풀리더라. 그러던 도중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엔비라는 캐릭터가 죽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 친구가 죽자마자 ‘흑흑’ 하면서 써내려간 곡이다. (웃음)

-얘기를 들어보니, 마치 영화음악 감독들이 곡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다. 영화음악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그러잖아도 관심이 많아서 최근에 <두근두근 내 인생>의 영화음악을 맡은 정재형 오빠에게 영화음악 작업 이야기를 좀 들어봤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영화음악쪽은 넘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나는 한 장면을 계속 떠올리면서 몇달 동안 곡 작업을 하는데, 수십개의 신에 저마다 다른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니, 저걸 어떻게 해. (웃음) 다만 영화음악 감독님이 불러주신다면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크다. 이병우 감독님이 만든 <관상> 음악과 김준석 음악감독님의 <쌍화점>, 김종천 음악감독님이 작업하신 드라마 <추노>의 음악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내가 사극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동양적인 멜로디와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질 때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불러주신다면야…. (웃음) ‘네!’ 하며 참여해야지.

-정규 앨범의 첫 트랙 <출격>의 뮤직비디오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로봇이 변신하거나 합체하는 과정에 나올 법한 그래픽 장면의 주인공이 반도네온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로봇이 싸울 때 조종석에 엄청난 수치들이 표시되곤 하잖나. 친구의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 느낌을 반도네온이라는 악기에 적용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션 <무한의 리바이어스>나 <천원돌파 그렌라간>에서 조종석이 등장하는 장면을 눈여겨봤다. 그걸 모델로 삼아서 반도네온의 버튼이 눌릴 때마다 불빛이 생겨나는 등의 장면들을 만들어본 거다. 이런 뮤직비디오를 정말 만들어보고 싶었기에, 회의를 할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고 눈물이 고이더라. 너무 좋아서. (웃음) 최근 가장 핫한 모션그래픽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강애진 감독님(<출격>의 뮤직비디오 감독)의 도움이 컸다.

-탱고에 처음 매료된 이유도 어린 시절 즐겨했던 게임 <드래곤 퀘스트>의 음악과 탱고 뮤지션 아스토르 피아졸라 음악의 느낌이 비슷해서였다고 들었다.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호전적인 느낌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돌이켜보면 탱고와 게임 음악은 어떤 부분이 닮았던 것 같나.

=탱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는, 게임에서 나오는 음악과 피아졸라 곡의 공격적인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음악 공부를 하고 나서 보니 피아졸라의 <Libertango>나 <Chin Chin> 같은 곡이 내가 좋아하던 게임의 전투음악, 던전음악 등과 비슷한 방식으로 코드를 진행시켜나가더라. 이건 팝이나 영화음악을 들을 때 자주 들을 수 없는 코드 구성인데, 이런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뒤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투어를 마치고, 다가오는 12월31일에 연말 공연을 연다. 지난 10월에 백암아트홀에서 열었던 콘서트와는 어떻게 다른가.

=지난 10월 공연은 정규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첫 단독 공연이었다면 이번 연말 공연은 좀더 대중적인 느낌으로 기획해보려 한다. 무엇보다 아르헨티나 탱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될 거다. 탱고 댄서분들도 출연하고, 관객이 잘아시는 고전적인 탱고곡들을 새로운 편곡으로 만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