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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노포에서 한술 뜨면 우리가 곧 역사의 참여자

<백년식당> 낸 박찬일 셰프

“맛있어서 오래된 식당, 그것을 우리는 노포라 부른다.” 요리도 하고 글도 쓰는 박찬일 셰프가 18곳의 노포를 소개한 책 <백년식당>을 냈다. “마치 화석 같다. 화석을 보면 지층이 어떻게 축적됐고 지구에 어떤 생물이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노포에는 우리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박찬일의 이 말은 <백년식당>이 단순히 노포 ‘기행’이 아님을 짐작하게 해준다. 서울의 평양냉면집, 부산의 돼지국밥집, 대구의 추어탕집, 제주의 순대국밥집 등을 돌며 박찬일은 한결같은 맛으로 꿋꿋이 식당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한다. 그 기록이 꽤 뭉클하다. 올해 6월 말, 서교동 문학과지성사 사옥지하 1층에 차린 그의 이탈리아식 선술집 ‘로칸다 몽로’에서 박찬일 셰프를 만났다.

-레스토랑이 아닌 술집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술을 좋아하니까 술집을 하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로칸다는 싸구려 음식과 술을 파는 이탈리아의 간이식당 겸 술집을 의미하는데,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이름을 가져왔다. 몽로는,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을 좋아해서 거기서 따왔다. 목로를 소리나는 대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몽로가 됐는데, 한자로는 꿈몽에 이슬로를 생각했다. 진로소주 생각도 좀 나게. (웃음) 그래서 몽로(夢露)로 네온사인을 발주했는데, 아저씨가 이슬로가 복잡해서인지 길로자로 만들어 가져다준 거다. 그것도 운명이다 싶어 결국 몽로(夢路)가 됐다.

-문학과지성사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해 있다. 작가들이 많이 찾겠다.

=문화•지식노동자들이 술 마시러 자주 찾는다. 작가, 기자, 디자이너, 화가, 건축가, 방송 종사자 등이 모이더라. 구석에서 소설가 김연수가 생맥주 마시고 있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고. (웃음)

-그런데 술꾼이 술집 차리면….

=망하지. 그래도 난 뭐 요리사니까. 술꾼이 술집 차려서 안 망하는 비결은 주인이 가게에서 술 안 마시면 된다.

-술은 주로 와인을 파나.

=생맥주, 와인, 소주, 위스키 다 있다. 배갈만 없고.

청담동 뚜또베네, 가로수길 논나, 홍대 라꼼마, 한남동 인스턴트 펑크 그리고 로칸다 몽로까지. 오너 셰프로 있었던 가게가 벌써 여럿 된다.

직접 차린 건 한번도 없다. 지금도 월급쟁이다. 자본이 없어서 내 가게를 차려보지 못했다. 대출받아 가게 차릴 배짱도 없고. 새로운 가게를 차리고 싶어서 식당을 자주 옮긴 건 아니다. 잘 맞으면 오래하고 맞지 않으면 오래 못하는 건데,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인 거겠지. 싫증도 잘 내고.

-그런데 <백년식당>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오래된 식당들을 찾아 나섰다.

=일종의 역설이다. 내가 한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남들보다 쉽게 직장을 그만둬도 되는 상황이어서인지 한곳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 보인다. 책 속의 주인공들도 보통 사람들은 아닌 거지. 책에도 썼지만 노포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주인이 직접 일한다. 말이 쉽지, 돈이 들어오면 나가서 놀고 싶다. 그런데 저들은 꿈과 이상이 소박하다. 천직이라 표현하긴 그렇고, 이것이 내 인생인가보다 하고 일한다. 또 노포들엔 장기 근속자가 많다. 주인의 덕성과 품성이 굉장히 훌륭해야 가능한 일이다. 부원면옥 아르바이트 직원은 20년 넘게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고, 우래옥의 김지억 전무는 1962년에 입사해서 아직까지 일한다. 무릎 관절이 안 좋아 지팡이 짚고 다니는 노인을 요즘 누가 쓰겠나. 혈연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분들이 현역이다. 젊은이들에 비해 동작이 느릴지는 몰라도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정에 기복이 없다. 노포의 특징 중 하나가 메뉴가 단출한 건데, 그 일을 몇 십년간 했으니 얼마나 완벽하겠나. 변수가 없으니 음식이 정확하다.

-그런 이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문장마다 뚝뚝 묻어난다. 워낙 맛깔나고 유머 넘치는 글을 잘 쓰지만 <백년식당>에서 만큼은 문체조차 진지하다.

=가볍게 쓰지 못했다. 존경스런 마음으로 오래된 식당들을 대하다보니 글이 무거워졌다. 기록물을 남겨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서울의 오래된 식당에 대한 단편적 정보들은 있지만 깊이 있는 인터뷰를 하고 역사적 배경까지 조사해 실은 책은 이게 처음인 듯싶다.

-처음부터 노포에 대한 책을 펴낼 생각으로 직접 기획한 건가.

=그렇다. 공부를 하다보니 자료가 없더라. 소시지에 대한 자료를 모으면 아마 집 한칸은 채울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순대에 대한 자료는 A4 두장이 채 안 된다. 그 정도로 우리 음식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연구자 수도 적고. 이른바 먹물들이 먹는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여성 가정학 연구자들이 기록을 남겼는데 그들 역시 어떻게 하면 맛있고 영양가 있게 요리하는지, 이과적 관점으로만 접근했다. 허균이 팔도의 별미음식을 소개한 <도문대작>이란 책을 썼다가 양반들에게 비난받았다고 한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양반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거다.

-이 책의 특징이 바로 그거다. 오래된 식당, 한 그릇의 음식에 서 우리의 근현대사와 문화를 읽어낸다.

=노포에서 해장국 한 그릇, 냉면 한 그릇을 먹으면 우리가 곧 역사의 참여자가 된다. 우리 생애 어떤 식당들은 곧 100년의 역사에 도달할텐데, 음식 한 그릇 먹음으로써 그 가게의 100년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 그게 노포에 가는 즐거움이기도 하고.

-책에는 총 18곳의 식당이 소개된다. 식당 선정의 기준이 있었나.

=웃긴 얘기지만 첫 번째 기준은 섭외가 되는가였다. 그리고 생각만큼 오래된 식당이 없다. 50년 이상 된 집 중에서 종목과 지역이 겹치지 않게 하려다보니 소개할 곳이 많지 않더라. 오래된 식당이 가치 있다는 걸 주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언론과 지자체도 근자에나 노포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지역 안배 얘길 했는데 전라도 식당이 없더라.

=섭외에 실패해 소개하지 못한 곳도 있지만 실제로 호남 지역에 오래된 식당이 많지 않다. 이유를 좀 밝혀봐야겠지만, 내 생각엔 서울과 부산처럼 도시의 역사가 오래되고 도시의 기능이 강력한 곳이 호남에 없어서인 것 같다. 또 단품을 파는 집이 호남에는 적다. 식당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단품 하나를 잘해야 한다. 냉면, 만두, 육개장 등 차별화되는 품목이 있어야 하는데 호남은 한상 거하게 차려서 내는 음식문화라 그 차별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 같다.

-식당을 취재할 땐 저널리스트로서 접근했나 요리사로서 접근했나.

=글쓰는 사람으로 접근했다. 요리사로서 들여다보는 건 좀 실무적인 일이라 저널리스트로서 먼저 접근했다. 요리사라고 밝히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양식당에서나 날 알까, 그들이 박찬일이 뭐하는 사람인지 알게 뭔가. 어쨌든 그들과 얘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식당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재료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디테일한 업무들이 보인다. 굉장하다. 그 안에 그분들만의 완벽한 효율이 있다. 옛것을 어떻게 지켜가는지, 효율적인 시스템과의 충돌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노포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재밌다.

-소개된 식당의 절반이 해장국, 설렁탕, 육개장, 추어탕과 같은 탕류를 다루는 곳이다.

=장시의 발달, 상공업의 발달로 민간인의 이동이 많아지면서 일하는 사람의 음식이 필요했다. 유명한 육개장집이나 설렁탕집 옆에 나무장이 있었던 게 그 한 특징이다. 당시엔 나무가 주연료였고, 나무장 주위에 장시가 발달했고, 장터에선 술꾼의 음식, 일꾼의 음식을 팔았다. 그러다보니 오래된 식당의 원형이 탕을 파는 집이 됐다.

-냉면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마침 책표지도 평양냉면집에서 냉면 먹는 사진이다.

=여행작가 노중훈이 찍었는데, 출판사에서 그걸 표지로 골랐다. 난 말렸다. 내가 밥맛 돌게 생겼나,어디. (웃음) 아마 책표지 때문에 1천권은 까먹었을걸.

-<백년식당> 2편의 출간 계획도 있나.

=기왕 했으니까, 빠진 식당들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두권이면 거반 노포들을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현재 쓰고 있는 또 다른 책이 있다면.

=예전에 창비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이 조만간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맛에 대한 에세이이고 가제는 <뜨거운 한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