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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 ‘사람 냄새’가 나야…
장영엽 사진 백종헌 2014-12-17

<미생> <카트> 김희원

언제 어디서 ‘잽’이 날아올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악당. 배우 김희원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에서, 김희원이 연기하는 박 과장은 단 네편의 에피소드만으로도 장그래(임시완)와 오 과장(이성민)의 영업3팀을 한바탕 뒤흔드는 강렬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영화 <카트>의 악덕 편의점 업주도, <아저씨>의 장기밀매 조직원도 마찬가지다. 위협적인 외양이나 ‘센’ 액션을 선보이지 않음에도, 김희원은 종종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불편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배우처럼 느껴진다. 연극 무대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이제는 영화와 드라마로 그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이 ‘신스틸러’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드라마 <미생>에 출연한 뒤, 주위 반응이 좀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예전에는 <아저씨>의 만석으로 나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길을 가다보면 ‘박 과장’ 소리를 많이 듣는다. 간혹 가다 회사원들을 만나면, “우리 상사하고 너무 똑같다”는 얘기도 듣고, 어떤 분들은 “상사에게 평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당신에게 대신 해도 되냐”는 농담도 하시더라.

-<미생>의 박 과장은 등장하는 순간부터 사무실의 공기를 바꿔놓는 인물이다. 지금까지의 에피소드에서 장그래와 오 과장의 영업3팀에 가장 위협적인 악역이 되는 캐릭터이기도 한데, 배역을 맡으며 어떤 생각을 했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박 과장은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좀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미생>은 러브 라인도 없고, 막장도 없고, 정말 리얼하게 회사원들의 삶을 다루는 작품이잖나. 그런데 박 과장의 캐릭터와 대사를 보면 정말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교만하고 싸가지 없고 재수 없게 느껴진다. 그런데 주변에 물어보니 간혹 어떻게 이런 사람이 회사에 합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박 과장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서 이제까지의 드라마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사람으로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사람 있잖나. 말 안 해도 불편하고, 가까이 하기 싫고, 괜히 같이 커피 마시기 싫은 사람. <미생>의 다른 인물들을 불편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만드는 캐릭터가 되길 바랐다. 리얼 하지만 조금은 과장을 섞어서. 그 수위 조절에 공을 많이 들였다.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느낌의 인물이란 어떤 사람일까.

=보통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쓰잖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이 말은 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박 과장처럼 우리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보편적인 생각보다 자기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아니, 그럼 어때서?’라는 식의,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늘 연기를 할 때마다 어떤 감정을 뜻하는 단어를 생각하며 그 단어에 집중하는 편이다. 대사는 대사고, 그 대사의 지표가 단어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연장선상에 어울리는 애드리브나 행동을 계속 고민한다. <미생>의 박 과장을 연기하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단어는 ‘교만’이었다. 교만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는 편하게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다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너무 크게 다가오잖나.

-드라마를 보면 <미생>의 인물들이 박 과장의 존재에 긴장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모습이 역력하다. 박 과장의 리액션을 미리 예상치 못했던 느낌도 드는데, 애드리브가 많이 반영된 편인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더 자존심 상하고, 더 기분 나쁘고 불편할지에 대한 생각을 촬영 내내 계속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점에 대한 애드리브나 행동이 굉장히 많이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장그래에게 박 과장이 구두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 대사는 ‘구두 내려놔, 난 거래처 사람 만나러 가겠다’는 뉘앙스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박 과장이 구두를 신으며 ‘구두 주걱을 안 가져오냐. 너는 참 센스도 없다’고 하지. 슬리퍼를 발로 툭 차면서 장그래에게 이거 갖다놓으라고 하고. 그런 건 다 애드리브다.

-어쩐지 현장에서도 원성이 자자했을 것 같다. (웃음)

=한 번은 현장 스탭들이 박 과장 정말 재수 없고 나쁘다고 얘길 하더라고. (웃음) 장그래가 자료를 뽑아왔을 때 오 과장 들으라는 듯이 “얘는 안 된다”고 얘기하고 사무실 나가면서는 “수고했어”라고 하는 장면. 그게 정말 수고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잖나. ‘네가 고졸이니까 이만큼 수고했구나’ 하고 비아냥거리는 뉘앙스의 애드리브였는데,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기분 나쁘게 비쳤나보다. 재수 없다, 나쁘다는 얘기를 들으니 내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더라. (웃음)

-극중에서 박 과장은 ‘중동통’으로 불린다. 실제로 무역회사에서 일하거나 중동 지역에 해박한 회사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지.

=<미생> 촬영현장에 박 과장의 업무와 같은 비즈니스를 하는, 중동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자문위원으로 계셨다. 그분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친구나 선배 중에서도 요르단에서 사업하는 분들이 있어서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드라마에 직접적으로 반영된 건 아니지만,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 들었다.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종합 무역상사와 일반 회사의 차이는 ‘실적’에 있더라. 물론 일반 회사원들에게도 실적은 중요하지만, 종합 무역상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거의 전쟁하듯이 실적을 올려야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경쟁자일 수도 있고. 그래서 훨씬 더 회사 생활이 치열하다고 해야 하나. 드라마에서 박 과장이 다른 부서 사람과 멱살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다더라. 일반 회사보다 좀더 거친 분위기라고 할까.

-박 과장을 현재의 괴물로 변하게 했던 과거의 회상 신도 인상적이었다.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던 장면이다. 만약 박 과장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나쁜 사람에 머물렀을 거다. 이 장면이 박 과장을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그래서 사무실에서 갑자기 종이를 박박 찢으며 지금의 박 과장으로 변해가는 장면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우리가 칼로 유리에서 무언가를 떼어낼 때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잖나. 사무실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 타자 치는 소리가 박 과장에겐 유리 긁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었다. 행복해지려고 사는 건데, 회사의 소모품처럼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방황하고 고민하다가 갑자기 전화벨 소리를 들었을 때, 박 과장에겐 그 소리가 정말 기분 나쁜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 거지.

-<미생> 이전에는 영화 <카트>에도 출연했다.

=사실 우정출연이다. <카트>의 캐스팅 디렉터와 친분이 있었는데, “촬영분은 이틀밖에 안 되지만 영화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라고 하더라. 무엇보다 대본이 재미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꼭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하게 됐다.

-특정 단어를 떠올리며 감정에 집중한다고 했는데, <카트>의 편의점 사장을 연기하면서는 어떤 단어를 떠올렸나.

=우물 안 개구리. 그런 사람 있잖나. 뭘 잘 지키면 되는 사람인데, 스스로는 굉장히 큰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물론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지만, 마치 자기가 세상을 다 구한 것처럼 행세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람을 생각했던 것 같다.

-<카트>에서도 수많은 애드리브가 예상된다.

=<카트>는 애드리브 천지였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애드리브는 “자, (너) 이제 다 받았어”라는 대사였다. 응당 줘야 할 돈을 안 주면서, “그거라도 주세요”라는 직원의 말에 법적으로 나 하자 없다는 뉘앙스로 얘기를 하니, 얼마나 치사한가.

-드라마 <미생>과 영화 <카트>, 전작 <아저씨>까지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악역들을 연기하며 주목받아왔다. 물론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악역을 연기할 때 나름의 원칙이 있나.

=생각해보니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사실 <아저씨>의 만석이 장기밀매를 하고 다른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는 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으면 소화를 못했을 것 같다. 나쁜 사람들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지만, 단지 먹고 사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가치관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달랐기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악당도 똑같이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보는 분들도 나랑 똑같은 사람인데, 저렇게 나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더 몰입해서 봐주지 않을까.

-영화와 드라마를 하기 전에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몸담아왔다. 그땐 주로 어떤 역할을 맡았나.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웃음) 왜냐하면 1인다역을 많이 했거든. 소위 ‘멀티맨’이었다. 연극 한번 올리면 1인9역, 10역씩 하는. 그래도 생각해보면 대개 코믹한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우연히 현대극장에 모집공고를 보러 갔다가 연기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부터 배우를 지망한 건 아니었다고.

=아무 준비도 못하고 갔는데, 내 모습이 웃겨서 뽑아준 것 같다. 당시 고3이었는데, 오디션 보는 데 ‘편한 옷’을 입고 오라고 하더라고. 추워서 체육복 바지를 안에 껴입고 청바지를 위에 입고 갔다. 다른 사람들은 오디션 보려고 옷 갈아입는데 너는 왜 안 갈아입냐고 심사하는 분이 그러길래, 그 자리에서 청바지를 벗고 체육복 추리닝 바지를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분이 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4차원’이라서 붙여준 게 아닐까 싶다. (웃음)

-그렇다면 처음으로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언제쯤이었나.

=1994년이었나. 이윤택 선생님의 <허제비놀이>라는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하는 게 이렇게 훌륭한 일이었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던 것 같다. 우리극연구소의 첫 작품이었는데,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 너무 많아 무대에도 관객을 앉힐 정도였다. 관객을 헤집고 다니면서 연기를 하는 데, 내가 무대에서 맞아서 넘어지는 신이 있었다. 그때 넘어지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 한 관객이 막 울면서 내 땀을 닦아주는 거다. 그런데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더라. 연극의 힘이 참 위대한 거구나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배우라는 직업은 유일하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직업인 것 같더라. 어떤 한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예술인 것 같다.

-차기작은 <돌연변이>와 <뷰티 인사이드>다.

=<돌연변이>에선 돌연변이를 변호해주는 인권변호사를 연기하는데, 좀 가벼운 톤으로 가볼 생각이다. 반면 <뷰티 인사이드>는 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다룰 예정이라 좀 짠한 배역이 될 거다. 주인공이 스물 몇명인데, 그중 ‘15번’ 역할이다.

문득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한 토막이 생각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희원은 연극 무대를 떠나 잠시 호주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산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호주에서 시드니올림픽이 열렸고, 한국에서 그와 함께 공연을 하던 친구들이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김희원은 그들이 설 무대 바닥에 페인트를 칠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1년 동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 싶더라. 그건 아니었다. 그때 다시 연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다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방황할 때마다 배우라는 ‘운명’은 자꾸만 그를 무대로,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김희원의 바람은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이 ‘운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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