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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관객의 가려운 곳 긁어주고 싶다
윤혜지 사진 최성열 2014-12-29

<뮤지컬 이야기쇼 이석준과 함께> 배우 이석준

“그래, 알았어. 일단 전진.” 업무 전화인 듯하지만 누구와의 통화인지는 모르겠다. 이석준은 일단 ‘고’ 하는 것으로 통화를 마쳤다. 2004년 4월에 시작한 소극장토크쇼 <뮤지컬 이야기쇼 이석준과 함께>(이하 <뮤지컬 이야기쇼>)도 이렇게 지난 10년을 버텨왔구나 짐작된다. <뮤지컬 이야기쇼>는 월 2회, 공연계 휴일인 월요일에 열린다. 이석준이 “아는 사람은 아는” 양질의 대학로 창작공연을 배우들과 함께 소개하고 그 비하인드와 음악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대학로 연극계에서 대형스타 없이 10년을 지속해온 것만 봐도 보통 내공이 아니다. 2011년 6월부터 시즌2를 시작해 현재 71회 공연을 앞두고 있다. 매회 다른 배우들이 출연료 없이 참여하며 티켓 판매 수익금 전액은 사회복지 NGO 단체 ‘함께하는 사랑밭’에 기부한다.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이야기쇼>는 과감한 프로젝트를 하나 궁리 중이다. <배우수업>이라는 타이틀로 파일럿 예능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이다. 현재 크라우드 펀딩(funding21.com)으로 제작비를 모금 중이다. 이것은 또 무슨 꿍꿍이일까.

-10주년 소감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받은 게 참 많구나 싶다. 관객의 사랑은 물론이고, 무대 위에 배우들을 올리며 얻은 것도 많다. 후배를 볼 땐 나도 지치지 말아야지, 선배들 보면서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무대를 쉽게 여기지 못하게 됐고 좋은 배우가 되고자 노력할 수 있었다. 회전율이 빠른 업계인데 <뮤지컬 이야기쇼>덕에 이석준이란 배우가 꾸준할 수 있었다.

-무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는 공연이다. 시작이 궁금하다.

=공연 뒤 배우를 기다리는 한 팬의 모습에서 시작됐다. 한겨울에 공연 끝내고 나왔는데 팬이 밖에서 덜덜 떨며 장미 한 송이 들고 배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 배우를 불러다줬더니 팬은 꽃을 건네고 고맙다고 인사만 하고 갔다. 그것만으로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무대에만 서니까 뮤지컬 배우에 대해 관객이 사적으로 알 수 있는 플랫폼이 없다. 내가 팬들 대신 궁금한 걸 물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발굴되지 않은 배우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됐다.

=뮤지컬을 하고 싶다며 지방에서 올라와 지금 무대 만들며 경력 쌓고 있는 후배가 있다. <뮤지컬 이야기쇼>를 알고 나서 꿈을 키우게 됐다고 하더라. 좋은 뮤지컬 배우가 참 많은데 소수 대형스타에 관객의 관심이 치우쳐 있다. 대형스타와 신인배우 사이의 중간 그룹이 엄청나게 넓다. 한번이라도 이들이 관객 앞에 설 기회를 주고 싶었다. 시즌1 끝나고 관객이 돌아오라고 해준 것도 고마웠지만 배우들이 ‘그거 안 해요?’ 할 때도 참 좋더라.

-예능 형식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한 건가.

=처음 생각과 달리 무대에 갇혀서 보여줄 수 없는 게 생겨났다. 우리가 두 시간 반 공연을 하지만 그 시간 안에 작품과 배우의 매력을 최대치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 예능 프로그램은 대여섯 시간씩 촬영을 해서 진짜 좋은 것으로만 딱 두 시간을 채워넣지 않나. 우리에겐 편집이 없으니까. 뮤지컬 배우들이 예능에 나가면 예능 포맷에 이들을 맞추게 되니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의 매력이 잘 안 느껴지기도 했다. 그 틈새시장을 공략한 거다. 뮤지컬을 사랑해주는 관객이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들이 진짜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도도 있었다. 혼자 뮤지컬 배우 준비하는 친구들에게도 벽을 허물어주고 싶었다.

-스탭과 배우가 모두 노개런티라 쇼를 유지하는 것만도 쉽지 않았을 텐데 반대 의견은 없었나.

=기획을 던진 건 일년 전쯤이었다. “우리 방송 하자.” “왜요?” “재밌잖아. 관객이 배우 보고 싶어 하는데 볼 수가 없잖아. 그럼 우리가 만들어줘야지. 우리가 지금껏 해온 게 그건데.” 결국 좀더 많은 관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싶었던 거다. 다행히 내가 복이 많은지 아무도 반대하진 않더라. 예전과 달리 관객과 배우의 거리가 멀어졌다. 전엔 공연이 뜻대로 안 돼서 내가 힘들어 울고 있을 때 직접 관객이 등을 두드려줄 수 있었을 정도로 관객과 배우가 가까웠다. 요즘은 매니지먼트가 커지면서 배우가 관객에게 거리를 두는 것도 있고, SNS가 흥하면서 관객이 배우에게 상처 내는 것도 쉬워졌다. 이렇게 멀어지는 게 무서웠고, 예전의 거리가 그리웠다. 배우들이 평소 진짜 웃긴데 우리끼리만 아는 것도 아쉽지 않나. 방송전문가들의 편집기술과 이들의 캐릭터를 합치면 굉장히 재밌는게 나오지 않을까. 차세대 <뮤지컬 이야기쇼>가 가야 할 방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험이 필요했다.

-뮤지컬 배우들이 예능 포맷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뭔가.

=의외로 관객은 배우들이 주로 가는 맛집, 대학로에서 배우들이 시간 때우는 법, 학교 다닐 때 연기는 어떻게 연습했는지, 이런 걸 궁금해한다. 맨 앞줄을 채우는 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위성시계까지 맞춰놓고 티케팅을 하는 마니아 관객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의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밀녹’(몰래 녹음하는 행위), ‘밀캠’(몰래 녹화하는 행위) 등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배우들이 모르는 게 아니다.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라면 모르는 척하는 거다. ‘관크’(관객 크리티컬의 준말. 비매너 행위로 다른 관객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한다)에 대처하는 법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얘기들을 배우들이 언급하는 걸 재밌어하기도 한다. 보여줄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웃음)

-반대로 공연 볼 때의 현장성은 못 느끼게 되지 않겠나.

=가장 위험한 생각은 공연을 그대로 찍는 거다.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뮤지컬이 침체기에 접어든 것 같다. 이 시기를 잘 넘어설 필요가 있는데 지금의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포맷을 통해 새로운 관심을 환기하고 싶다. 공연 예술에 있어서 관객은 소비자가 아니다. 배우와 마찬가지로 행위자다. 관객의 반응이 없으면 배우가 아무리 잘해도 훌륭한 공연이 될 수 없다. 관객은 공연을 즐길 권리도 있지만 그 공연을 함께 잘 만들어가야 할 의무도 있다. 클래식 공연이나 오페라는 공부하고 가면서 뮤지컬은 왜 그냥 보러 올까 궁금했다. 우리가 보여주는 준비과정들과 비하인드를 보고 관객이 공연에 대한 매력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되면 더 재밌을 거다.

-뛰어난 예능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판국에 <배우수업>이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관객은 웰메이드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재밌는 걸 원한다. 우리의 상대는 <무한도전> <1박2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파일럿의 목적은 그 ‘비스꾸무리한’ 것만 만들면 된다는 거다. ‘아이고, 비슷하게 하려고 노력했네’ 정도면 된다. 초등학생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자. 여기다 작품성을 논할 건가, 완성도를 논할 건가.

-그동안 공연 전까진 배우 라인업이 비공개였는데 이번엔 사전에 캐스팅을 밝히고 시작한다는 차이도 있다. 이석준, 최대훈, 정상윤, 박해수, 최성원, 임철수까지 여섯명이 정예부대로 첫 출격한다.

=<무한도전>의 영향인지 여섯명이 완전체인 것 같다. (웃음) 내가 아는 배우들 중 가장 독특하고 재밌는 이들이다. 내가 무척 잘 아는 배우들이기도 하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뮤지컬 배우들은 카메라 들이대면 굳어버린다. 서로 격식을 차리지 않고, 고삐를 풀어놓을 수 있는 여섯명이랄까.

-지난 11월30일 연극 <사회의 기둥들>(김광보 연출)을 마쳤다. 배우로서 다른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내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거다. 올해 활발히 활동했는데 지금 약간 우울증이 온 것 같다. 슬럼프 아닌 슬럼프인데, 변태할 시기가 왔다. 청춘의 역할을 못할 때가 올 테니까 배우로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내년엔 작품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거다. 점점 고민이 많고 어려워진다. 와이프는 돈을 안 벌고…. (웃음)

-배우자인 배우 추상미는 어떻게 지내나. 연초 연극 <은밀한 기쁨>을 마친 뒤의 근황이 궁금하다.

=장편영화 연출을 준비하며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돈 벌 작품을 쓸 사람이 아니라 큰일이다. 휴…. 내가 11월 말에 공연을 끝내고 쉬니까 옳다구나 싶었는지 일주일 동안 짐싸들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시나리오를 쓰다 오늘 왔다. 지금 난 겨우 육아를 인수인계하고 인터뷰하러 온 거다. (웃음) 아기도 잘 크고 있다. 말을 빨리 배워서 그런지 어머니가 자꾸 보통 애가 아니라고 하시는데 난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배우는 안 시켜야지. (웃음)

-12월28일 <배우수업> 첫 촬영 뒤 29일엔 <뮤지컬 이야기쇼>의 71회 공연이 열린다.

=공연 때는 <배우수업> 촬영 비하인드를 풀게 될 거다. 뮤지컬과는 준비 과정이 너무 다른 데다 막바지라 정신없지만 어쨌든 고(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