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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의 노액션배우 예찬론 [1]
사진 오계옥 2002-03-08

아! 김두한 바지 틈의 빨간 팬티여!

자칭 액션중독자. '씸마이" 영화를 사랑하고, 성룡 영화에 출연하는 게 소원이라 밝혀온 류승완 감독. <다찌마와 Lee>로 70년대 액션영화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는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백일섭, 백찬기, 김영인 같은 왕년의 스타들을 모셔 다시 한번 애정을 고백한다. 류승완이 옛 기억을 더듬어 풀어놓는 짜릿한 영화관람의 회고담, 액션배우 예찬론. 편집자

오줌 냄새인지 오징어 냄새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냄새가 지배하던 검은 어둠 속. 어린 나는 좌석번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극장으로 들어가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잽싸게 뛰어간다. 나름대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편한 마음으로 폼나게 팔걸이에 팔을 턱 올려놓는 순간, 이런! 오늘도 누가 팔걸이 밑에 껌을 붙여놓고 나갔다!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붓는 동안, 어둠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이 커다란 흰 천을 향해 돌진한다. 어렸을 때 도대체 무엇을 광고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봤던 생리대 광고를 지나, 친절하게 그려놓은 양장점과 예식장 등의 지도가 펼쳐지는 동네 광고를 보내고 나면, 불규칙한 색깔의 비가 내리며,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빨간 글씨로 제목을 알리는 영화가 시작된다. 물론 대한 늬우스는 필수코스.

두둥! 검은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흰 면장갑을 착용한 영웅들이 항상 그림하고 소리하고 잘 매치가 안 되는 상태로 멋진 대사들을 한바탕 읊고 난 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둘러싼 악당들을 물리친다. 언제나 악당들은 맞지 않은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고, 여럿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꼭! 한 사람씩만 덤빈다. 옛날엔 아무리 수가 많아도 한 사람을 공격할 땐 한 사람씩만 덤비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나보다. 아니면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이 남아 있었거나. 하지만 영화를 본 내게 그런 싸움의 예절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역시 한국영화는 안 돼!”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나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토종 액션영화는 안 돼…”

어린 시절을 지방의 소도시에서 보낸 나는 동네에 하나 있는 극장에서 매주 두편씩 동시상영 영화를 보았다. 다행히 지방이라서 그런지 아저씨들은 어린 내가 혼자 극장에 들어가도 붙잡지를 않았다. 물론 대부분 삼촌과 드나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게 한국 액션영화의 기억은 동시상영관 문화로부터 시작된다. 지금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당시 지방의 극장에서는 과거에 상영했던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가 동시상영할 영화의 수급이 여의치 않을 경우 옛날 영화를 틀곤 했던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난 이소룡의 <사망유희>를 필름으로 보았다! 그때 동시상영 프로는 <변강쇠>였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시간을 초월한 배급을 펼치는 극장문화 덕분에 엉뚱하게 과거의 한국영화들을 보곤 했다. 하지만 당시에 성룡의 화려한 몸놀림에 빠져 있던 내게 한국의 토종 액션영화들은 마음의 상처만 안겨주었다. “역시 우리는 안 돼…” 식의 상처 말이다. 그나마 제작되던 한국·홍콩 합작영화들 덕분에 한국에도 그럴 듯한 액션 스타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려 했지만 그 영화들의 무국적성 때문인지 결국 나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다(아마도 무국적성에 예민했던 이유는 살벌한 반공교육과 함께 강요된 애국애족에 대한 교육의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뒤로도 나는 동시상영으로 인해 볼 기회가 아니면 일부러 한국 액션영화를 볼 생각은 하지 않았고, 또 어느샌가 그나마 제작되던 액션영화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10대 시절 마지막으로 본 액션영화다운 액션영화는 진유영 주연의 <인간시장>과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시리즈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난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애타게 피를 찾는 뱀파이어처럼 새로운 피를 찾아 극장과 비디오 가게를 기웃거렸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한국 액션영화를 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영화를 폭식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매끈한 영화들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운 출구로 선택한 길이 바로 B-무비의 세계였다. 뭔가 엉성한 것 같은데 다른, 그래서 즐거운…. 영화 속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을 할수록 나는 웃었고, 배우들의 연기가 설렁설렁할 때면 오히려 배우의 연기에 푹 빠졌다. 난 언제부턴가 삐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나는 다시 한국 정통 액션영화와 화해를 시작한다. 모두가 외면했고 명절 때 방송에서도 밤 12시가 한참 넘어야 틀어주던 그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에게 가장 고전적인 액션 스타는 이대근과 황정리와 거룡과 당룡이었지만 이 시기를 통해 박노식, 허장강, 장동휘, 독고성, 이대엽, 오지명, 김희라, 백일섭, 황해, 장혁, 문오장 등 일일이 이름을 나열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액션 스타들을 만나게 된다. 아! 그대들은 아는가. 협객 김두한이 하얀 정장을 입고 멋진 발차기를 날릴 때 쭉 찢어지는 바지틈 사이로 비추는 빨간 팬티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향수 어린 협객의 시대

지금은 조폭이라 불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낭만을 잃지 않기 위해 홀로 전쟁터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이들은 깡패나 조폭이 아닌 협객이라 불렸다. 아! 협객…. 분명 이 시절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이 아닌 협객 김두한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절 영화들은 아직 사리분별이 흐린 관객을 위해 선이 좋고 악이 나쁘다는 친절한 교육용 멘트로 마무리를 지었으며, 조금 더 나아가 국내의 위험한 정치상황을 좀더 쉽게 정리해주기 위해 악당 두목을 느닷없이 간첩으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유주얼 서스펙트>에 비견할 만한 반전이 이미 우리의 영화 역사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방랑자>가 마지막에 여주인공에게 내겐 여자가 필요없다며 떠나는 반면 우리의 협객은 그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관객을 향해 일장연설을 펼친다. 이 얼마나 철저한 팬 서비스인가! 이처럼 시나리오 교과서들에서 하지 말라는 거의 모든 것을 실천하는 영화가 과거의 향수 어린 액션영화들이었다. 분명 의도한 파격은 아니었지만 세대가 바뀐 지금 예전 영화들의 엉뚱한 장면과 대사들은 너무나 흥미롭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점을 또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배우들의 감정이다. 비록 우리의 액션 영웅들이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곡예에 가까운 액션기술을 펼치진 못하지만 그들이 악당들과 대결을 벌일 때의 눈빛은 이소룡과 왕우가 보여주던 비장미와 일맥상통했다. 배신한 친구에 의해 아편쟁이가 된 부인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고독한 영웅의 눈빛…. 크! 우리의 액션영웅들은 결전의 순간에서도 한 호흡 쉬어가며, 자신의 생을 돌아볼 줄 아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난 어느 순간부터 정색을 하고 예전의 액션영화들을 찾기 시작했고, 이제부턴 또다른 즐거움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형님을 위해, 형님 때문에

지금은 시트콤 스타로 더욱 친숙한 오지명씨나 푸근한 아버지나 재미있는 푼수 캐릭터로 친근한 TV스타 백일섭씨 등이 예전 액션영화들에서 한 가닥하는 왈짜패들로 나올 때의 재미란…. 난 예전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장동휘 아저씨나 박노식 아저씨가 벌이는 장면들보다 조연으로 등장하던 아저씨들의 연기가 더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팔도 사나이>에서 엘리트 깡패로 등장하는 오지명 아저씨가 일본놈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정도로만 살려두는 가혹한 린치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전하는 장면의 비장미는 일품이다. 물론 그 편지를 받는 박노식 아저씨가 글을 못 읽는 바람에 오지명 아저씨는 죽어가면서도 편지를 다 읽고 죽어야하는 수고를 하지만 말이다. 또 백일섭 아저씨는 어떤가. 시골에서 갓 상경한 막내건달의 이미지로 기차역 앞에서 운명적인 고수와 만난 뒤 대결을 벌이고, 이 대결은 영웅들의 모임을 만들어내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백일섭 아저씨가 벌이는 싸움은 그다지 큰 명분이 있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안고 온 보따리를 지키기 위해 주로 벌어진다. 극의 흐름이 과도하게 진지하게 진행된다 싶으면 어김없이 유머 코드를 진행시켜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인물이 바로 백일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던 캐릭터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슬픔은 배가 되는 법. 언제나 “형님”을 위해, 혹은 “형님들”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는 백일섭 아저씨의 모습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나는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며 찍은 장면 중 하나인 칠성파의 최후 장면에서 보여준 백일섭 선생님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부분은 본편에서는 삭제되었다).

또한 주인공들에게 가려져 낯은 익지만 이름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악당들이 난 좋았다. 언제나 묵묵히 보스의 옆을 지키고 서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외투를 벗고 주인공과 대결을 벌이는 모습은 낭만이 있었다. <오사카 대부>에서 이대근 아저씨와 마지막에 시공간을 초월하며 대결을 벌이던 김영인 아저씨의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 끝까지 싸운다.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펀치로 이기는 게 아니라 맷집으로 이기는 것처럼 말이다.

선배들의 존재를 확인하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면서 내가 보고 싶었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예전의 액션 스타들을 모시고 싶었다. 백일섭 선생님처럼 예전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분들을 통해 잊혀졌던 기억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었고,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한 분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건재한 모습을 나 스스로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너무나 쓸쓸한 모습들을 발견했다. 내가 다시 부활시키고 싶었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혹은 너무나 빠른 영화계의 변화 속에서 물러나 연락 두절이 되거나, 아니면 도저히 연기를 하지 못하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계시거나…. 하지만 결국 백일섭 선생님이나, 김영인 선생님, 그리고 백찬기 선생님 등 과거의 액션배우들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난 그분들에게 다시 스크린에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드릴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오히려 기회를 제공받은 사람은 나였다. 난 이분들을 통해 온몸으로 영화를 만들던 당시의 진심 어린 애정을 느꼈고, 영화란 머리가 아닌 끓는 피와 뜨거운 땀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에게도 멋진 선배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흥분은 도저히 설명이 안 될 것 같다.

어쨌건 이 작업을 통해 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다. 그리고 그 강은 생각보다 깊이가 얕았다. 그 얕은 강을 건넌 것이 먼 길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역사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우리의 선배님들이 계속 현역에서 역사를 이어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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