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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
김곡(영화감독) 2015-04-03

장르의 머릿돌 클리셰에 대해서

<건축학개론>

클리셰, 판에 박힌 표현이란 뜻이다. 누가 먼저 썼냐 할 거 없이, 너도나도 써먹어서 닳고 닳았기도 하거니와, 얼마나 닳고 닳았는고 하니 안 써주면 그 누군가에겐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막연한 죄책감마저 유발하는 그런 식상한 아이템. 어떤 장르에도 클리셰가 있다. 과감히 바꿔 말해보면 그 장르를 대표하는, 그래서 이게 빠지면 장르 자체의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는 클리셰가 있다는 말이렷다.

예를 드는 것도 무척이다 쉽다. 어떤 장르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상황, 사건, 설정이 바로 클리셰니깐. 예컨대 스릴러의 경우, 범인에게 추격당하던 주인공이 겁나 몸을 숨겼는데(대부분 화장실이나 침대 밑), 틈새를 통해서 범인의 발이 지나가는 것을 본 후, 안심하는 순간, 두눈딱 개심쿵. 더 간단한 클리셰도 있다. 범행현장 혹은 범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금살금 걷는 발, 반대로 범행의 흔적을 모두 숨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순간 미처 놓치고 있었던 얼룩이나 흔적. 공포영화의 클리셰는 단연, 문을 열기 직전의 순간이다. 문 뒤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을 가지고서 문을 열까 말까…. 인물들간의 대화가 많은 드라마의 경우, 클리셰는 대부분 대화의 체위들과 말들의 밀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색한 말을 못 들은 척하거나 화제를 억지로 바꾸려는 노력 혹은 밥상머리에서 갑자기 터트리는 울음 혹은 격분, 모두가 다 보는 자리에서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고백 혹은 폭로 등. 멜로물의 클리셰는 너무 아름다워서, 클리셰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멜로물의 클리셰들은, 말할까 말까 하는 고민, 키스할까 말까 머뭇거리는 순간의 밀당, 돌아설가 말까 하는 순간의 고민, 환심을 얻기 위해서 하는 사소한 거짓말 혹은 내숭, 상대의 대시를 모른 척하고 받아주기, 막연히 기다리기 등.

<끝까지 간다>

알지만 경험하고 싶은 것

다 알고 있다고? 클리셰 앞에서- 특히 다 안다는 식의 지식 따위의- 자만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클리셰는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당신조차 순식간에 매혹시킬 테니깐. 클리셰는 격투기로 치자면 유인타를 날린 후 머리를 들이대는 테이크다운이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말이다. 이게 클리셰의 진정한 힘이다. 뻔하지만, 언제나 매력적인. 식상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쫓아오는 범인으로부터 도망치다가 화장실에 숨었다고 해보자. 당신은 범인이 들어오는 문소리를 듣는다(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닌가보다, 오줌만 싸고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닌가(역시 소리만 들린다). 당신은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몸을 숙여서 문틈으로 바깥을 조심스레 내다본다. 역시나… 발이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라고 안심하는 순간, 두눈딱 개심쿵(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봤는데, 어떤 영화인지 아는 분 있으면 연락 좀). 귀신이 쫓아오고 있다고 해보자. 물론 귀신은 발이 없어서 뛰어서 쫓아오진 못한다. 이쪽으로 가보면 이미 와 있고, 저쪽으로 가보면 거기도 이미 와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미치고 팔짝 뛰던 통에 도망치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없어졌다. 또 한바탕 미치고 팔짝 뛰다보니 여자친구가 어둠 속에서 소리지르며… 도와달라며… 손을 내민다. 당신은 다급한 마음에 여자친구의 손을 잡아당긴다(그러나 여자친구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진 않는다). 점점 빨려들어가는 여자친구의 손, 그럴수록 더욱 세게 잡아당기는 당신. 이때 뒤에서 여자친구가 나타난다. “너 거기서 뭐해?” 저게 여자친구라면, 이 손은 누구지? 당신은 서서히 시선을 돌린다… 두눈딱 개심쿵(타이 공포영화 <커밍순>에서 인용). 쓰면서도 느끼지만, 알면서도 당하는 게 클리셰의 본질이다. 그렇게 많이 안다는 당신은 클리셰가 시작되면, “에이, 뻔한 상황이군”이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클리셰가 시작되고 서서히 긴장감이 조여오면, 1분 뒤 당신은 이미 모든 지식을 내버린 채 스크린에 이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물론 클리셰가 끝나면 당신은 다시 똘똘이 스머프 모드로 돌아올 수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어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변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클리셰는, 작동하는 순간 이게 클리셰인지도 모르게 하는 클리셰이다. 사랑하던 상대가 돌아설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클리셰란 말이 과연 떠오를까? 눈을 감고 잠든 그녀에게 키스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키스를 하다가 행여 깨어나지는 않을까 망설이는데, 반대로 그녀가 과연 진짜로 잠든 걸까, 아니면 도리어 키스를 기다리면서 잠든 척하는 것일까 고민하는데, 클리셰란 말이 과연 떠오를까? 마음 졸이기도 바빠 죽겠는데?(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인용해봤다.)

클리셰는 모두 알고 있지만 모두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모두 알고 있지만 경험해보고 싶어서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것, 다시 말해보면 모두 알고 있지만 경험해보기 전까지 모르는 것이다. 클리셰는 알거나 모르고의 차원을 떠나 있는, 순수한 경험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아이템이다. 클리셰는 롤러코스터 같은 것이다. 당신은 이 롤러코스터의 최고 시속과 코스 패턴들을 다 알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막상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의 짜릿함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알고 있기에 더 ㅎㄷㄷ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클리셰는 누가 알건 모르건 그 자리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탄다”(ride). 그래서 클리셰는 창조되는 게 아니다. 클리셰는 끊임없이 재발견될 뿐이다. 부단히 재발견되고 재평가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고 해두자. 영화의 창조정신 때문에, 영화인들은 바로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영화인이 클리셰를 창조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창조한 것은 클리셰의 변주일 뿐이지 클리셰 자체는 아니다. 예컨대- 이제는 김곡이 드는 예시의 “클리셰”가 되어버린- <괴물>(감독 존 카펜터)은 정확히 스릴러 클리셰들에 충실하다. 다만 난도질 살인마가 몸 안으로 숨었을 뿐이다. 카펜터가 한 것은 이것이다. 살인범을 몸 안으로 숨기고, 나머지는 모두 클리셰의 권능에 맡기자.

<킬 빌>

가장 강력한 예는, 영화가 고집하는 창조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TV드라마일 것이다. 특히 막장 드라마는 클리셰를 지독하게 나열해대지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나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 뻔뻔함과 식상함을 욕하면서도 열심히 봐댄다. 왜냐하면 안다고 해서 안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하지만 너무도 미련해서 언제나 당하고만 있는 저 주인공이 재벌 2세와 결혼에 골인하는 과정, 사악한 메이크업만 봐도 한눈에 악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사랑을 훼방 놓는 과정(다만 궁금한 변주들은 싸대기를 치는 게 이번엔 숟가락인지 김치인지 하는 것이다), 실종된 전남편이 예외 없이 되돌아오고 뇌사상태의 목격자가 예외 없이 의식을 되찾는 그 타이밍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거다(막장드라마의 가장 좋은 클리셰 분석은 <엔하위키 미러> 참조,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대로 영화계 한가운데서, 창조정신이고 나발이고 고상한 예술관은 다 집어치우고, 클리셰를 잔뜩 짜깁기해서 말 그대로 클리셰 종합선물세트로도 얼마나 영화가 재밌을 수 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실험영화 진영의 푸티지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단연 타란티노다. 그는 온갖 (특히 B급) 영화들의 대사, 상황, 설정, 심지어 미장센까지도 모두 긁어모아서 영화를 만들지만, 제길, 재미있다. 두 남자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다가, 그들 중간에 타이밍이 다 돼 식빵을 뱉어내는 토스터기의 클리셰(<펄프 픽션>), 일본도를 쥔 두 여검객이 달빛 아래 공중을 가르는 개허세 클리셰(<킬 빌>)는 지금까지도, “알면서도 당하는 기술”이다.

<건축학개론> <끝까지 간다>의 변주

클리셰는 장르의 머릿돌이고 그 대표자인데도, 언젠가부터 도전의 대상으로 치부되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 같다(경쟁이 심화되어서겠지). 그래서일까. 한국영화에 클리셰를 작렬시키는 최근 영화 두편이 유난히 반갑다. 하나는 <건축학개론>이고, 또 하나는 <끝까지 간다>이다. 멜로물의 클리셰(첫 키스 기다리기, 돌아서기, 다시 만나기, 선물주기)와 스릴러의 클리셰(시체 숨기기, 도망가고 쫓기)에 충실한 이 두 영화는, 클리셰를 창피해하고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하다가, 달나라로 입갤하는 신세대 영화들과는 다르다. 신세대주의는 클리셰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단지 소거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영화가 복고주의는 아니다. 복고주의는 상상의 클리셰를 기억의 클리셰로 은근슬쩍 바꿔치기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영화의 진정한 힘은, 고전적 클리셰를 정면돌파하는 그 변주력에 있으므로, 클리셰주의라고 불러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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