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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이만큼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5-04-07

<화장>에 대해 정성일이 묻고 임권택이 답하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에 대한 많은 암시가 사방에 있다. 하지만 스포일러 없이 작품에 대한 인터뷰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예의상 먼저 당신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린다. 그러니 이 인터뷰를 읽고 난 다음 영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영화를 본 다음 읽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판단이다. 한 가지 더, 인터뷰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문장의 수순이 구어체를 옮겼기 때문에 일부 문장이 문법적으로 어수선할지 모르지만 정리하는 과정에서 빚어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읽기보다는 말하듯이, 혹은 귀기울여 들어보듯이 따라가길 권한다._정성일)

정성일_아마도 이 인터뷰가 <화장>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다소 장황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영화쪽에서도 감독님의 102번째 영화이자, 또 한편으로는 명필름이라는, 이제는 한국 영화산업에서 독립적인 영화 제작사들이 대기업의 자본과 배급 때문에 힘겨운 전투 끝에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 안에서 그래도 자기 색깔을 내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영화사가 20년을 맞이하면서 감독님과 만나 만든 영화라는,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각자의 작가주의 성향을 지닌 대가와 제작자가 만나 만들어낼 화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문단에서는 김훈 작가라는 단단한 문체와 견고한 자기 세계를 지닌 소설가의 작품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질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만남일 것입니다. 이건 감독님이 원건 원치 않건 <화장>이 놓인 특별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제 관심은 좀 다른 데 있습니다. 감독님 자신은 거의 의식하지 않으셨겠지만 <화장>은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현대를 의식적으로 다룬 거의 첫 번째 영화입니다. 저는 ‘현재’가 아니라 ‘현대’라고 말했습니다. 직전에 만든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도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한지(韓紙)를 따라 시간여행을 하듯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도 <축제>(1996)는 고향에 내려와 전통적인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길소뜸>(1985)은 현재를 무대로 하지만 다시 한국전쟁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태여 <티켓>(1986)이 ‘현재’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이름 모를 해변도시 외곽으로까지 빠져나갑니다. <화장>은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어떻게 보면 거의 유일하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혹은 거기서 내려오는 어떤 끈도 없이, 그저 그렇게 내던져지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다룬 첫 번째 영화입니다.

임권택_이제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영화를 만든다는 것, 거기에 담는다는 것, 영화감독을 오래 해보니까 영화는 감독 자신이 살아낸 삶, 그 삶에서 누적되어온 경험들. 그거를 찍어내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 같아. 왜 그 이상은 안 되냐면, 가령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적된 어떤 삶의 경험들이 있는데, 그것 이상을 하고 싶어서 그걸 영화로 담는 일은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영화에 담길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걸 그간 내가 영화를 하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거예요. 아직 체험을 못했기 때문에. 그러면 더 젊은 쪽을 찍어보자 하면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젊은 나이에 내가 느꼈던 그런 것들을 지금 하려고 들면, (잠시 생각) 반대로 지금 나이에서 그걸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자면, 그게 또 어리기 때문에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저 지금을 찍는 문제인 거예요. 그걸 훌쩍 넘어서거나 아니면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은 도저히 찍히는 세계가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갑자기 나이보다 더 어린 영화도 해내선 안 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훌쩍 뛰어넘어서 더 어른스러운 이야기도 영화에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만큼만, 살아온 그만큼만, 그렇게 담긴 만큼, 그런 담김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만큼 찍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정성일_감독님께서 김훈 작가의 작품에 처음 매료된 것은 <칼의 노래>였습니다. 이전에 감독님은 조선시대를 다룰 때마다 무인(武人)보다는 문인(文人)의 세계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다루었고 그들의 세계가 지닌 예의와 아름다움과 엄정함과 잔혹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에 이끌린다고 말씀하셨을 때 다소 의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칼의 노래>가 한편의 소설로서 지닌 완성도라는 측면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김훈 작가는 <현의 노래>를 이어서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고, 거문고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이야기가 감독님에게 <서편제>(1993), <취화선>(2002), <천년학>(2006)에 이어지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소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칼의 노래>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무인으로만 다룰 수 없는 문인의 기질도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김훈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칼의 노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일 텐데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언제인지요?

임권택_오래됐죠. 아마도 그게, 책이 나온 다음에 (2001년에 초판이 나왔다. 그 무렵 임권택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취화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읽은 건 아니고, <칼의 노래>라는 김훈 소설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을 무렵에, 그때 나도 읽었을 것 같은데….

정성일_<칼의 노래>에 대한 매혹은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미루고 또 미루어졌습니다. 한편의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개입할 것입니다. 물론 산업의 논리가 먼저 가로막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감독님 자신이 안에서 더 숙성시켜야 할 시간도 필요했던 건지요?

임권택_김훈씨의 <칼의 노래>는 그 이야기를 더 숙성시킨다기보다는 그 작품 안에 그 시대의 전환 속에서 살아가는 면모랄까, 그런 시대상을 이렇게 이순신이라는 한 관리가 살아내는 속에서 그 시대를 드러내기에 아주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말하자면 그 안에서 소설은 그런 명문을 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영화로서는 그게 규모가 너무 크고 시작하면 힘에 부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예요. 내가 <칼의 노래>에 다가갈 때는 장군을 다룬다거나, 무인을 내세운다거나, 이렇게 구획지어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아간 무인의 정신을 그리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나는 이 소설에서 한 벼슬아치가 자기 소신을 살아내고 있는 그런 게 좋았던 거예요.

정성일_<칼의 노래>에 이끌린 이후에 김훈 작가의 작품을 관심을 갖고 읽어보셨습니까?

임권택_다 읽었죠.

정성일_<화장>은 언제 읽으셨나요?

임권택_그게 참, 그런데 <화장>은 읽지 않았어요. 우연히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책이 나온 지 10년 후에 읽었으니까요. (<화장>은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화장>

지금 내가 바라보는 죽음

정성일_감독님은 1970년대 문예영화들을 거쳐 1980년대에는 김성동(<만다라>), 이문열(<안개마을>), 그리고 1993년 <서편제> 이후 이청준 작가와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였습니다. 아마도 김훈 작가는 감독님에게 21세기에 발견된 이름일 것입니다. 소설로 만난 이 작가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_(잠시 생각) 살면서 삶 자체에서 우러나는 어떤 것들, 그런 거를 엄청난 힘을 가지고 문장으로 구현해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작가. <화장>을 처음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어렵겠다, 영화로 옮기기 어렵겠다, 그러나 한번 대들어볼 만은 하다, 는 것이었지요. 거기서 시작된 거지요. 그런데 대들어볼 만한데, 김훈 작가가 소설 <화장>에서 정신적으로 추은주한테 쏠려가는 그런 현상의 묘사들이, (잠시 생각) 도저히 그 묘사들은, 그러니까 거기에 담겨 있는 소설의 재미나 힘들을, 그걸 원작대로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힘들고, 아마도, 그럴 거야, 아마도 거의 가능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자칫 잘못하면 소설 가져다가 망쳤다는 소리 듣기 딱 좋게 되겠더라고. 그러면 이제 이걸 영화로 옮겨야 하는 내가 그걸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냐, 라는 문제와 마주해야 하잖아요. 그건 그 안에 없는 사실감을 살리는 것이다, 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간 거예요. 여자한테 빨려들어가는 정신적 추이라고 해야겠지. 이런 것을 자칫 잘못 건드리면, 소설은 그걸 표현해나가는 문장이 거기에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끌리는 감정이란 게 그 자체로 문장에만 담겨져 있어서, 어쩌면 그 쏠림 현상이 관념일 수도 있을 만큼, 읽는 이들이 문장을 따라서 그런 환상으로 빨려들고 있는 소설인 거예요. 그 문장이, 그런 점에서도 대단히 힘이 있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걸 뒤따라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정성일_저에게는 그 사실감이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화장>이라는 소설을 독서로 좇아갈 때는 문체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그 흐름에 빠져들어가는 문학적 대상으로서 언어화된 형상 뒤에 숨어 있었지만, 그걸 구체적인 이미지로 불러내기 위해 문장의 행간 사이로 들어서자 그 안의 이야기가 왠지 믿을 만하지 않은 구석들이 드러나 보이면서 그 빈칸 사이의 리얼리즘이랄까, 삶의 구체성을 드러내 보이는 사실-이미지를 찾아 나서기 위해 그들의 감정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 <화장>이 소설 <화장>과 갈라서는 지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임권택_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내가 여기서 사실성이라는 말을 할 때는 <화장>이라는 이 소설이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화장>이 소설이라는 문장으로 드러내는 형식을 내가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 거죠. 말하자면 여기서 사실성이란 내게는 힘들다, 는 표현인 거예요. 이게 말은 간단한데 문장이 버티고 있으면 그 안으로 영상이 들어가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그 영상이 사실감 없이는 견딜 수가 없는 거요.

정성일_그저 외형적으로만 보자면 <화장>이라는 작품은 아내가 죽은 후 화장을 하기까지 삼일장을 치르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소설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내의 장례식이 사흘간 진행되고, 여기에 추은주가 방문합니다. 그 사흘간의 이야기 중 한 갈래는 뇌종양 판정을 받은 아내가 수술을 받은 다음 죽어가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추은주를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가 떠나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런 구성만으로 이야기한다면 전통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축제>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안성기씨가 주인공이었는데, 하지만 이 영화는 이상할 정도로 명랑하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동화가 끼어들고 있습니다. <화장>은 현대의 장례식을 다루면서 무겁고 어둡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장례식에 관한 감정이랄까, 둘 사이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임권택_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여기서는 내가 바라보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중년의 나이랄까, 그러니까 <축제>를 찍을 때는 그 영화를 찍었던 감독인 나를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어떻게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때를 바라보면, 그 나이에는 죽음을 치장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화장>을 찍고 있는 지금은 그런 치장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무것도 생각하는 것이 없어요. 이젠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죽음에 대해서. 여기서는 그런 시선으로 장례식을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은 죽음 앞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죽음을 보는 <축제> 때의 감독의 정신적 죽음관이 거기에 있었다면 지금은 내 나이 여든살이 되면서 바라보는 죽음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여기에 이렇게 심어놓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정성일_아, 그렇다면 그 죽음의 무게가 가까이 다가와서 치장을 모두 걷어낸 <화장>은 감독님 영화 가운데 가장 무거운 영화 중 하나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임권택_그럴 수 있죠. 무거울 수도 있죠. 나도 영화 <화장>을 찍어놓고 보니 자꾸 이번에는 물어보고 싶어지는 거예요.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가 하여튼 관객한테 보여지고 설득력을 얻어내는 절차를 거쳐야 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관객한테 설득력 있게끔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이제까지는 이렇게 하면 될 것이라는 어떤 막연한 신념 때문에 그쪽을 향해서 막 가본 그런 영화들이, 그런 장면들이, 그런 결정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영화 <화장>을 다 보고 난 다음에 오죽하면 내가 먼저 관객한테 묻고 싶은 게 어떻게 보았냐, 는 질문이에요. 여기서는 그 말을 맨 먼저 묻고 싶은 거예요.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그 영상 안에다 자기의 생각이나 여러 가지를 담아서 보여줄 때에는 소기의 목적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목적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가령 빠져들고 있는 추은주라는 여자에 대해 사랑하는 이 남자의 마음이랄지, 그 여자를 갖고자 하는 어떤 성적 욕구랄지, 이런 거를 어느 한계에다 놓고 찍어야 관객이 같이 동의하면서 따라오겠는가를 모르겠는 거예요. <화장>을 만들고 보니 나한테 그런 영화가 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서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자면 <화장>이라는 소설이 갖는 그런 엄청난 힘, 화려한 문장력. 그걸 영화로 담아내는 의도 자체가 자칫하면 수렁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내가 했단 말이죠. 가령 이런 거예요. 우리가 한 여자한테 빠져들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자기의 중요한 일이 끝난 나머지 시간, 그 여유 시간은 온통 그 여자한테로 가게 되어 있잖아요. 하루에 몇 백번이라도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갈 수 있는 거예요. 난 애초에 영화 <화장>을 이런 영화로 찍고 싶었어요. 이런 영화는 누구도 찍은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그런 영화를 찍고 싶었던 거예요. 사내가 그 여자한테 쏠리는 감정의 추이를 찍는 영화. 그런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그걸 하고 있는데, 그걸 찍었는데, 거기서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게 맞는지, 거기서 수백번 왔다갔다하는 환각의 세계 같은 욕구를, 그 자체를 그렇게 아름답게 찍어내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만난 거예요. 정연한 영상의 조합으로 그걸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걸 해낸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영화를 본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화장>

인간적인 헌신의 관계

정성일_영화 <화장>은 여러 의미에서 이전 영화들과의 어떤 결별처럼 여겨집니다. 그것이 일직선은 아니지만 감독님의 영화는 사람에게서 영혼이랄까, 정신에 대한 탐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 그 안에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맹렬하게 반성하면서, 심지어 때로는 몸이 부서질 정도로 밀고 나아가서 그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화장>은 태도에 대한 결별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몸에 대한 관심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 상무는 전립선염을 앓으면서 항상 방광에 가득 찬 오줌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아내는 내내 뇌종양으로 고통을 받고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죽어가고 그런 다음 시체가 되어 그 곁에 사흘 동안 머물다가 한줌 재로 떠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 입사한 추은주는 꽃처럼 피어납니다. 그렇게 종종 카메라는 오 상무의 시선과 추은주 사이에 꽃을 매개합니다. 저는 영화 <화장>이 마치 소설 <화장>을 매개로 하여 몸으로 가는 여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임권택_몸에 대한 관심이 살면서 그만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죽음관을 이야기한 거예요. 여기서는 욕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보다 죽음관이 더 앞선 거예요. 그게 이 영화에 담긴 세월이자 내가 달라진 태도예요. 아니, 그보다는 죽음관이 세월 따라 달라졌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거예요.

정성일_그걸 보여준 장면이 이 영화에서 이례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상여 장면인가요?

임권택_그렇지요. 나는 그걸 상여 행렬에 몰아넣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모래언덕 위를 상여를 메고 긴 행렬을 벌이는 거예요. 고증대로 하자면 우리는 상여 행렬에서 삼베옷을 입고 가야 하는 게 맞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모래언덕이라는 흰 바탕 위에 행렬을 따라가는 인물들에게 검정 옷을 입히고 난데없는 자주색의 아주 현대적인 옷을 입은 여자가 그 상여 행렬에 클로즈업되어서 들어와 있단 말이죠. 그 색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작품이 끝난 다음에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 장면을 찍은 거예요. 그건 죽어서 저승길을 떠나는 여인과 곁에서 젊음을 태우고 있는 여자를 종합적으로 묶은 다음 그 둘을 상여 행렬이라는 죽음의 행렬 안에 종합적으로 넣어서 죽음 자체로만 짊어지고 가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한 거지요.

정성일_영화 <화장>을 보게 될 관객 중에는 소설 <화장>을 읽은 독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훈 작가의 원작에서 영화로 각색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추은주입니다. 소설 속의 추은주는 입사를 한 다음 회사 안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고, 그런 다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데리고 회사에 오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아이를 오 상무가 보게 되고), 그런 다음 남편의 워싱턴 발령과 함께 사표를 내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말하자면 추은주에 대한 감정은 오로지 오 상무의 주관적인 마음속에서만 진행될 뿐입니다. 하지만 영화 <화장>에서 추은주는 입사를 한 다음 신랑의 여자가 결혼식장을 찾아와 한바탕 혼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파혼을 한 다음 오 상무의 추천서 덕분에 경쟁사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 우여곡절로 서로의 감정을 알게 되고 마지막 시퀀스에서는 아내 화장을 치른 다음 마지막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소호리 별장에 온 오 상무를 만나기 위해 추은주가 차를 끌고 이곳까지 찾아옵니다. 소호리는 전적으로 영화의 창작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내와 오 상무 사이의 거리는 차이가 없지만 오 상무와 추은주의 거리가 변하면서 연쇄적으로 감정의 네트워크의 이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임권택_그건 이 영화 속 삶 자체의 사실감을 높여서 그걸 통해 영화적 재미를 추구한 면이 있다고 한 것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에요. 오 상무가 추은주와의 연애를 어떤 식으로 하건 크게 이야기하자면 좋아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엔 무슨 대단한 게 없어요. 내가 영화를 통해서 좀 볼거리로 삼고자 한 것은 오히려 처와 오 상무와의 관계에 놓여 있는 거예요. (뇌종양으로 쓰러진 다음 수술을 받고 다시 재발한 다음 운명에 이르게 되는) 그렇게 되어가는 처를 병간호하고 긴 세월을 헌신적으로 해낸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이야기란 말이에요. 나는 여기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 부분을 다루면서 그런 처연할 정도로 헌신을 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사실감을 드러내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여자한테도 그런 사이사이에 오가고 있잖아요.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인 여자쪽에서는 남편의 그런 헌신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정말 죄스럽게 생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자기의 처지가 한스럽고, 그런 중에 그런 남편을 대하면서, 처로서, 마누라로서, 서로 부부 사이에 제공되어야 할 어떤 것도 만족스럽게 할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있잖아요, 지금 그 여자는. 그런데 그러는 중에도 그런 헌신, 정말 처연할 정도의 헌신 뒤에 또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의심이 없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뇌종양으로 인해 수시로 병석에 누운 채로 오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런 가운데에서도 남편한테 보이기 싫고 부끄러운 것을 가리고 싶은 데도 할 수 없이 다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그래도 그런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건강한 생활이 아니었겠느냐, 라고 나는 생각하는 쪽이에요. 이 남자가 그런 중에 젊은 여자한테 이끌려서 보기에는 어떤 미친 욕구를 통해서 오고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적은 없으니까요. 그건 자연발생적인 거고, 그건 얼마든지 그런 욕구로 빠져들 수 있는 건데. 그런 앓이 속에서도 이 남자가 아내를 별로 깊이 사랑하는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인간적인 헌신이랄까. 여자에 대한, 마누라에 대한 헌신. 이런 이성적이면서도 성의를 다한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를 찍은 거예요. 나는 영화 <화장>에서 그런 쪽을 봐줬으면 싶은 거예요. 이 영화가 좀 무언가 재미있고 감동을 주려면 그런 얽힘, 침대에서부터, 냄새나는 데서부터, 몸을 씻겨주는 데서부터, 거기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데에서 (아내와의 관계를 다룬) 이쪽을 본다면 추은주와 무슨 연애 같은 걸 삶의 중심에 놓고 찍은 영화는 아니다, 라는 것이죠.

정성일_그런 맥락에서 병간호를 하던 오 상무가 오물을 흘린 아내를 욕실에 데려다 씻겨주는 장면이 아마도 영화 <화장>의 의도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이 장면은 김호정 배우의 헤어 누드 장면 때문에 과도하게 관심을 모으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찍는 동안 현장에서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원래는 더미(사람 모양으로 만든 소도구)를 제작하여 준비했고, 그런 다음 이를 이용하여 촬영까지 했습니다만, 다시 김호정 배우를 설득하여 재촬영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판단은 현장에서 한 것인데, 그 과정을 좀더 설명해주십시오.

임권택_김훈 작가의 문체로부터 벗어나서 가장 큰 무게로 찍은 장면이 어디냐 하면 바로 그 장면이에요. 이 영화는 두 부부 사이의, 남자의 헌신은 다 드러나 있는데. 여자쪽에서 보자면 이게 남편에게도 가리고 싶을 정도로 치부예요. 그런 거 안에 담겨 있는 사실감. 이 삶을 살아낸다는 건 아내가 남편한테 늘 죄짓고 산다는 그런 생각으로 살아낸 것 아니겠어요. 계속 남편의 수발이 필요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혹시 여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근데 그거는 여자로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남편에 대해서 부인의 어떤 도리가 채워지지 않게 사는 마당에서 당연히 그런 질투심 같은 것을 가지면 안 될 텐데도 여기서는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만나게 되는 거죠. 가리고 싶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지니고 그러면서 또 부부가 엉켜서 산다는 것을 명료하게 드러낼 신이 아주, 아주 필요했던 거예요. 그 신을 통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여기까지 끌려온 스토리며 앞으로 끌어가야 할 얼마 안 남은 이야기들이, 이 부부의 이런 정황을 아주 명료하게 드러내놓고 다시 생각해야 할 것들이었단 말이에요. 여기서 망가지면 이 영화는 망가지는 것이다, 라는 대목이 바로 여기예요. 그러니 나로서는 여기서 필사적이었어요. 왜냐하면 지금 장면을 찍기 전에 더미도 이용하고 그렇게 찍어봤어요. 김호정 배우를 데리고 반신(半身)을 가지고 같은 내용을 찍어본 거예요. 두번이나 잘했다고 생각하고 찍어봤는데, 그게 해보니까 그렇게 전신을 드러내고 찍었던 것만큼이 안 되더라는 거예요. 치부까지 드러내고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찍은 것보다, 그렇게 해서는 이런 효과를 드러내지 못하겠는 거예요. 본인이 못 찍겠다고 했다면 안 찍었겠죠. 하지만 나로서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명료하게 설명되어야 할 신과 만난 거예요.

정성일_영화 <화장>을 보면서 가장 매혹된 것은 안성기 선배의 얼굴이었습니다. 그건 연기라기보다는 그 얼굴에 묻어나는 긴 세월의 표정 안에 담겨 있는 어떤 깊이감이랄까, 제가 이 영화에서 느끼는 사실감은 그 표정에서 나오는 시간적인 무게감이었습니다. 감독님은 <화장>을 준비하면서 오 상무 역할은 안성기 선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판단을 하셨고, 그래서 처음에는 원작을 읽어보고 이 역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할 수 없다고 고사를 한 안성기 선배를 집으로 불러 설득을 해서 출연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안성기 선배의 표정에서뿐만 아니라 이 배우가 아니면 오 상무 역할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은 어떤 근거에서였습니까?

임권택_안성기씨 역할은 기본적으로 회사 중견 간부로서의 무게감이랄까, 그런 관록이 붙은 직업인이잖아요. 그다음에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인의 병치레를 하는데 그러면서도 지금 아내가 겪는 고통 옆에서도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얼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안성기와는) 좀 다른 뻔뻔스러운 얼굴이 되어가지고는 그런 외도가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외설스러운 느낌의 역할을 했을 때 그런 불량스러워 보일 우려가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람은 안 되는 거죠. 그건 안성기라는 얼굴이니까 통할 수 있는 그런 거예요. 그걸 이 배우는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오고 그렇게 또 살아온 데서 나오는 거란 말이죠. 이제까지 안성기라는 배우가 쌓아올린 이미지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아주 예쁘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여자와의 욕구가 표현이 된 데도 안성기라는 얼굴이 견디고 있는 거예요. 그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얼굴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그 안에서 이야기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왜곡시키거나 그럴 일은 없는 배우라는 생각을 한 거죠. 나랑 안성기랑 <만다라>부터 작업을 했던 송길한 시나리오작가가 <화장> 촬영현장에 여러 날 와서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무얼 보러 오냐고 물었더니 안성기가 매일매일 달라지는 그 연기력을 보러 온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정성일_소설과 영화 <화장>은 마지막 장면에서 동일한 엔딩을 맞습니다. 오 상무는 보리를 안락사시킨 다음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 홍보팀에게 간단하게 지시합니다. “지금 뭐 지지고 볶고 할 시간 없잖아, 가벼워진다로 갑시다.” 그건 오 상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의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서늘합니다. 마치 모래 위를 살아가는 사람의 느낌이랄까요.

임권택_그건 또다시 죽음에 대한 생각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에요. 여기서는 부인의 죽음이라든지 한 여자를 사랑했던 마음, 그런 것이 인생에서 대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인생의 삶 자체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 그 밝음을 지향하는 이런 이야기로 따라간 게 아니란 말이죠. 마누라의 죽음이나, 그사이에 한때는 추은주라는 여자에게 열애에 빠졌든 어쨌든, 돌아와서 지금 보니 그저 한때의 꿈이었구나, 그런 일들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살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건을 지금 이렇게 지나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 거예요. 오 상무는 마누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 전화를 하기 전에 아내가 키우던 개를 데리고 안락사를 시키러 간단 말이에요. 만일 오 상무에게 그런 사랑이 있었다면 보리도 죽으라고 병원에 안 주었을 거예요. 마누라가 개한테 주었던 그런 사랑의 마음이 오 상무라는 사람에게는 없는 거예요. 마누라가 살아생전 그렇게 아꼈던 개를, 그렇게 아내가 성의껏 키워서 자란 개를, 이제는 떠나간 마누라의 사랑을 대신 그 개에게 넣어주자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아꼈으면 왜 죽였겠어요, 자기가 키웠겠지. 여기서 오 상무라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일상을 살면서 직장에서 어떻게 성과를 올려서 일을 어떻게 중역다운 속도나 판단력으로 해서 회사를 잘 끌어가느냐, 에만 있는 거예요. 그전에 추은주나 이런 것들은 오히려 이 사람의 단호한 직장생활을 방해하고 있던 이야기란 말이죠.

정성일_말하자면 이런 전체가 모여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를 몹시 차갑게 만들고 있습니다.

임권택_원작 자체도 그렇게 차가운 소설이었어요.

죽은 아내의 선물

정성일_소설에는 없지만 영화에서 만든 장면은 장례식 끝나고 난 다음 오 상무가 소호리의 별장에 와서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는 시퀀스입니다. 이곳에 전혀 예상치 않게 죽은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보낸 와인이 택배로 도착해서 오 상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와인은 회식 자리에 갔을 때 추은주가 오 상무에게 선물한 것과 같은 종류의 와인이고, 그 와인을 들고 병실에 와서 오 상무는 조금씩 마시면서 그녀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병실의 아내가 남편의 마음속에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이때였을 것입니다.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오 상무가 아내의 유품을 태우고 있을 때 다른 회사로 이직한 추은주가 중국 지사로 떠나기 전에 한번 뵙고 싶다면서 소호리까지 찾아옵니다. 그런 다음 여기서 숨바꼭질은 아니지만 오 상무는 그 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텅 빈 별장에 도착한 추은주는 그 와인 병을 보고 그냥 떠나갑니다. 이전까지 죽음과 욕망 사이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서늘하게 진행되었다면 소호리 별장에서는 마치 마지막 내기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 이 장소에는 오 상무와 추은주가 서로 사라지고 나타나지만 동시에 죽은 아내의 그림자가 함께 지켜보면서 머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임권택_거기서는 부인이 저걸 보냈잖아요, 포도주. 그건 그 앙탈을 부리고 죽어가면서도 질투도 많이 하고 했지만 남편에 대한 부인의 도리를 다 못했고 남편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했고 그렇게 죽어간 부인이 이제는 자기가 떠나간 다음에 남편이 좋아했던 여자를 생각하면서 보낸 거죠. 아마도 자기가 죽지 않았으면 그런 짓을 안 했겠죠. 그건 자기가 죽으면 언젠가 둘이 만났을 때 먹으라는 그런 선물이에요, 그게.

정성일_아, 선물!

임권택_물론 그 선물을 부인이 주어서 오 상무도, 추은주도 그 둘 사이를 거기서 그만뒀다고, 그렇게 나는 꼭 집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하여튼 그것은 남편의 입장에서 볼 때 충격이었겠지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그 포도주는 둘의 관계를, 남편과 자기가 알지 못하지만 이 남자 마음속에 있었던 그 여자와의 사귐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거 아니겠냐는 의미를 담은 거지요, 바로 그런 뜻으로 그 포도주는 아내가 전하는 선물이지요. 그 발광을 하고, 그렇게 아프고, 살아서 남편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 그 여자가 떠나면서 준 선물이에요. 죽으면서 여자는 남편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미안했죠. 정말 미안해했죠.

정성일_제가 이 영화의 현장에서 내내 견학을 하면서 이 영화의 뜻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많은 부분을 놓쳤거나 잘못 좇아간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소호리 별장에 도착한 와인을 선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추론해낸 것들에 오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선명하게도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그건 누가 보아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죽음에 담겨 있는 감독님의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를 건드리는 기분이 그렇게 죽음과 욕망 사이에서 얼음과 불을 만지는 것만 같은 무거운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저에게 거의 어둠의 무게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오 상무가 무언가 허우적거리면서 그저 일상을 처리하듯이 시간을 소진해나가는 현대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임권택_나는 여기서, 영화 <화장>을 만들면서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이만큼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내 나이에는, 이런 감정들이, 이런 이야기의 흐름이, 절대 무리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나온 따뜻한 감정이 그 아래에 흐르는 거죠. 그런 따뜻한 감정의 발로가 그런 식으로 가는 거지, 따뜻한 것이 없으면 거기서 어떤 마음을 끌어낼 수 있겠어요. 무슨 시를 보았더니 거기 사랑하는 여자한테 발길질당하고 마누라한테 와서 울고 하소연하는 얘기가 있는 거예요. 그런 넓음도 있는 게 부부 사이라는 건데.

정성일_김훈 작가는 영화를 보고 어떤 감상을 말씀하시던가요?

임권택_처음에는 영화사에 DVD 스크리너를 보내달라고 해서 그걸로 먼저 보았어요. 그런 다음에 극장에 와서 다시 같이 보았어요. 영화가 삶에 가깝고 생활을 닮았다는 말을 해주었어요. (웃음)

정성일_오늘 긴 말씀 감사합니다. 감독님의 말씀을 따라 극장에서 저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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