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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오! 마돈나] 원시적 관능, 순수한 마음

Gina Lollobrigida 지나 롤로브리지다

<노틀담의 꼽추>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전세계의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진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은 전후의 상처를 목격하기에 더없이 적절해 보였다. 당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옥 같은 전쟁의 경험에서 막 빠져나올 때였는데, 이탈리아의 리얼리즘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현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대단히 중요해졌고, 허구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때다. 안나 마냐니가 출연한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도시>(1945)를 제외하고, 네오리얼리즘 영화에서 배우의 역량이 돋보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일반인이 배우의 역할을 했다. 이런 경향에 변화를 몰고 온 게 소위 ‘분홍빛 네오리얼리즘’이다. 연성화된 리얼리즘이고, 다시 배우의 미모와 기량이 요구됐다. 그 첫 스타가 지나 롤로브리지다이다.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스타

롤로브리지다를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시킨 감독은 루이지 잠파이다. 소위 네오리얼리즘의 세 거장, 곧 로셀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시카의 뒤를 이은 감독으로, 리얼리즘의 엄정함과 코미디의 감성 사이를 절충하며 자신의 개성을 발휘한 인물이다. 롤로브리지다는 잠파의 <교회의 종>(1949)에서 매춘부로 나오며 단숨에 주목받았다. 전쟁 중에 매춘부였지만, 그때 번 돈으로 고향에서 새 출발을 하려 했는데, 엉겁결에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천사 같은 후원자가 되는 내용이다. 매춘부로 등장할 때의 빛나는 외모, 그리고 전쟁 고아들의 후원자가 될 때의 순수한 마음이 동시에 표현되는 이중적인 매력으로 전후 이탈리아 영화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폐허에서도 빛나는 미모는 잠파의 다음 작품인 <마음에는 국경이 없다>(1950)에서도 돋보였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에 의해 마을이 단 하나의 선에 졸지에 둘로 나뉘는 정치드라마다. 우리의 38선을 떠올리면 상상이 되는 작품이다. 하루아침에 인위적인 국경선의 동쪽은 유고슬라비아, 서쪽은 이탈리아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롤로브리지다는 사랑 때문에 국경을 넘나드는 모험을 감행한다. 시골 처녀의 순수함과 야만성이 동시에 표현되는 이때의 개성으로 롤로브리지다는 당시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스의 초청을 받는다.

그런데 할리우드의 경험은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하워드 휴스는 롤로브리지다를 배우라기보다는 연인으로 대접했다. 계약을 맺었지만 휴스의 구애가 너무 적극적이라 롤로브리지다는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에 롤로브리지다는 슬로베니아 출신 의사와 이미 결혼한 사이였다. 롤로브리지다에 따르면 휴스는 ‘하늘의 달’도 약속할 정도로 열렬히 구애했다. 어쨌든 이때의 계약 파기 때문에 롤로브리지다는 1959년 <솔로몬와 시바의 여왕>(감독 킹 비더)에 나올 때까지 미국 내에서는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롤로브리지다를 기다리고 있던 감독은 루이지 코멘치니였다.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이 형식은 ‘분홍빛 네오리얼리즘’이 코미디로 더욱 변주된 것이다. 사회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유머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다. 코멘치니와의 첫 작품이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걸작인 <빵, 사랑, 상상>(1953)이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이들의 특성을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 너무나 가난하여 ‘빵’이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그 와중에 사람들은 ‘사랑’에도 열심이다. 먹을 것도 없고, 사랑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상상’을 발동하면 된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넉넉한 낙관주의가 돋보이는 코미디다. 영화에서 어떤 남자는 샌드위치 빵만 달랑 두쪽 들고 있는데, 행인이 빵 안엔 무엇을 넣을 것인지 묻자, 가진 게 없는 그는 씩 미소를 지으며 ‘상상’이라고 답한다.

빵, 사랑 그리고 상상력 모두에서 적극적인 롤로브리지다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매력으로, 또 숨길 수 없는 원시적인 관능미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네오리얼리즘에 이어 ‘이탈리아식 코미디’라는 형식도 세계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후속작 <빵, 사랑, 질투>(감독 루이지 코멘치니, 1950)는 이런 영화 형식과 롤로브리지다의 매력을 다시 확인하게 했다.

뮤지컬 배우 같은 춤과 노래 솜씨

롤로브리지다는 로마 근교에서 가구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사업 덕분에 어릴 때는 아주 부유했는데, 연합군의 공습으로 공장이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됐다. 롤로브리지다는 어릴 때부터 예술에 큰 재능을 보였다. 노래를 잘 불렀고, 춤도 잘 췄으며,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최종적으로는 그림을 선택하여 로마의 미술학교에 진학했다. 학생 때부터 캐리커처를 그리며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재학 중이던 1947년 20살 때 미스 이탈리아에 참가하여 3등에 당선됐다(1등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초기의 뮤즈였던 루치아 보제였다). 이때부터 모델과 영화의 단역을 하며 연예계의 경험을 쌓았다. 처음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갔을 때는 영화사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받았는데, 겨우 1년 만에 기사가 딸린 롤스로이스를 선물 받을 정도로 벼락같은 성공을 거뒀다. 여기엔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것보다는 타고난 재능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뚫고 나왔다고 보는 게 맞다.

대중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노틀담의 꼽추>(감독 장 들라누아, 1957)를 떠올려보자. 집시로 분장한 야성미 넘치는 외모에, 자연스런 연기에, 노틀담 사원 앞 광장에서의 정열적인 춤과 노래가 제일 먼저 기억날 것 같다. 보통은 빼어난 외모에 연기만 되어도 스타로 성장할 수 있다. 롤로브리지다는 여기에 춤과 노래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롤로브리지다는 <노틀담의 꼽추>에서뿐 아니라 자신이 출연하는 다른 영화에서도 가창력을 종종 뽐냈다. 이런 개성은 미국 진출작인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서도 돋보였다. 유명한 시퀀스인 ‘이교도의 춤’에서 솔로몬을 유혹하는 시바 여왕의 춤은 뮤지컬 배우의 수준과 맞먹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영화계가 네오리얼리즘의 무게에 눌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등장한 형식이 ‘분홍빛 네오리얼리즘’과 ‘이탈리아식 코미디’다. 종종 상업성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하는 형식이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던 이탈리아 영화계가 이를 통해 자신들의 매력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흐름을 주도한 스타는 단연 지나 롤로브리지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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