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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반전이 없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감독

<천하장사 마돈나>(2006), <페스티발>(2010)에 이어 이해영 감독은 세 번째 영화에도 소녀들을 데려다놓았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은 고전적인 호러물처럼 시작해 SF로의 기묘한 변신을 거듭하며 예상치 못한 지점까지 내달리는 영화다. 1938년. 엄격한 교장 가토 사나에(엄지원)가 지휘하는 요양학교에 폐병을 앓는 주란(박보영)이 전학을 온다. 우등생 유카(공예지)를 비롯한 소녀들은 얼마 전까지 이 학교에 다니던 시즈코(고원희)와 같은 일본식 이름을 가진 주란을 냉대한다. 주란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해주는 급장 연덕(박소담)과 가깝게 지낸다. 연덕과의 우정도 쌓고, 건강도 되찾아가던 주란은 어느 날부터 기이한 현상들을 목격한다. 전작과 완전히 다른 형식과 이야기를 갖췄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경성학교> 역시 이해영 감독의 일관된 무드 아래 있다는 점이 확연해진다. 이해영 감독으로부터 미처 다 드러나지 않은 영화의 면면들에 대해 들어보았다.

-<경성학교>는 전작들과 확연히 각을 달리한 장르영화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이었나.

=전작 두편은 개인적 취향의 유희가 강했다. 이번엔 출발선부터 달랐다. 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를 다 못 버린 것 같다. <경성학교>도 꽉 짜면 ‘이해영즙’이 나올 것 같더라.

-운동장을 뛰는 소녀의 이미지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류덕환)와 <페스티발>의 자혜(백진희)를 통해 전작 두편에서부터 이어져왔다.

=의식하지 못했다. 이번에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내가 인물의 발을 많이 잡더라는 거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운동을 못하는 아이였다. 전교생이 100명이면 체력장에서 98, 99명은 20점 만점을 받곤 했는데 나는 거기 끼지 못했다. 대체 기골이 장대한 저 아이에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체력장 점수가 이 모양이냐는 것이 학교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 단체로 몸을 쓰는 체육시간이 내겐 항상 악몽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운동장에 아련한 뭐가 있었나보다.

-후반부 설정들과 운동장 장면 때문에 소녀전사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SF 장르물들이 연상된다. 또 소녀들이 포니테일 헤어에 짧은 쇼츠를 착용하고 있는 비주얼도 일본 순정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따뜻한 햇살 아래에 교복이나 체육복이나 아무튼 단체복을 입은, (박)보영이 같은 예쁜 소녀가 양손에 시뻘건 피를 묻히고 벽돌을 쥐고 있는 모습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같은 정서나 전대물을 좋아하긴 하는데 직접 참고한 작품은 없다. 운동장 장면도 막연하게 사방이 녹색의 산인데 네모난 운동장 흙바닥에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소녀들이 꺄르르 웃고 있는 건강한 느낌을 상상하고 만든 거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나 <아키라>(1988) 같은 숱한 재패니메이션, <캐리>(1976) 등 오컬트영화들의 영향도 느껴지긴 한다. 레퍼런스라기보다는 내 안의 ‘덕력’의 응집이랄까. (웃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에선 1930년대에도 쇼츠를 입긴 했다. 클래식한 호박바지 같은 모양이긴 했지만.

-유카 역의 공예지가 씩씩하고 예쁘게 어울리더라.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캐릭터다. <셔틀콕>(2013)에서 보고 예쁘다, 신선하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만나보고 무척 놀랐다. ‘예쁨’이 엄청난 거다. 그 예쁨도 요즘의 예쁨이 아닌 뭔가 초월적이고 범우주적인…. (웃음) 아무튼 근성도 있고 성실했다. 멀리뛰기도 육상선수처럼 연습했고. 예뻐 보이려는 어떠한 계산도 없이 그냥 뛰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시나리오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 많은 고전 호러들이 있다. 여성들의 예민한 관계망을 그린다는 점에서 <행잉록에서의 소풍>(1975)이, 기숙학원의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서스페리아>(1977)가, 가깝게는 <악마의 등뼈>(2001)까지도 연상된다. 초반 구성과 주란이 피를 보는 모습과 각성하는 모습, 여자들끼리 세차게 뺨을 치는 모습 등에선 <캐리>가 오버랩된다.

=거기에 추가하자면 <천상의 피조물>(1994)로 기본 골격을 세워보려 했다. 사실 대입해볼 수 있는 영화는 꽤 많을 거다. 익숙한 상징도 많이 활용했고. 이것 역시도 내 안에 쌓인 덕력의 방출일 거다. 특히 <캐리>는 주기적으로 보는 영화 중 하나다. 초고엔 <캐리>의 초경 설정처럼 소녀들의 월경에 관해서도 얘기가 있었다. 내가 남성감독이라 그런지 직접적인 연상을 관객이 불편해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조금 우회하는 방식을 택했다. 내가 여성감독이었다면 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런 영화들은 이미 클래식이 된 작품들이라 절대로 그렇게 만들면 안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거다. 당연히 촬영할 때 그 영화들처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국영화에서 드물게 소녀들의 퀴어적인 요소를 다룬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의 김태용 감독과 가까운 사이인데 혹시 시나리오 단계에서 주고받은 얘기가 있었는지.

=전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내가 무척 사랑하는 작품이지만 역시 그렇게 만들면 큰일나는 영화다.(웃음) 오히려 많이 떠올렸던 건 <하나와 앨리스>(2004)였다. 여자애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를 어떻게 끌고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 밑도 끝도 없이 연덕이 주란에게 사탕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닭살이긴 한데 주란이 같은 주눅든 소녀에게 도발적으로 확 다가오는 뭐가 있길 바랐다. 그 사탕도 박보영이 입에 물었을 때 가장 예쁘게 보일 만한 크기로 맞춤 제작한 거다.

-더 나아가 주란이 연덕의 이불 속에 들어오는 장면, 입에 사탕을 넣어주거나 같이 물에 빠지거나 신발을 벗고 나란히 누운 소녀들의 모습에선 완연한 섹슈얼리티가 느껴진다.

=의도적이었다. 그런데 연덕이와 시즈코가 누워 있는 장면은 전혀 생각지 못한 느낌으로 나왔다. 쓸 땐 별 생각 없이 썼는데 현장에서 소녀들이 누워 있는 걸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더 직접적인 장면들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화법을 택하기도 했고 다른 방향으로 포커스가 가는 걸 우려하기도 해서 삭제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세상에서 버려지고 갈 곳 없는 소녀에게 친구가 생겼을 때 그 소중함의 정도가 얼마나 크게 드러날 수 있는지였다. 후반부의 강한 동력이 되기 위해서라도.

-연덕을 연기한 박소담에게는 중성적이고, 기계적일 정도로 깔끔한 매력이 있다.

=(박)소담씨는 원래 (지금은 주보비가 연기한) 키히라 역이었다. 키히라에 어울려서라기보다 오디션을 볼 때에 소담씨가 워낙 독보적이어서 어떻게든 내 영화에 출연시켜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연덕에 원래 캐스팅했던 배우가 크랭크인 2주 전에 하차하면서 급하게 소담씨를 연덕 자리에 넣은 거다. 소담씨는 시나리오도 참 깨끗하게 본다. 보고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타입이다. 잠실에 살고 있는데, 생각할 것이 있을 때엔 석촌호수를 그냥 걷는다고 하더라. 또 자기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보통 신인배우는 못하는 것도 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소담씨는 솔직하게 못하겠다 하면서도 어떻게 바꾸면 할 수 있겠다거나 어떤 점을 가르쳐달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점이 좋더라. 그래서 원래는 소녀 중 한명이었던 (주)보비씨를 키히라 역에 넣었다. 발작하는 장면이 두번 있을 거라 했더니 발작 연기를 케이스별로 나눠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주기까지 했다. 워낙 마른 편이라 한번 발작 장면을 연기하고 나면 탈진하곤 했는데 보비씨가 안 했으면 또 누가 이만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박보영은 처음과 끝이 가장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초반 장면에선 어울리고, 후반 설정의 이미지가 상상이 되지 않는 배우가 필요했다. 유약하고 청순하고 어려 보이면서도 그 변화를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가 박보영뿐이었다. ‘감독이 나한테 너무 기대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내가 보영씨에게 많이 의지했다. 보영씨는 복잡한 디렉션을 주고 싶게 만드는 배우다. 가령 지금 넌 슬픈데 울고 싶진 않고 연덕이가 네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그 마음을 바닥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느껴지게 해줘, 라고 말도 안 되는 디렉션을 주면 그게 뭐냐고 하면서도 보영씨는 다 해낸다. 캐릭터 노트도 만든다. 그 캐릭터로 일기를 쓰는데 그건 아무도 안 보여주고 자기만 보는 거라더라.

-엄지원의 ‘철두철미한 매력’도 잘 드러난다. 다만 교장의 집요함이 인정욕구 하나로 설명되기엔 부족하단 느낌이 있었다. 기능적으로 쓰고 말았어도 될 캐릭터인데 배우의 무게감과 감독의 애정이 얹혀서 퇴장할 지점을 최대한 늘려놓았단 인상이다.

=끝까지 숙제였다. 어디까지 추스르고 갈 것인가. <천하장사 마돈나> 때 동구 아버지(김윤석)를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지 고민했을 때와 비슷했다. 편집 때 많은 얘기가 있었는데 어쨌든 이 영화는 주란을 따라가는 이야기고, 주란의 감정으로 영화를 닫는 게 중요했기에 지금 버전으로 결론지었다. 교장에게 뭘 더 주면 병렬구조가 될 것 같아 자제했는데 완전히 배우 덕에 더 풍부해졌다.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큰 재미를 느낀 인물도 교장이었다.

-겉으로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페스티발> 땐 지수(엄지원)의 네일 컬러에 집착했는데 이번엔 헤어였다. 스탭들은 내가 왜 저 머리를 고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우리 영화에서 진정 승리한 볼거리는 교장의 의상인 것 같다. 교장이 마지막에 입은 회색 의상은 외계 SF에 나오는 옷 같기도 하고, 공산당 제복 같기도 하고 여러 인상을 준다. 1930년대 옷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고. 특히 본격적으로 미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할 때 입는 초록색 의상은 내가 골랐다.

-그런 초록색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색이다. 그린 고블린이나 헐크도 떠오르고.

=맞다! 볼 때마다 만족스럽다.

-일본군 장교 켄지는 이 영화의 유일한 남자다.

=<1999, 면회>(2012)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심)희섭씨가 거기서 허여멀겋고 별 성격이 없는 인물인데도 존재감이 상당하더라. 또 보면 희섭씨가 그렇게 싹싹하지도 않고 좀 이상하다. 감독이랑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그냥 슥 보고 딴짓하고. 그 묘한 느낌이 참 좋았다. 은근히 허당기도 있다. (엄)지원씨랑 붙는 장면이 많은데 지원씨가 대선배이기도 하고, 캐릭터도 그렇지만 워낙 사람 자체의 기도 세서 희섭씨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현장에선 모든 스탭이 희섭씨 기 안 죽이려고 노력했다. 나도 희섭씨에게 항상 켄지는 1930년대 남자고, 일본인이고, 여긴 켄지의 식민지라고 말하면서 기운을 불어넣어줬다. (웃음)

-일본어 대사를 저 정도의 양으로 꼭 넣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지원씨도 희섭씨도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 지원씨가 일본어 대사를 하는 느낌이 좋았다. 워낙 외국어 센스가 좋아서 금방 익히더라. 켄지 역에 오다기리 조 같은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제작사인 청년필름의) 심현우 대표가 턱도 없는 소리 말라 해서. (웃음) 어쨌든 이 친구라면 그냥 잘할 것 같아서 네이티브 수준의 일본어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뒀다. 한달 반 뒤에 리딩을 했는데 희한하게도 그걸 해왔더라. 배우는 역시 대단해.

-1930년대여서 가능한 이야기이면서도 시대성을 탈피한 느낌이 강하다.

=시대성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대사 때문인 것 같다. 그 시대 특유의 어투가 있는데 관객이 인물을 대상화해서 보게 될까봐 그걸 쓰기가 싫었다. 그런 말투로 연기를 잘 시킬 자신도 없었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봐도 자기네가 쓰는 말이랑 비슷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했다. 미술은 그 시대 그대로를 살리면 빈해 보이는 게 있어서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의 예상과 달리 별 반전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전이 없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스포일러랄 것도 사실 없다. 다만 뒤에서 이야기가 단번에 풀린다는 느낌은 주길 바랐다.

-다음 영화는 2019년에 나오나.

=나한테 왜 그러나.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 끝나고 <26년> 시나리오를 2년 썼으니 사실상 <페스티발>도 2년 만에 만든 거다. 이전엔 너무 조심스러워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것 같다. 앞으로는 더 지르면서 할 거니까 시기도 단축될 거다. 오래 영화해야 되니까 건강관리를 위해 담배도 끊었다. 장래희망이 생겼거든. 조지 밀러. (웃음) 나도 그렇게 미친 영감탱이로 늙을 수 있을까. 뭐가 될지 몰라도 다음 작품은 금방 보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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