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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하는 재미`, 반전의 매혹 설·왕·설·래 (1)
2002-03-15

“나의 죽음을… 관객들에게 알리지 말라”

등장인물 소개

① 아이디 ② 좋아하는 스릴러 ③ 왜 반전인가 ④ 학교 때 전공 ⑤ 인생관 ⑥ 취미 ⑦ 모임 출사표

① 껨Boy ② 오션스 일레븐 ③ 현실엔 반전이 없잖아? ④ 역사학 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극장에서 배웠다. ⑥ 컴퓨터 게임 ⑦ 나는 뭐 모임이 좋아서 개근하는 줄 알아? 빈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런 거지.

① 겨뤄보者 ② 유주얼 서스펙트 ③ 내 머리가 감독보다 낫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④ 수학 ⑤ 뒤통수 맞기 전에 내가 먼저 친다. ⑥ 퀴즈 응모하기 ⑦ 반전을 싫어한다면서 안티郞은 반사모 모임에 왜 나오는지 몰라.

① 슬퍼Man ② 식스 센스 ③ 반전에 짙게 배인 슬픔에 사로잡히다 ④ 국문학 ⑤ 나의 삶은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 ⑥ 덕수궁 돌담길 걷기 ⑦ 그녀 떠난 뒤 괴로운 이 마음… 모임에 나갈까 말까.

① 무섭君 ② 프라이멀 피어 ③ 배우의 연기력이 가장 잘 드러난다 ④ 연극영화학 ⑤ Trust No One ⑥ 진실 게임 ⑦ 나 없는 데서 욕할까봐 모임중엔 화장실에 가지 않으련다.

① 안티郞 ②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③ 바보들이나 속는 재미로 반전을 좋아하지 ④ 철학 ⑤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⑥ 딴지걸기⑦ 오늘 모임에 겨뤄보者가 또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인터넷 어딘가에 ‘반사모’(반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작은 모임이 있다고 치자. 그 모임 골수 회원들이 어느 비오는 토요일 오후에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고 해보자. 그간 단서 하나 놓칠까봐 매번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혹사시켜가며 영화를 보던 그들은 이번엔 ‘그냥 편안히 볼 수 있는 휴먼드라마’를 관람하자는 안티郞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뷰티풀 마인드’를 골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 수학자 존 내쉬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렸다던 이 드라마를 보니 꽤 묵직한 반전이 영화의 절정에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극장을 채 나서기도 전에 그들은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1.저녁 8시30분, 거리에서-반전의 전성시대

안티郞: 뭐야, 또 반전이네. 스릴러까지는 좋다 이거야. 휴먼드라마가 이래도 되는 거야? 정신분열증에 걸린 내쉬의 환각을 꼭 그렇게 관객까지 속여가며 사실인 듯 묘사하다가 나중에 깜짝쇼를 해야하는 거야?

겨뤄보者: 투덜이가 극장을 나서자마자 또 투덜대네. 난 신선하기만 하더라. 적절한 반전을 넣으니까 평면적인 전기영화의 리듬에 탄력이 생겼잖아.

슬퍼Man: 너희 둘은 또 만나자마자 치고받냐. 근데, 요즘엔 드라마에도 반전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 같아. 얼마전 <애수>에서도 그랬잖아. 전쟁중 폭격이 있은 뒤 애정이 식은 것처럼 보였던 줄리언 무어가 알고보니 절절한 기도로 신에게 자학적인 약속까지 해가면서 랠프 파인즈를 살려내려고 했던 거였잖아. 그 폭격장면이 두 차례 반복되면서 줄리언 무어의 복잡한 표정이 정말 무엇을 뜻했는지 나중에 확실하게 반전으로 보여주지. <러브 레터> 마지막 장면도 비슷해.

무섭君: 요샌 충무로에서도 멜러에 반전 넣는 게 유행인 것 같아. 둘의 사랑이 사실은 오래전 어린시절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후주처럼 붙인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줬던 <와니와 준하>의 반전은 이를테면 <러브 레터>식 반전이겠지. <불후의 명작>에서 송윤아가 좋아한 사람이 박중훈이 아니라 그 선배였다는 것도 영화 속 만취한 술자리 장면 전까진 대부분의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한 반전이었을 거야. <내 마음의 풍금> 에필로그도 귀엽게 반전의 구실을 했고 말야. 그래도 요 근래 드라마에 반전을 가장 잘 활용한 한국영화는 아무래도 <번지 점프를 하다>가 아닐까.

껨Boy: 이젠 관객들도 한 영화 안에서 점점 더 다양한 맛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아. 웬만큼 히트한 영화들은 다 잡종 장르잖아. 스토리든 화법이든 연기든, 한 작품에서 여러 번 뒤채기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요즘 관객들에게 반전만큼 좋은 게 어딨겠어?

#2.저녁 9시, 종로3가 김밥집-왜 하필 반전인가

안티郞: 한번 정색하고 물어보자. 겨뤄보者, 넌 왜 반전을 좋아하는 거야?

겨뤄보者: 내내 팽팽하게 느껴지는 긴장감이 일거에 폭발하는 쾌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냐. 반전은 절벽이 아니라 다이빙보드 같은 거라고. 반전을 미리 짐작할 수 있든 아니든 다이빙보드의 반동으로 튀어올랐다가 물에 뛰어드는 순간의 짜릿함이 그 핵심이거든. 게다가 영화 만든 사람과 두뇌로 겨뤄보는 재미도 있잖아.

무섭君: 글쎄, 난 오히려 반대야. 난 가급적 반전의 내용을 예측하지 않은 채 초조하게 화면을 응시하지. 손을 말아쥔 채 반전을 기다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내 자신이 꼭 마조히스트가 된 것 같아. 스릴러를 보며 내가 바라는 건 이 영화가 내 뒤통수를 정말 세게 때려줬으면, 하는 거야. 내가 <프라이멀 피어>를 좋아하는 건 뒤통수를 맞아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조차 모른 채 넋 놓고 있을 때 순수했던 에드워드 노튼의 얼굴이 일순 악마처럼 변하면서 냅다 내 뒤통수를 갈겨줬기 때문이지. 결국 스릴러는 배반당하는 재미로 보는 장르가 아닐까.

슬퍼Man: 어쩌면 내가 더할지도 몰라. 최근 사귀던 여자랑 헤어진 뒤로 난 영화를 보며 심지어 자꾸 처벌받고 싶은 심정이니까. 반전을 이뤄내기 위해 필수적으로 쌓아올려야 할 서스펜스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상태 아니겠어? 한편으론 너무 두려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밧줄이 끊어져 저 밑으로 떨어지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그때 반전은 그 썩은 밧줄을 끊어주는 칼 같은 거라고나 할까.

겨뤄보者: 거 참 이상하네. 나 같으면 끊어지기 전에 그 밧줄 타고 올라가고 싶을 텐데.

슬퍼Man: 올라가면 뭐 해? 거기엔 거대한 권태가 컴컴한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느니 차라리 까마득하게 떨어지고 싶은 거야. 타나토스(죽음에의 욕망)적인 욕망이라고 할까. 난 그런 면에서 반전이 서스펜스라는 카오스를 일거에 명쾌한 코스모스로 바꿔주길 바라지 않아. 반전엔 슬픈 감정이 있는 거야. 내가 <식스 센스>를 좋아하는 건 그 반전에 존재의 우울 같은 게 타르처럼 끈적이며 미끈덩 흘러내리기 때문이야. <식스 센스> 반전이 말하는 건 우리가 죽은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지. 그 점에선 <디 아더스>도 같은 발언을 하는 거겠지. <소름>의 참혹한 반전도 비슷한 느낌이었어. 영화의 반전 속엔 삶의 폭력적 속성에 대해 늘 뒤늦게 깨달은 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인식의 비극성에 대한 고백 같은 게 담겨있는지도 몰라. 종국엔 어떻게 되는지 아무리 궁금해 해도 파국에 이르러서야 그 결말을 깨닫고 마는 게 삶이니까.

껨Boy: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얘기인데, 내가 반전을 좋아하는 건 철저하게 ‘현실의 반대말’이기 때문이야. 현실에선 오해가 생겨도 풀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고, 단 한번 폼나는 반전도 없이 흐지부지 망가지는 일은 또 얼마나 많냐고. 푸석푸석한 일상이 끝없이 이어지는 권태의 굴레에서 헤매다보면 아, 누구라도 극장에 달려가 멋진 한방으로 모든 걸 만회하고 정리하게 해주는 ‘잘 짜여진 반전’을 보고싶지 않겠어? 어쩌면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나아가 고시에 매달리거나 성형수술을 염두에 두는 것도 ‘생의 반전’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보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카프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현실의 삶은 답을 주지 않는다, 사건은 일어나고나면 그만이다, 설명은 없다, 어느날 그레고리 잠자가 일어나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었다….

슬퍼Man: 그런데 그렇게 치자면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껨Boy: 반전을 역사로 비유하자면 혁명 같은 것이겠지. 그러나 가장 성공적이었던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조차 현실에선 결국 역풍에 휘말려 실패로 끝나잖아? 하지만 영화 속에서의 반전은 그대로 내러티브상의 돌출된 혁명을 이루면서 그때까지의 모든 모순과 불안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동시에 그 자체로 화석이 되어 올곧이 남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 영화를 보며 반전에 끌리지 않을 수 있겠냐?

무섭君: 사실 대부분의 반전은 인간이 악마나 동물이라고 고백하고 있어. 난 스릴러가 성악설에 기초한 장르라고 생각해. <나이트 플라이어>같은 영화를 보면 악마를 찾아다니던 자가 지옥같은 참극을 겪어낸 뒤 결국 자신이 진짜 악마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잖아. 스릴러가 한껏 위악적 화술로 포장되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지도 몰라. 반전은 결국 악의 편재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고. 스릴러에서 범인을 추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건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범인으로 의심받을 수 있을 만큼의 사악한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겨뤄보者: 김밥에 우동 먹으며 하기엔 다들 너무 꿀꿀한 이야기만 하는 거 아냐? 내가 스포츠에서보다 영화에서의 반전을 더 좋아하는 건 ‘의도’ 때문이야. 9회말 역전 만루홈런 같은 스포츠의 반전은 사실 그 순간에 그렇게 반전이 빚어지도록 치밀하게 쌓아올리는 의도성이 없다는 점에서 우연 같은 거잖아? 하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의도된 거지. 의도된 극점은 그게 두뇌속이든 마음속이든, 삶에 대한 반면교사든 대리만족이든, 결국 모방을 통해 재생하거나 변형된 형태로 반복할 수 있는 거야. 의도된 노력의 산물이야말로 진짜 짜릿하고 여운도 길지. 옆집 아저씨가 복권 당첨된 게 부럽긴 하겠지만, 자극의 측면에선 그 사람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더 효과가 크지 않을까?

안티郞: 어쩌면 너랑 나랑은 생각이 이렇게 철저하게 다를 수 있을까 몰라. 고시공부하러 나서지 않을 바에야 나 같으면 차라리 복권을 사겠다. 반전에 매력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갈수록 반전이 마치 스릴러의 성패를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처럼 받아들여지는 건 이해할 수 없어. 난 사실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보면 중간에 주인공을 죽이고 막판 반전 한방으로 모든 얘기를 끝내버리는 <사이코>보다는, 정교하게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서스펜스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가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해. 스릴러를 보며 너무 반전만 의식하면 놓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지난 모임 때 <디 아더스> 보고나서 네가 “딱 다섯 시퀀스 보니까 반전을 알겠더라”고 심드렁해 했지? 야, 사실 <디 아더스>에서의 반전 따윈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 반전 맞춰 희희낙락하느라고 네가 그 영화의 한없이 우아한 스타일이나 진득하게 밴 쓸쓸한 정서, 니콜 키드먼의 열연 같은 것에 눈길이나 줬냐고. 난 결말을 다 듣고 갔는데도 ‘디 아더스’ 재미만 있더라. 이런 말이 있지. 미스터리는 실제론 두개인 이야기가 하나로 된 것이다, 하나는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반전은 스릴러에서 결국 일어났던 일만 남기고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다 죽이고 마는 것 같아. 스릴러라는 장르 특유의 신비한 기운을 걷어낸다고나 할까.▶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