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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애니메이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이예지 사진 오계옥 2015-09-17

<창백한 얼굴들> 허범욱 감독, <화산고래> 박혜미 감독

허범욱, 박혜미 감독(왼쪽부터)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 기획전에 2년 만에 애니메이션 작품이 등장했다. 9월10일부터 30일까지 CGV압구정 등지에서 진행되는 ‘KAFA FILMS 2015: 나쁜 영화들’에서 상영될 두 작품은 허범욱 감독의 <창백한 얼굴들>과 박혜미 감독의 <화산고래>다. <창백한 얼굴들>은 흑백의 행성에 색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의 이야기를 개성 있는 아트워크로 연출했고, <화산고래>는 2070년 붕괴된 부산을 배경으로 화산고래를 잡으려는 소녀의 모험을 장르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자는 제19회 홀란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후자는 제48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며 만만치 않은 신예의 탄생을 알렸다. 이번 기획전에서 상영되는 영화 <소셜포비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선지자의 밤>이 7기 작품인 데 비해 두 애니메이션은 5기, 6기 작품들로 더 오랜 시간 작업한 셈이다. 긴 제작과정만큼 공을 들인 두 애니메이션들을 만든 감독들을 만났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작품 기획전에서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것은 2년 만이다. 긴 과정을 거쳐 관객을 만나는 소감이 어떤가.

=허범욱_2년10개월 걸려 완성했다. 원래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이 실사영화보다 오래 걸리기도 하고, 중간에 PD가 바뀌면서 제작이 중지되기도 했다. 스탭들이 대부분 대학생이었기에 다 떠나고 새로운 PD가 올 때까지 남은 단 한 명의 배경감독과 작업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작품이니만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소수 관객뿐 아니라 다양한 관객층이 봐줬으면 좋겠다.

박혜미_인건비 차원에서도 퀄리티 차원에서도, 외주 제작업체에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 오래 걸렸다. 처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때는 아쉬운 부분들이 계속 눈에 들어와 싱숭생숭했는데, 이렇게 개봉을 앞두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영화의 장단점을 평가받게 될 텐데 단점은 인정하고 장점은 더 잘해야지 싶다.

-<창백한 얼굴들>은 주제의식이, <화산고래>는 장르적 접근이 인상적이었다.

=허범욱_“너와 나는 왜 다른가, 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영화다. 개인적 경험을 밑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편견을 갖는 사람들이 많더라. “돈 안 되는 걸 왜 하냐”는 시선부터, 영화인 중에도 애니메이션을 한수 아래의 장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은 그를 비롯한 모든 차별에 대한 투쟁이다.

박혜미_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SF 장르물에 관심이 많았다. 애니메이션만이 할 수 있는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매력을 느끼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에 흥미를 느낀다. <화산고래>는 디스토피아가 된 부산을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어드벤처물이다. 게임처럼 한 스테이지씩 전개되고, 주인공은 조금씩 성장한다.

<창백한 얼굴들>

-원래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나.

=허범욱_10대 땐 소설가가 꿈이었고 글도 많이 썼다. 스무살 때 대학에 못 가고 방황했는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단편 예술애니메이션들을 보고 단박에 매료됐다. 글, 그림, 음악 등 좋아하는 모든 것의 종합예술이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 후 미대 입시를 준비했으나 실패하고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애니메이션을 배운 후, 한국영화아카데미로 왔다. 다른 곳은 점수가 우선이었지만 여기는 포트폴리오가 우선이라 가능했다.

박혜미_어릴 적부터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곤 사토시 감독을 좋아했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온 유어 마크>를 보고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졌다. 지방대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지만 배울 게 없어 자퇴하고, 혼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다.

-<창백한 얼굴들>은 독특한 아트워크로 컷아웃, 페인팅 온 글라스, 만화, 실사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한편, <화산고래>는 대중적인 그림체에 전통적인 2D셀 애니메이션이다.

=허범욱_단편 예술애니메이션이 나의 바탕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우선 만화를 통해 전체 이야기의 맥락을 보여줬다. 액팅을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는 컷아웃 기법은 만화에서 총쏘기를 배우는 장면에서 썼다. 클라이맥스를 실사로 표현한 것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해서였다. 유리판 위에 색깔을 넣어 촬영하는 페인팅 온 글라스는 슬픈 정서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기법이다. 클라이맥스 이후 엔딩의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다.

박혜미_관객을 서사에 몰입시키기 위해 대중적인 그림체를 택했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특수효과 표현과 액션 연출이다. 화산과 마그마, 바다가 나오는 신이 많다보니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야 했고, 3D와 섞어 작업했다. 액션은 잘 표현하기 위해 많은 레퍼런스를 찾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나루토> 등의 원화를 참고했다. 보통 재패니메이션이 그렇듯 1초에 8장을 그렸는데, 고래가 나오는 장면은 동화 장수를 늘려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려 애썼다.

<화산고래>

-장편애니메이션 특성상 1억5천만원의 예산으로 작업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파이프라인(생산공정)을 어떻게 꾸렸나.

=허범욱_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고용한 PD와 함께 꾸렸다. 동화의 경우, PD가 추천한 외주업체에 주고, 키 스탭들은 학교 선후배나 지인,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을 컨택했다. 사실 외주는 최저 단가로 진행하게 되어 퀄리티가 높지 않다. 인건비도 아낄 겸 퀄리티 관리도 할 겸 결국 내부에서 다 소화했다.

박혜미_안 그래도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서 <화산고래> 이야기가 올라와 장편을 1억5천만원으로 찍는 게 가능하냐고 토론하더라. (웃음) 빠듯하게 해냈다. 고래 신과 액션 신 등 힘을 줘야 할 부분은 전부 직접 그렸고.

-당시 영화아카데미에 교수로 있던 오승욱 감독이 시나리오 멘토링을 해줬던데.

=허범욱_영화감독이라 애니메이션을 모르실까 걱정했다. 그런데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시고, 나와 취향도 비슷하더라. 서로 작품들을 추천하고 추천받았다. (웃음) 애니메이션 역시 영화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박혜미_첫 시나리오 수업에 시놉시스를 한 페이지 써서 내라고 하셨다. 그때 고래상어를 소재로 써냈는데 혹평받았다. 그런데 그걸로 장편 시나리오 한편을 꼭 써내야만 한다는 거다! 나중엔 감독님이 이 소재가 꼭 애니메이션이 되는 게 보고 싶다며 세뇌에 가까운 격려를 해주셨다. (웃음) <화산고래>가 탄생한 데는 감독님의 공이 크다.

-척박한 한국 애니메이션 현실을 어떻게 돌파할 건가.

=박혜미_지금은 단지 좋아하는 걸 하겠다는 생각으로 갈 거다. 앞으로도 장르물에 집중할 생각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단편 제작지원 받은 게 있다. 올해 안에 시작해서 내년 상반기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잉투기>를 만든 엄태화 감독의 차기작 스토리보드 작업도 겸하고 있다.

허범욱_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도 오랜 시간 단편 작업을 해왔음에도 힘들게 첫 장편을 만들었다. 나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안에서 첫 장편을 했고, 이제는 필드로 나가 그들처럼 해내야겠지. 하지만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어차피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하기 위해선 정부기관 등에서 제작지원을 받는 수밖에 없다. 시나리오 쓰면서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하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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