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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클라크] 그곳에 영화가 있으므로
안현진(LA 통신원) 2015-09-22

<에베레스트> 제이슨 클라크

<에베레스트>

영화 <차일드 44>(2015) <에베레스트>(2015)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화이트 하우스 다운>(2013) <위대한 개츠비>(2013)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2012) <제로 다크 서티>(2012) <시카고 코드>(2011) <텍사스 킬링 필드>(2011)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2010) <휴먼 컨트랙트>(2008) <데스 레이스>(2008) <베터 댄 섹스>(2000) <프레이즈>(1998)

할리우드는 전세계 배우들의 집합소다. 각국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온 배우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배우 수출국은 호주다. 언어에서의 편리함과 신선한 마스크 등 호주 출신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관객 입장에선 우선 반갑다. 특히 러셀 크로, 휴 잭맨, 에릭 바나로 이어진 호주 남자배우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훈훈한 외모와 탄탄한 체형으로(그리고 종종 얼굴보다 멋진 성격으로) 대표되어온 호주 출신의 남자배우들은, 동향의 후배들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높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이른바 잘나가는 할리우드의 호주 출신 배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지언정 훈훈한 외모로는 계보를 잇지 못한, 제이슨 클라크가 그 주인공이다. 훤한 이마와 각진 턱, 다부지고 건장한 체형이 호주 출신의 미남 배우들과는 약간 다르지만, 어쨌든 그도 이제 이 리스트에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등 최근 굵직한 블록버스터에서 주연급으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제이슨 클라크는 2002년 호주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온갖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도 어디인지 모르는” 호주 퀸즐랜드의 윈턴에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대에 갔는데 2년을 허송세월로 보냈고, 절친한 친구 따라 드라마 스쿨에 진학하고 나서야 배우가 될 결심을 했다. 그리고 8년 동안 호주의 TV스타로 한창 잘나가던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에 왔다. “집을 살 수도 있었다. 그냥 무작정 떠나왔다. 일이 잘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다. 정말이다.”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 낙천주의로 무장한 제이슨 클라크의 아메리칸드림은 천만다행으로 외면당하지 않았다. 뉴욕에 발을 디딘 지 1년 만에 케이블 채널 <쇼타임>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TV시리즈 <브러더후드>에서 로드아일랜드 출신의 새내기 정치가이지만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생의 뒤를 봐줘야 하는 야망가 토미 카피는 그렇게 제이슨 클라크의 얼굴을 세간에 알리는 기회가 됐다. 2008년까지 2년간 <브러더후드>의 토미 카피로 산 뒤, 그의 필모그래피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앞으로 나아간다. 2009년에는 조니 뎁과 <퍼블릭 에너미>에 출연했고, 그 뒤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 <텍사스 킬링 필드>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 <제로 다크 서티> <화이트 하우스 다운>을 거쳐 마침내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로 그의 얼굴과 더불어 제이슨 클라크라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할리우드에서 그를 알아보는 눈이 많아지고, 역할의 비중이 점점 커졌음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인상적인 단역에서 주연을 압도하는 조연, 그리고 주연으로 한발 한발 입지를 넓혀간 그가 제이크 질렌홀, 조시 브롤린, 샘 워딩턴 등과 출연한 신작 <에베레스트>가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도 할리우드에서의 그의 항해가 아직 순항 중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이는 제이슨 클라크가 출연한 일련의 영화들을 보며 “영화 고르는 취향이 없다”고 비꼬기도 하고, 누군가는 “블록버스터만 좇는다”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정작 그에게 영화는 탐험해야 할 세계이고, 맡겨지는 캐릭터는 도전해야 할 과제일 뿐이다. “인생은 두번 돌아오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 세상은 넓고, 나는 할 일을 찾아나선다.” 제법 모험가처럼 들리는 이 대답 뒤로 숨길 수 없는 소탈하고 솔직한 고백이 이어진다. “솔직히 거대한 이야기, 눈에 띄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웃음)”

스크립트와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을 즐긴다고 말하는 클라크는 고루하다 싶을 정도로 클래식한 메소드 연기자다.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에 출연할 당시 그는 버지니아주 토박이들만 낼 수 있다는 “R” 발음을 소리내기 위해 버지니아주 지방 라디오 채널을 들으며 다녔고, 그의 아이팟 플레이리스트는 버지니아의 뒷골목에서 담아낸 생생한 현지인들의 대화가 음악을 대신해 채워져 있었다.

“스크립트를 공부하고, 캐릭터를 연구한 뒤, 감독의 연출을 참고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부분은 언어다. 그는 언어야말로 캐릭터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혀는 그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근육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 고된 웨이트트레이닝을 반복하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하루 3시간 이상 혀의 트레이닝에 투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훈련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마다 자연스러운 지방색으로 관객과 시청자를 놀라게 한 그의 지론이다.

출연한 TV시리즈에서 유럽계 미국 이민자의 역할을 빈번하게 연기한 것은, 선 굵은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그가 치열하게 연습해 이뤄낸 억양 덕분인지도 모른다. 클라크와 함께 <브라더후드>에 출연한 배우 제시카 비엘의 증언은 그가 연기에 쏟는 열정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그토록 역할에 몰입하는 배우는, 더스틴 호프먼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연구하고 연습하는 것은 그가 가진 신념이며 제이슨 클라크라는 배우를 오늘에 이르게 한 과정이다. 캐릭터에 대한 그의 정직한 접근은 <에베레스트>에서도 여전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젊은 등반인 롭 홀을 연기하기 위해 클라크는 19년 전 미망인이 된 젠 홀(키라 나이틀리)을 만나러 뉴질랜드로 찾아갔고, 돌아온 뒤에는 롭이 등반 중에 그러했던 것처럼, 젠과 여러 차례 통화하면서 그녀가 롭을 연기하게 될 자신을 이해하길 바랐다. 눈보라치는 날씨에 스코틀랜드의 벤네비스 산에 굳이 올랐다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온 것도 역할 안에 깊숙이 들어가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마치 19년 전 롭이 내놓았을 법한 답이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위험 없이는 성취도, 변화도, 성장도 있을 수 없다.”

1923년, 등반가 조지 말로리는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냐”는 <뉴욕 타임스> 기자의 질문에 “거기에 산이 있어서”(Because it’s there)라는, 이제는 불멸이 된 세 마디의 대답을 내놓았다. 등반가 조지 말로리에게 등반의 대상이 거기에 있는 산이었다면, 배우 제이슨 클라크가 올라야 하는 등반의 대상은 앞으로 그가 찾아나서는 캐릭터들일지 모른다. 제법 등반가처럼 들리는 이 대답 뒤에도 제이슨 클라크 특유의 걸쭉한 입담이 따라붙었다. “졸라(fucking) 추워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가 오를 또 다른 영화, 그가 정복할 또 다른 캐릭터가 기다려지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리더의 목소리

제이슨 클라크가 출연한 영화에는 유독 다수를 상대로 말하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시작할 때는 연설이 아니었지만 끝날 때는 듣는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곤 한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말콤은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들에게 평화를 청하는 사절로 보내졌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존 코너는 저항군의 리더로 전쟁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에베레스트>에서 그가 연기한 롭 홀에게서도 클라크의 목소리는 예외 없이 힘을 발휘한다. “에베레스트는 의심할 것 없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해발 747피트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죽어간다.” 살날이 더 많았을 젊은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로 나가겠다고 말한다. 가혹한 자연이 덮쳐와 두려움에 비명을 내뱉을 때보다, 다시 볼 수 없는 아내와의 마지막 전화통화보다, 이 장면은 왜 그런지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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