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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그의 음악 인생, 그 낭만에 대하여
정지혜 사진 오계옥 2015-09-28

가수 최백호

아현동의 6차선 마포대로를 지난다면 유심히 한번 살펴보자. 양쪽 인도에 통유리로 된 문이 나 있고 ‘뮤지스땅스’(Musistance)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지하도의 초입인가 싶지만 계단을 따라 내려가보면 깔끔하고 너른 음악 연습실과 녹음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가수 최백호를 만날 수 있다. 독립 음악인들의 창작을 지원할 계획으로 문을 연 뮤지스땅스의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희끗거리는 머리칼을 한 6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도 청바지에 가벼운 스니커즈 차림으로 나타나 격의 없이 손님을 맞는다. 그런 그가 내년이면 가수로 데뷔한 지 40년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온 그간의 앨범들 속 노래들을 추려내 기념 앨범을 준비 중이다. 물론 8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SBS 라디오 러브FM <최백호의 낭만시대>의 인기도 여전하다. 그를 만나 그의 음악 인생, 그 낭만에 대하여 들어봤다.

-도심 한복판 지하에 이렇게 크고 깔끔한 음악 창작 공간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올해 대한민국 국토도시디자인대전에서 ‘아름다운 공공 건축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너무 지저분하고 환기도 안 됐는데 나와 스탭들이 인테리어 자재 하나하나까지 고심해가며 만든 공간이다. 지난해 말 오픈했고 올해 2월부터 정식 운영 중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주체인 한국음악발전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싱어송라이터협회에서 기부단체인 비영리 사단법인인 한국음악발전소를 만들어 생활 여건이 어려운 음악인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원로 음악인 중에 연주력이나 가창력이 아직 충분히 좋은데도 무대에 설 기회가 없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2500석 규모의 올림픽공원 무대에서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선생님의 콘서트를 연 것도 그중 하나다. 다들 무모하다고 했는데 자신 있었다. 다행히 2천여석이 다 팔리며 성공했다. 또 원로 음악인 중 최극빈층에 해당하는 열분에게 1년에 4번씩 지원금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2011년부터 2년간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연락이 오더라. 마포구와 함께 음악창작소라는 프로젝트를 맡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시작됐다.

-뮤지스땅스는 뮤직(music)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대항해 싸운 프랑스 지하 독립군 레지스탕스(resistance)의 합성어라고 들었다.

=내가 직접 지었다. 처음에는 다들 반대했다.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간인데 이름이 너무 저항적인 것 아니냐고. 이곳이 저항적이고 독립적인, 레이블이나 소속사에 속해 있지 않은 뮤지션들이 와서 편히 이용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저렴한 가격으로 연습실, 녹음실 등을 대관해주고 있다. 뮤지션들의 창작 기회를 제공하는 ‘무소속 프로젝트’도 운영 중이다. 멘토링을 받고 단독 공연까지 지원받을 10팀을 뽑는 데 362팀이나 지원했다. 여기서 음악적으로 역량 있는 젊은 뮤지션들을 많이 만나보고 있다.

-바쁘게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내년이면 가수로 데뷔한 지 40년이 된다. 40주년 기념 앨범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두장을 묶어서 내려고 한다. 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부른 곡들을 오리지널 편곡에 가깝게 재녹음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피처링에 참여했거나 내가 곡을 줬던 뮤지션들, 아이유, 알리, 린, 혜은이, 윤시내 등과 각각 작업을 해 싣고 싶다. 그들이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돌이켜보면 인생에서는 좋은 날보다 힘든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도 가수로서는 운이 참 좋았고 ‘이빠이’ 했다. (웃음) 내가 가지고 태어난 그릇 그 이상의 것을 충분히 다 가져본 것 같다. 1977년에 발표한 첫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꽤 알려졌다. 그 뒤로 한두장의 앨범을 더 냈고 이후 15여년간 슬럼프였다. 뒤늦게 <낭만에 대하여>가 알려졌고. 그 노래가 세상에 나온 지도 20년 가까이 됐는데 새삼 그 곡의 힘이 대단하구나 싶다.

-가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직접 작사•작곡을 한 <낭만에 대하여>는 어떻게 만든 곡인가.

=우연히. (웃음) 1991, 1992년에 미국에 있다가 다시 한국에 왔을 때 돈을 벌기 위해 밤무대에 나가 노래를 했다. 그러다보니 낮에는 집 앞 감나무 밑에서 기타를 치곤 했는데 하루는 저 멀리 집 안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가 보이더라. 그때 불현듯 그 옛날 내가 좋아했던 소녀도 어디에선가 설거지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더라. 그게 첫 가사,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가 됐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라고 쓰고 ‘낭만에 대하여’를 마지막에 붙였다. 최근에 <낭만에 대하여>를 만들 당시의 노트를 찾아봤더니 지금의 가사와는 많이 다르더라. 그게 그렇게 히트를 칠 줄이야.

-<낭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최백호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당시 크게 유행하게 됐던 어떤 계기나 조짐이 있었나.

=곡은 만들었는데 정작 녹음할 돈이 없어 묵혀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조용필씨의 매니저가 녹음을 해보자고 제안을 해왔다. 녹음하고 1년 반 정도 지났는데도 곡에 대한 반응이 없더라. 한달에 20장 정도 팔렸나. 그러던 어느 날 TV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에서 장용씨가 이 곡을 부르는 거다. 알고보니 그 드라마를 집필한 김수현 작가님이 우연히 라디오를 틀었는데 노래 중 ‘첫사랑 그 소녀는’ 이라는 부분이 나왔고 그게 좋아서 그날 바로 대본에 노래 부르는 장면을 넣으셨던 거다. 그 후로 주문이 하루에도 수천장씩 들어왔다. 음반사 직원이 “선생님, 이상해요. 주문이 갑자기 몇 천장씩 들어와요”라고 해서 “뭐가 이상해, 그게 정상이지. (웃음)”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낭만에 대하여> <첫사랑> 등 유독 첫사랑, 지나간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가사 곳곳에 담겨 있다.

=첫사랑이었던 사람과 대화를 한번도 나눠본 적이 없다. 중학교 입학식 날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데 내 옆 자리에 앉은 여자아이에게 첫눈에 홀딱 반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공부를 안 했다. 오직 아침에 일어나 기차 타면 그 아이 옆으로 가서 앉고 하굣길에 기차 타면 그 아이 옆에 앉고. 매일 밤 편지를 썼다. 첫사랑 덕분에 그나마 지금 이렇게 가사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첫사랑 그 아이,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젊은 후배 뮤지션들과의 작업이 눈에 띈다. 특히 기타리스트 박주원씨와는 곡 작업, 피처링 등으로 서로의 앨범에 지속적으로 참여 중이다.

=어제도 박주원씨 공연에 잠깐 올랐다. 내가 DJ로 있는 <최백호의 낭만시대>에 그를 초대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대단한 기타리스트다. 그의 연주를 들은 이후로 내가 기타를 안 친다. (웃음) 그렇게 인연이 돼 그의 앨범에 수록된 <방랑자>에 피처링을 했다. 피처링이라는 걸 그때 처음 해봤다. 박자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녹음실에 들어가 4시간 반 동안 녹음을 하는데 물 한 모금 마시러 나온 것 외에는 나올 수가 없더라. 잘 안 되니까 창피하더라.

-박주원씨가 준비하는 영화음악 앨범에서 <대부>의 수록곡 <Speak Softly Love>를 부른다.

=좋아하는 곡이긴 한데 원어로 부르라고 해서 처음에는 안 하겠다고 했다. 연습할수록 정말 어렵더라. 딸아이에게 발음 코치를 받아가며 연습 중이다. 이러다 앨범에 못 넣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유, 알리, 린 등 여성 보컬리스트들뿐 아니라 《다시 길 위에서》의 경우는 말로, 전제덕 등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했다.

=박주원씨 곡인 아이유양의 노래 <아이야 나랑 걷자>에 피처링을 했다. 그동안 똑같은 노래를 오랜 시간 여러 번 불러서 내 노래지만 내가 지친다고나 할까. 그런데 젊은 뮤지션들과 이런 시도들을 하면 부르는 내가 새로워진다. 그래서 이 시간이 내겐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젊은 분들이 나는 몰라도 최근 이들과 부른 노래들은 좋아해주는 것 같다. 《다시 길 위에서》는 재즈 뮤지션들과 만나 많이 배우며 작업한 결과다. 난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특별히 장르 음악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냥 막 한다. 내가 쓴 곡과 가사에 맞겠다 싶은 장르면 그냥 할 뿐이다.

-음악인으로서는 많은 걸 이뤘다고 했는데 아직 이루지 못한 게 있을까.

=사실 내가 영화광이다. 그림을 즐겨 그리던 어린 시절부터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다. 돈과 기회가 없어서 아직 영화를 못 만들고 있다. 노래하고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영화 만들기에 훨씬 소질이 있지 싶다. 하하. 시나리오를 두편 써뒀다. 하나는 <미사리>로 미사리에서 노래하는 무명가수들의 이야기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 같은 분위기로 아누크 에메 같은 혹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의 문정숙 같은 여인을 그리고 싶다. 다른 하나는 <블레이드 러너>(1982) 같은 SF물로 환경과 성경이 결합된 이야기다. 일단 <미사리>부터 어떻게 좀 잘해봐야 하는데 말이다. (웃음)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

부산이 고향인 최백호는 지금도 종종 부산을 찾는다. 그에게 부산은 등하굣길 기차에 올라 먼발치에서 첫사랑을 바라보던, 친구들과 동네 우물가에 둘러앉아 기타 치며 노래하던 곳으로 기억된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맥없이 수평선만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했고, 서면의 어느 작은 나이트클럽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보기도 했다. 에코브릿지의 앨범에 수록된 최백호가 부르는 <부산에 가면>은 그래서인지 가수와 노래가 더없이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듯한 곡이다. 최백호의 묵직한 목소리가 ‘부산에 가면 다시 나를 볼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하나/ 너도 이제는 없는데’라는 노랫말을 굽이굽이 감싸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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