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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유감
2002-03-20

신경숙의 이창

외출했다가 돌아와 책상 옆에 놓여있는 자동응답기의 재생 버튼을 눌러보면 가끔 어머니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엄마한테 전화왔다고 전해 주시오 잉.”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동응답기 앞에서 한결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리모컨 보기를 돌같이 하시는 어머니에게 자동응답기는 기계가 아니다. 내 딸이 전화를 받지 못하니까 대신 받아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가끔은 "그럼 욕보시오 잉" 자동응답기에게 작별 인사까지 하신다. 처음에 내가 자동응답기를 구해다 틀어놨을 때 응답기에 녹음된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이구,이게 뭣이다냐?"였다. 내가 자동응답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한 다음에도 어머니는 적응을 못해 한동안 그냥 끊어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외출중인 딸과 통화할 길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어느 날 "엄마한테 전화왔다고 전해 주시오"라고 메시지를 남길 밖에. 내가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물으셨다. "전해 주디?" 예, 대답하면서 또 얼마나 웃었는지.

전화기에 대한 나의 적응력은 자동응답기까지인 것 같다. 지금은 외출중이니 메시지를 남겨주면 연락드리겠다는 메시지를 가능하면 좋은 목소리로 녹음하기 위해 몇번이나 고쳐한 적도 있고, 바깥에서 돌아와 맨 먼저 쳐다보게 되는 게 자동응답기인 적도 있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으면 불이 들어와 반짝반짝거리는 게 친구가 와있는 것처럼 반가웠다. 이후에 호출기가 등장했을 때나 커다란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도 신기하기는 했어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도 있고 편한 점도 있겠지만 아무 때나 누군가가 나를 호출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으며 마찬가지로 내가 어디에 있으나 핸드폰이 울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피곤했다. 그러다가 차를 세워놓고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다니기를 몇번 한 끝에 결국 핸드폰이라는 것을 하나 갖게 되었다. 받는 일은 안 하고 거는 일만 할 것이었으므로 타인에게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내 번호를 외우고 있지를 못했다. 언제부턴가 공적인 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때면 꼭 핸드폰 번호를 물어왔다. 그때마다 없다고 했다. 핸드폰 없이도 서로 연락할 일은 연락 잘 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집 바깥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 때를 빼고는 내게 핸드폰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딱 한번 핸드폰에 호감이 간 적이 있었는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볼 때였다. 영화 속 주인공들 사이에 핸드폰이 없었으면 영화가 안 되었을 만큼 영화 속의 핸드폰은 그들의 소통도구이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다. 탁탁탁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그들의 손가락이 어찌 그리 이뻐보이든지.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핸드폰으로 인한 소음에 정신이 멍했다. 지하철을 타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내일모레 속초의 대명콘도로 야유회를 갈 친구들에게 차례차례 전화를 해서 햇반을 사오라는 둥 빨간모자를 꼭 쓰고 오라는 둥, 오는 길에 고로쇠수액을 사자는 얘기를 멈추지 않고 했고, 어쩌다 조카와 얘기 좀 하려고 하면 조카는 고모가 얘기하자고 한다면서 문자메시지로 친구에게 지금 자기가 뭘하고 있는지 생중계를 했다. 쟈르뎅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이 친구 사이 같은데 침묵을 지키고들 있어 눈여겨 보았더니 각자 다른 곳으로 메시지를 보내고들 있었다. (그들은 왜 만났을까?) 건널목을 건너는 데 사람들이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걸어가서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면 통화중이었다. 일요일에 산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사람들은 또 어딘가로 통화중이었다. 사람은 하루 중에서 잠깐씩이라도 혼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기회, 사람을 기다리며 한가하게 책장을 넘겨보는 기회, 좁은 길을 혼자 걸어가며 새싹이 돋는 걸 발견하는 기회들을 성능 좋은 핸드폰이 가져가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알려준 적도 없는 핸드폰이 귀신처럼 벨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보니 내가 전화를 걸면 상대방 핸드폰에 이쪽 번호가 찍힌단다. 뿐만이 아니란다. 핸드폰을 꺼놓아도 번호를 추적하면 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알 수 있단다. 가슴이 뜨끔했다. 만날 수는 없으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를 걸어 저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소리로 잘 지내는구나, 안도하며 수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을 수도 이젠 없겠구나. 그런 비밀 하나도 지닐 수 없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