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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잡초가 몸에서 돋아나는 꿈을 꿨다

<나의 결혼 원정기> <리틀 포레스트> 등에서 본 농부의 도(道)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달도 숨어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하얗고 커다란 불빛 두개가 비틀거리며 밭두렁을 따라 돌진하다 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밭두렁 1m 앞에서 끼익, 하고 멈췄다(그 몇초 사이, 나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추리닝 바람으로 객사하는 줄 알았다). 트럭 문을 열고 내린 붉은 얼굴의 아저씨는 학생들이 들고 있던 올망졸망한 종이컵을 보더니 피식 비웃었다. “야, 밥그릇 가져와!” 페트병에 담긴 30도짜리 소주를 사발에 따라 단번에 마신 아저씨는 학생들에게도 소주 한 사발씩을 돌리는 틈틈이 오이 몇쪽을 먹은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트럭을 타고 떠났다, 비틀비틀. 나는 말리고 싶었다. “저기, 형님, 음주운전… 안 되는데….”(오빠라고 부르면 형수님이 화내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형님이 화냄.) 아저씨는 다시 비웃었다. “이제 주차할 건데 음주운전은 무슨.” 그 주차장이라는 형님네 마당이 걸어서 20분 거리잖아요, 그것도 꼬불꼬불 울퉁불퉁 흙길 따라서. 먼 옛날 유적 답사하러 떠났던 선배들이 남긴 일지에 따르면 절대 시골 사람한테 길 물어보지 말라던데(“조오기, 바로 앞이여”라고 하면 최소 30분은 걸린다면서). 진짜였어, 도시하고는 거리 개념이 달라.

난폭한 음주운전 폭주족들이 (그것도 트럭 몰고 다니는) 밭두렁을 질주하는 이곳, 소주 서너잔이 들어가는 종이컵 따위는 술잔 축에도 안 끼워주는 와일드한 이곳은 1990년대 대한민국의 농촌. 느긋하고 평화로운 양촌리(<전원일기>)를 보면서 키워왔던, 아아, 산산이 부서진 환상이여.

차가운 도시 여자지만 웬일인지 수많은 농촌 취재를 담당하면서 그 와일드함을 10년 넘게 겪고 나니, 나이 먹으면 시골 가서 농사 지으며 마음 편하게 살겠다는 사람을 보면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얼굴 보니 일 잘하게 생겼다고 (왜지, 팔뚝도 아니고) 귀농 공동체에 들어와 농사 배우라며 나를 유혹했던 농부는 규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1kg에 만원이 넘는 오디를 공짜로 실컷 따먹고 배가 나왔던 나는 잠깐 혹했으나…. “화장지는 세칸만 써야 해요.” “그럼 큰일 치를 땐 몇칸?” “그게 세칸. 환경을 생각해야지요.” 사람 나고 환경 났지 환경 나고 사람 났나요. 아, 그건 아닌가.

내게 현실적인 농촌이란 이런 곳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이 목욕하는 친구 엄마를 엿보고, 방음 장치도 없이 노래방 기계를 들여놓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 부르다 노총각의 설움이 북받치면 거침없이 주정을 발산하는 <나의 결혼 원정기> 같은 동네, 사과꽃 향기를 타고 농약 방울이 흩날리는 서바이벌의 현장. BMW 두대를 굴리는 성공한 사과 농부 이르기를, 사과는 저농약은 있어도 무농약은 없다 했으니, 사과밭의 봄은 농약과 더불어 오나 보다.

<나의 결혼 원정기>

하지만 무농약 사과도 있긴 하다.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유명해진 <기적의 사과>의 농부 기무라씨는 농약도 비료도 없이 썩지 않는 사과(2년 넘게 멀쩡한, 맥도널드보다 무서운 사과다)를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세월이 8년, 그사이 손으로 잡은 벌레와 뽑은 잡초가 하늘의 별보다 많을 터이다. 그렇다, 농사란 잡초와의 싸움이다. <잡초 없는 정원>이란 책에 의하면 잡초는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흙 1kg에 잠자고 있는 잡초 씨앗이 300개라고. 그러니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처녀 농부가 온몸에서 잡초가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도 당연하다.

나도 그랬다. 농활 떠난 마을의 농부가 식구들 먹이겠다고 무농약으로 간직한 논 한 마지기 김매기에 사흘 동안 투입된 대학생이 열두명, 밤마다 담요 대신 깔고 잤던 스티로폼 알갱이가 줄줄이와 동글이(둘 다 잡초 애칭)로 변하는 환각을 보면서 앞으로는 농약 친다 욕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미래의 소비자를 계몽하는 농활의 순기능이었다. 그런데 그땐 왜 오리가 없었던가,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논두렁에 풀어 잡초 먹여 키운 오리로 나중에 소테도 해먹던데.

본인은 가난하다고 주장하지만 뉴욕 근처에 밭이 스물두개나 들어가는 마당이 있는 윌리엄 알렉산더는 <나를 미치게 하는 정원이지만 괜찮아>라는 책에서 유기농을 고집하며 키운 텃밭 토마토 한개의 생산 비용을 계산하는데, 그게 64달러, 7만원이 조금 넘는다. 내가 몇달 전 농장 직거래로 샀던 토마토 2kg이 7900원, 그냥 농약 먹자. 하지만 농약도 돈이다. 돈이 없으면 마음껏 뿌릴 수도 없다. 해맑은 꼬마들이 정직한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농협에서 대출 받아 농사 망해 집에 차압이 들어오니 가장이 농약 마시고 자살하는 하드코어 연극을 선보이는 영화 <아부지>가 옛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 내가 몇년 동안 농활을 갔던 마을에도 몇번 자살 사건이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 가을 단감 가격이 폭락해서 농민들 걱정이 많다기에 내가 좋아하는 데다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자몽을 던지고 좋아하지도 않는 단감 말랭이를 사서 농촌의 근심을 함께하고자 억지로 먹다가… 맛있네, 내년에도 사먹어야겠다.

그럴 때면 저 넓고도 넓은 <미남이시네요>(2005)의 프랑스 농장이 떠오른다. 이 동네에도 여자가 없어 외국으로 맞선 보러 가는 건 마찬가지라지만, 여자 없으면 어때, 빚도 없이 통장에 현금이 2천만원+α인걸. 여성 농민들을 1년 반 동안 찍은 한국 다큐멘터리 <땅의 여자>의 주인공들은 살림도 하고 농사도 짓고 애도 보고 농민운동도 하느라 바빠서 아침에 토마토도 못 따고 시위하러 나간다(토마토는 의외로 연약해서 비만 많이 맞아도 열매가 시들어버린다고 <리틀 포레스트>에서 그랬다). 토마토를 따면 시어머니한테 욕먹을 일도 없고 돈도 생기고 물대포도 안 맞을 텐데 뭐하러 시위 같은 건 나가서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욕을 얻어먹는 걸까. 욕하는 사람은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참 좋겠다.

토마토만큼 연약한 남자

농촌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은 두세 가지 것들

<아부지>

안면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아침, 오늘은 공치겠다고 좋아하던 농활 대학생에게 아저씨는 비옷을 던졌다. “물길 내러 가자. 비도 오고 시원하니 일하기 좋겠네.” 비옷을 입고 삽질을 하고 있노라니 지나가던 할머니가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할 놈아, 니 마누라는 비 온다고 술판 벌였는데 학생들한테 뭔 일을 이리 시키고 **&^$$#%&여!” 머쓱. 우리는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가서 밀주에 감자전을 먹었다. 남의 집 부엌 사정도 훤히 아는 농촌 마을은 그래서 무섭다. <아부지>에서 하드코어 연극 지도한 선생님을 체포하려고 선글라스 끼고 나타난 요원도 안면 때문에 물러난다. 여기는 사람 사는 정이 넘치는 대한민국 농촌입니다.

<미남이시네요>

결혼소개소

농촌의 밤은 길고도 적적하여라, 불알친구보다는 엊그제 만나 살림 차린 마누라가 그리운 시간이다. 게다가, 마누라 죽은 지 열흘 만에 맞선 시장으로 나선 <미남이시네요>의 에메에 따르면, “슬픔은 혼자 견뎌도 농사는 혼자 못 짓는 것”, 국경을 초월해 맞선을 주선하는 결혼소개소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농사 짓는 <늑대아이>나 여자 혼자 농사 지어 우스터 소스와 홀토마토까지 만들어 먹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남자란 토마토만큼이나 연약한 존재인가 보다.

<나의 결혼 원정기>

환금작물

매년 대중없이 돈 되는 작물을 키운다는 <나의 결혼 원정기>의 농촌 노총각 만택(정재영)은 제일 비싼 작물이 뭐냐고 묻자 말한다, “내가 그걸 알면….”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 과수원 있잖아. 내가 만난 제일 부자 농부가 사과 농사 짓는 사람이던데. 하지만 의외로 값이 싼 깻잎 따위도 많이 팔면 돈이 된다고 한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삼십대 후반의 한여름, 체험 취재에 끌려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깻잎을 따며 나는 회의했다, 이미 충분히 더운데 왜 하우스 농사를 짓는 거지. 농사의 도(道)는 그처럼 고독하고도 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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