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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 [4] - 제작기 ②
2002-03-22

10월

10월9일

드디어 난곡 촬영을 마치다. 처음에 감독님이, 만든 비로 커버하기엔 너무 앵글이 넓으니 진짜 비를 기다렸다가 찍자고 했을 때, 과연 그런 방법이 가능할까 의심했었는데 무사히 해낸 셈이다. 당연히 모두들 즐거워했지만 나로서는 오늘이 최악의 날이었다. 온몸이 쫄딱 젖은 채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촬영 김 기사님이 갑자기 부르시는 게 아닌가. 가보니 저기 저 물건을 좀 치우라고 하셨다. 김 기사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니 거기 놓인 것은… 그것은 정녕… 아아!… 한 무더기 똥이었다. 서울에 마지막 남은 대규모 빈민촌인 이곳은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갖춘 집이 많아서 골목마다 아이들이 싸놓은 똥이 많다.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감독님이 지나가다가 밟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치우라시다니…. 나도 집에 가면 귀염받는 아들인데, 그래도 4년제 대학도 나오고 나름대로…. 아아! 감독이 되는 길이 과연 이토록 멀고도 험하단 말인가! 나, 그래도 이 악물고 다 치웠다. -한장혁(연출부)

10월15일

순창 촬영 5일차. 아침을 먹는데 갑자기 보배식당 아줌마가 쳐들어왔다. 60인분 밥값을 물어내라고 난동을 부린다. 보배식당은 이제 물렸다고 하도 스탭들이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중앙식당으로 바꾼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 아침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차려놓고 물어내라고 생떼를 쓰니 이거야 원…. 일단 도망부터 치고 봤는데 나중에는 촬영현장까지 가죽장갑 낀 어깨들을 데리고 몰려왔다. 나를 내놓으라고 스탭들한테 소리소리지르고 나는 버스에 숨고…. 무섭다… 살고 싶다…. -채화석(제작부)

10월16일

태어나서 첫번채 운동홰 날이엇다. 역씨 아빠는 오시지 않앗다. 촤령 가서 못 오신 것이다. 미준이 아빠(편자 주- 곽경택 감독)는 오셧는데…. 교장선생님이 꼭 오라고 편지까지 보내셧는데 우리 아빠는 너무햇다. 내가 꼭뚜가시춤 추는 것도 안 보고. 미준이가 너무 부럽고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엇다. 집에 와서 <카드캡터 체리> 보고 잣다. -박서우(감독의 딸)

10월22일

뇌성마비 장애인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든데, 자꾸 그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 나오라고 하는 통에 다리에 쥐가 나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건 박 감독님의 태도다. 어느 배우나 그렇듯이 나 역시 한 테이크가 끝나면 감독 눈치부터 살핀다. ‘이걸로 끝인가?’, 혹은 ‘나빴나?’ 그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아, 끝이구나!’ 그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 “수고했다, 다리는 괜찮니?” 나는 감격해서 외친다. “괜찮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럼, 한번만 더 해보지 않으련?” -류승범(배우, 우정출연)

10월24일

내가 물에 빠저죽는 장면을 직었다. 연출부 옵바들은 시체처럼 눈도 감빡이지 말고 가만이 잇으라고 하셨지만 너무 추우니까 살이 막 저절로 떨렷다. 구경군 중에 어떤 애들이 야, 잘 좀 해바바 하고 놀렸다. 그래서 나는 야, 니가 와서 해바바 하고 소리질렀다. 정식이 옵바가 두나 언니 같은 진자 배우가 될라면 이 정도는 참아야 된다고 해서 꾹꾹 참아따. -한보배(아역배우)

11월

11월4일

분당 촬영. 며칠 만에 다시 찍으러 왔더니 건물에 갑자기 없던 대문이 달렸다. 연출부는 연결이 튄다며 대문을 없애야 한다고 아우성이고 제작부는 남의 집 대문을 어떻게 없애느냐고 한숨이다. 결국 집주인 승낙을 받아 일단 떼었다가 나중에 도로 붙여주기로 했던 모양인데 이번엔 어떻게 떼느냐가 문제였다. 결국 내가 나서서 떼어주었다. 도대체 이 영화는 나 없으면 어떻게 찍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노승회(키그립)

11월6일

강호 형 집으로 설정된 분당 촬영중이다. 집 앞길을 찍으려니 이미 계절이 바뀌어 여름 분위기가 안 난다고 난리들이다. 다른 건 어떻게 피해가겠는데 대문 바로 앞에 선 은행나무가 문제다. 잎이 벌써 다 져버렸으니. 하는 수 없이 조화 파는 가게 가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은행잎을 잔뜩 사다가 가지마다 붙여버렸다. 여기는 이런 식으로 커버한다지만 나머지 장면들은 다 어떻게 하나…. 이무영 감독 부부가 놀러오셨다. 댁이 근처라고 한다. -정식(연출부)

11월9일

이천 폐건물을 찍던 중에 감독이 또 변덕을 부렸다. 갑자기 시나리오에도 없는 장면을 만들어내더니 빨리 그걸 찍으러 가자는 거다. 신하균이 발가벗고 히치하이킹하는 장면을 찍자는 거다. 해는 벌써 다 떨어져 가는데 장소 헌팅도 안 돼 있는 길거리 장면을 찍자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대여섯명만 출발했다. 조명도, 동시녹음도 없이, 연출부, 제작부도 도착 못한 상황에서 장소 고르고 카메라 세팅하고 신하균 옷 벗고 리허설도 없이 두컷을 찍었다. 삼십분 안에 말이다. 해가 거의 진 상황에서 노출이 안 나오는데 반사판도 없어서 공책만한 우리 그레이 카드판 뒷면을 이리저리 비쳐가며 찍었다. 이건 무슨 학생들 단편영화도 아니고….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기세훈(촬영부)

11월13일

다시 순창에. 여기 촬영은 정말이지 악몽 같다. 아침에 안개 걷히면 열한시, 오후에 네시 반이면 해 떨어져, 결국 밥 먹는 시간 빼면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찍는 셈이다. 거기다 때때로 비오죠, 걸핏하면 흐리죠…. 찍을 분량은 엄청난데, 답이 안 나온다. 결국 ‘매우 복잡한 카메라워크와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액션신’은 숏 수를 대폭 줄여버렸다. 줄여놓고 들여다보니, ‘왜 내가 진작 이렇게 안 했지?’ 하는 생각이 든다. -박찬욱(감독)

11월14일

다시 순창에. 여기 촬영은 정말이지 꿈결같다. 아침에 안개 걷히면 열한시, 오후에 네시 반이면 해 떨어져, 결국 밥 먹는 시간 빼면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찍는 셈이다. 그러니 매일 다섯시만 되면 촬영쫑, 바로 식당에서 한잔씩 걸치기 시작하면 아무리 오래 마셔도 시계 보면 기껏해야 열시 정도다. 이튿날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으니까 마음껏 수다 떨고 원없이 놀아도 된다. 아, 매일 이런 촬영만 했으면! -송수인(미술팀)

11월15일

기자들이 몰려왔다. 전라도 순창까지 내려오다니 대단한 열성들이다. 구경꾼도 없이 우리끼리 한가롭게 찍다가 갑자기 주위가 어수선해지니까 잘 적응이 안 됐다. 게다가 어떤 여자기자 하나는 우리 오야지 의자에 허락도 없이 척 앉더니 서랍에서 과자를 마구 꺼내 먹어버렸다. 그게 어떤 과자인가, 제작부 눈치 봐가며 몰래몰래 빼돌렸던 그 ‘초코 찰떡파이’, 다른 스탭들한테 욕먹어가며 악착같이 쟁여놨던 그 ‘오징어 땅콩’, 아무리 먹고 싶어도 오직 오야지한테 잘 보이려는 마음 하나로 꾹꾹 눌러 참았던 그 ‘홈런볼’…. -이은주(동시녹음부)

11월16일

야외촬영이라 별로 할 일이 없어 마니또 게임을 준비했다. 모든 배우, 스탭들 이름을 적은 쪽지를 단지에 넣고 하나씩 고르게 한 다음 자기가 뽑은 사람한테 잘해주기 게임이다. 물론 상대가 모르게 해야 한다. 모두들 너무 좋아해서 ‘마추위’ 위원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안성현(미술부)

11월21일

모두 마니또 때문에 난리들이다. 틈만 나면 자기 마니또가 어떤 문자 메시지를 보냈느니 무슨 선물을 전해왔느니 온통 그런 얘기들 나누느라고 야단법석이다. 현장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 나도 강호 오빠한테 밤마다 문자를 보내고 있다. 오늘은, ‘좋은 꿈 꾸세요. 당신의 마니또로부터.’ 그나저나 내 마니또는 누굴까, 궁금해 죽겠다. -권수경(분장팀)

11월27일

드디어 ‘마니또의 밤’이 열렸다. ‘마추위’의 활약은 대단했다. 며칠에 걸쳐 모든 배우 스탭들을 일일이 인터뷰해서 현장편집기로 편집하고 커피숍 빌리고 대형 모니터 설치하고 음식 준비하고 다 했다. 인터뷰 내용은, 각자 자기가 뽑은 사람을 밝히고 그 사람을 칭찬하고, 이 영화를 만드는 감회가 어떤지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이름 뽑은 순서에 따라 릴레이되는 식이었는데 그동안 그토록 궁금해왔던 이름들이 공개될 때마다 장내는 폭소의 도가니로 변하곤 했다. 내 평생 가장 많이 웃어본 한 시간 반이었다. 공교롭게도 서로 상대방 이름을 뽑은 두 사람, 즉 마니또 커플이 탄생하면 데이트 비용 5만원을 지원하는 제도도 있었는데 소품팀 석호 형하고 내가 뽑혔다. 사람들 앞에서 진한 키스를 해야 돈을 준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버렸다. -김양수(촬영부)

11월29일

길고도 길었던 순창에서의 마지막 날이자 <복수…> 전체 촬영 종료일. 열아홉 나이에 생전 처음 일해본 영화현장도 이젠 빠이빠이다. 배우, 스탭 언니 오빠들과 기념촬영하고 차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하늘도 내 맘을 아시는지 비가 왔다. 첫촬영 때도 그러더니. 첫날이나 끝날 비오면 흥행이 잘된다는 충무로 말이 있고 하니 우리는 두배로 잘되겠다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자 감독님은 그건 비오면 촬영 공치니까 자위하려고 충무로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하셨다. 그래도 우리 <복수…>를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겠다. 뭐니뭐니해도 내 첫작품인데…. -김보연(의상팀)

2002년 1 ~ 3월

1월8일

보배식당 아줌마가 또 전화했다. 매일이다. 미치겠다. 오늘은, 자기 시아주버니가 청와대 출입기잔데 거기다 얘기해서 영화사를 박살내버리겠단다. -채화석(제작부)

2월26일

<복수는 나의 것> 소리를 만드느라 연일 밤샘이다. 감독은, 이 영화가 그림 바깥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따라서 그것들을 소리로 다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은 멋있지. 하지만 그 얘긴, 다시 말해 골탕 좀 먹어보라는 거다. -김창섭(사운드 디자이너)

2월29일

내심 짐작은 했지만 막상 사실로 확인하고 나니 괜히 화가 막 난다. 조명부 오승철과 미술부 안성현, 연출부 한장혁과 동시녹음부 이은주…. <복수는 나의 것> 현장에서 탄생한 두 커플…. 아! 현장에서 나한테 잘 보일까 무서워 눈만 마주치면 슬금슬금 피하곤 했던 그 많은 남자 스탭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찍히면 죽는다’나? 내가 나이 좀 먹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괄시를 하다니! 다음 작품 에서는 좀더 분발해야겠다. 거기는 일단 야구단이 많이 나오니까 남자 숫자도 충분히 확보된다고 봐야 한다. 다섯팀만 나와도 벌써 마흔다섯놈 아닌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송종희(분장)

3월1일

분당 이무영네 놀러갔다가 밥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차 타고 우리가 촬영했던 동네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장수영(편자 주- 이무영의 아내)이 제법 센티멘털하게 한숨 쉬며 하는 말. “이제 완전히 봄인가봐…. 저 은행나무 좀 봐요, 새 잎이 다 났잖아….”

난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러네….” -박찬욱(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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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