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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클래식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깨고 싶다”
김현수 사진 최성열 2016-03-14

새 앨범 《Modern Times》로 돌아온 피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지난 2월, 새 앨범 《Modern Times》를 발표하고 전국을 돌며 국내 팬들과 만나는 독주회를 가졌다. 국내에는 2013년 첫 독주회 이후 꼬박 3년 만의 일이다. 일년 내내 전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그녀의 연주를 가까이서 보기 위한 팬들의 성원은 실로 뜨겁다. 그녀의 공연은 격식을 우선하는 클래식 공연보다 흡사 아이돌 공연장처럼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찬다.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이 젊은 천재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전세계가 열광하는 것일까. 20세기 근대를 관통하는 클래식의 변화와 젊은 피아니스트의 정체성에 관한 단단한 고민으로 이뤄진 독창적인 연주 앨범 《Modern Times》를 듣는 순간, 천재 딱지를 뗀 인간 손열음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전국을 돌며 하루 걸러 공연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그녀를 마침 3월1일, 삼일절에 만났다.

-새 앨범 《Modern Times》의 컨셉이 독특하다. 이와 함께 2주에 걸쳐 앨범 발매 기념 독주회도 열었다.

=20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모리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을 연주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그가 활동했던 1900년대 초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동세대 작곡가들은 또 누가 있을까 찾다보니 이 시기가 마침 한국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던 시기더라. 재즈가 태동하던 시기를 살았던 조지 거슈윈과 한국 최초의 성악가로 알려진 윤심덕이 한살 차이였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클래식 작곡가들이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발표한 곡만으로 이뤄진 앨범과 공연을 구상하게 됐다.

-직접 앨범 소개에 “《Modern Times》는 내가 온 곳에 대한 기록”이라고 썼다. 당대 역사 인식과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맞물린 결과인가.

=나는 동양인인데 유럽에서 서양음악을 하니까, ‘우리 음악인데 네가 뭘 알아?’라는 듯한 서양인들의 시선을 종종 느낀다. 그런데 그 당시 음악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미국 등을 떠돌며 평생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았다. 1차대전 참전용사였던 라벨의 삶을 보면서 인간에게 전쟁이나 역사의 흐름이 끼치는 영향에도 흥미를 느꼈다. 이런 생각이 모여 알반 베르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등 당대 작곡가를 더 찾게 됐다. 나로서는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보다 김유정과 윤동주가 살던 20세기 초 무렵이 할 이야기가 더 많은 시대다.

-그런데 앨범 구성과 독주회 공연 구성이 달랐다. 1, 2부로 나뉜 공연에서 2부는 앨범에 실리지 않은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곡들로 시작했다.

=바그너, 스트라우스, 차이코프스키가 죽고 나서 누가 나타났을까? 나는 재즈가 태동했다고 본다. 재즈를 빼놓고는 클래식 음악사를 논하기 힘들기에 당대 재즈 흐름의 아버지 격인 거슈윈을 생각했다. 그가 1910년대에 쓴 곡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17∼18살 때 쓴 곡이 딱 3곡 있어서 공연에 넣었다. 앨범에 실린 곡 구성 그대로를 공연으로 옮기는 것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공연은 좀더 하나의 스토리텔링을 담고 싶었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에서 끝나는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위치이고 싶었달까.

-이번 독주회 공연 구성이 클래식 팬들에겐 익숙한 연주곡들인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와 라벨의 <라발스>는 꽤 많이 연주한다. 반면에 <쿠프랭의 무덤>은 6악장 모두를 한자리에서 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거슈윈의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치를 않아> <리알토의 물결 래그> <스와니> 3곡 역시 콘서트홀 연주는 내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의 어린 시절 습작 수준의 곡이기도 하고.

-서울 공연에서는 앙코르곡을 무려 10곡이나 연주했다. 심지어 신청곡도 받던데, 2500석을 가득 메운 청중 분위기가 아이돌 콘서트장 같았다. 공연을 보고 나니 손열음은 ‘기분파’라는 생각이 들더라.

=완전 그렇다. (웃음) 흔히 클래식 하면 차분한 분위기라는 편견을 가지는데 왜 가수 공연은 신나게 받아들이고 클래식 공연은 조용하게 사색하나. (웃음) 다 같은 음악이니 우리도 똑같이 즐겨줬으면 하는 생각에 서비스하고 싶었다. 사실 클래식이 대중음악보다 스펙트럼이 더 넓다. 사람들의 편견을 깨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연주가 끝날 때마다 취하는 거친 동작도 본인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다. 드라마 <밀회>에서 선재(유아인)가 혜원(김희애)의 거친 연주를 보며 “손열음이 카푸스틴 치고 그렇게 일어날 때 좋았는데”라는 대사로까지 등장할 정도로.

=연주 끝에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건 제스처라기보다는 연주 트릭이다. 일어나면서 건반을 치면 몸의 무게가 실리니까 훨씬 큰 소리를 낼 수 있다. 피아노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셈여림과 타이밍, 크게 두 가지일 텐데 그것으로 감정과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니까 피아니스트마다 다른 방식을 갖게 된다. 마치 사람의 말투나 목소리가 다르듯이 말이다.

-페달을 쓰는 손열음만의 방식에서도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연주하다가 틀려도 페달을 이용해 음을 뭉뚱그리려 들지 않는다고.

=사실 음을 안 틀리려는 경향은 최근의 움직임이다. 19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연주에서 누가 무슨 음을 틀리든 아무도 신경 안 썼다. 그 공연이 어떤 내용과 분위기를 전달하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이제는 시대 흐름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어떤 이유로 흐름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일단 스튜디오 녹음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요새는 원하면 피아노도 한음씩 잘라서 녹음할 수 있다. 다이내믹 레인지(음향신호를 전송하거나 녹음할 때 취급하는 최강음과 최약음의 비(比)를 데시벨(dB) 단위로 나타낸 영역)도 조절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을 사람들이 듣고 나면 실제 공연에서도 CD와 똑같이 연주할 거라 생각한다.

-흔히 영재 교육이라 부르던 시기에는 어떤 스타일의 교육방식을 접했나.

=나는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배웠지만 당시 나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러시안 스쿨 작품집을 보며 러시아 작곡가들의 연습곡, 러시아 민요 등을 많이 가르쳐주셨다. 한국에서 체르니를 치듯 배웠다. 20세기 들어서 피아노 스쿨의 계파가 프랑스, 독일, 러시아로 크게 갈라지는데 각각 기술부터 특색이 모두 다르다. 나는 엄밀히 말해 러시안 스쿨의 영향 아래 있다. 러시안 스쿨은 정확하고 밀도 있는 걸 추구한다.

-연주를 많이 하다보면 작곡을 해보고도 싶을 텐데.

=전혀. (웃음) 성격상 내가 잘 못하는 분야의 일을 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사실 ‘나는 누군가의 유산을 재활용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건가?’라며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갈증도 있었다. 그런데 클래식은 악보로만 남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구라도 그것을 들려줄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내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니 자부심도 갖게 됐다.

-이미 수없이 많은 무대에 서봤을 테지만, 새로운 형태의 무대나 공연에 대한 고민도 하나.

=클래식이 양질의 콘텐츠라는 자부심 때문에 다른 생각을 안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가수들도 의상에서 조명까지 다양한 무대를 선보이려고 노력하는데 우린 공연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연주만 하니까 불친절해 보이기도 한다. 콘텐츠만 똑같으면 포맷은 어떻게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여가시간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인가. 왠지 영화를 보더라도 이미지보다 음악에 집중하며 볼 것 같다.

=요샌 바빠서 거의 보질 못한다. 그래도 <씨네21>의 애독자다. 한달에 한번꼴로 비행기를 꼭 타니까 기내에서 자주 본다. (웃음) 클래식 음악의 쓰임이 좋아서 아직도 기억하는 영화가 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에서 극중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신애(전도연)가 이웃집에 갔다가 이웃의 권유로 피아노 앞에 앉는데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리스트의 <탄식>을 연주한다. 이 곡은 장조인데 나중에 그녀가 사건 현장에 불려나가는 장면 배경에 <탄식>을 단조로 옮긴 음악이 흘러나온다. 주제와 맞닿은 세심한 음악 구성에 놀랐었다.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손열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 같나.

=지금처럼 계속 연주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축복이다. 누굴 가르치는 재능은 없지만 후진을 양성하는 일은 하고 싶다. 한국의 뛰어난 인재들이 다 같이 잘되는 문화를 만들고 싶은 게 꿈이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

손열음 지음 / 중앙북스 펴냄

손열음은 글 쓰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한 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을 통해 클래식 음악 역사, 피아니스트로서 갖는 사적인 고민, 제도권 내의 현실 문제 등 다양한 주제의 글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 책은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썼던 칼럼을 한데 엮은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녹음한 앨범 부클릿의 해설서도 직접 쓸 만큼 필력이 대단한데, JTBC 드라마 <밀회>를 쓰고 만든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감독도 이 칼럼의 열렬한 팬이다. 정성주 작가는 극중 오혜원의 입을 통해 “손열음이 대단한 건 뜨거운 걸 냉정하게 읽어내서야”라며 그녀에 대한 애정 고백을 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탈권위적인 앙코르 공연 문화에 열광하다가도 메달 경쟁식 콩쿠르에만 몰두하는 음악계 흐름은 매섭게 비판하는 등 클래식을 향한 그녀의 차가운 열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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