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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군인의 도(道)

<기다리다 미쳐> < GP506 > <용서받지 못한 자>

<용서받지 못한 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11월의 황량한 캠퍼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과 동기가 군인한테 차였다, 그것도 일병한테, 아무리 카투사라지만.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 우리는 모두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차마 묻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신이 나서 각다귀떼처럼 왱왱거리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우리 덕분에 그 애는 하루아침에 그냥 민정이에서 ‘군인한테 차인 민정이’가 되어 대학원생과 조교들의 동정까지 한몸에 받고 있었으니까. (그중 다수는 훗날 기자가 되었으니….) 문제는 캐물을 당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집이 망해서 몇달째 방세가 밀린 탓에 주인아줌마를 피해 야밤에만 자취방에 들어가던 그 애는 군인한테 (그것도 애인이 근무하던 부대 행정실로 전화해서 제발 바꿔달라며 몇번이나 매달린 끝에) 차였다는 수치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유리걸식을 하며 강원도로 떠나버렸다. 근데 강원도에 군인 많은데. 아무튼 차비가 없어 걸어서 이동하기를 여러 날, 과연 시험공부 대신 사극깨나 봤던 사학과 학생답게 “지나가던 과객이온데 밥 한 그릇 얻을 수 있을지…”를 연발하면서 (군인한테 차였어도 배는 고프니까) 강원도를 헤매다 돌아온 ‘군인한테 차인 민정이’는… 예뻐졌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지나가던 과객한테 밥 한 그릇 선뜻 내주는 집이 그렇게 흔할 리가. 굶기를 밥 먹듯 했던 그 애는 원래 얼굴이 넓죽하다고 하여 애칭이 너구리였는데 보름 만에 토끼가 되었다(살이 빠지니까 더불어 눈도 커지고. 역시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 그렇게 ‘군인한테 차인 민정이’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된장국과 비린내 나는 생선도 맛있게 먹는다

‘군인한테 차인 민정이’에 얽힌 미스터리의 단서를 찾은 것은 지금 보니 쓸데없는 호화 캐스팅(장근석, 손태영, 데니 안, 유인영, 그리고 막돼먹은 영애씨 전 남친 산호. 이 안목 있는 감독은 누구인가)이 당황스러웠던 2008년 영화 <기다리다 미쳐>를 보던 순간이었다. 밴드 선배를 짝사랑하던 여자가 군대로 면회를 가는데, 설사 애인이 아니더라도 여자이기만 하다면 친구의 하룻밤 해방을 위해 외박 신청쯤 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군대 간 사람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방을 잡은 둘은, 사회였다면 몇달은 걸릴 진도를 그날 밤 한꺼번에 나가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군인도 바람피울 수 있겠구나,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 군인 정신.

< GP506 >

‘현역 대령이 알려주는 정통 군생활 안내서’라는, 이사님이 직접 나서 신입사원 잡듯 진상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일단 대령은 사병 생활을 해본 적이 없음) 슬로건 아래 출판된 <군대생활 매뉴얼>은 온갖 불가능으로 점철된 군인의 도(道)를 역설하는데, 그 불가능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된장국과 비린내 나는 생선도 맛있게 먹는다.

그것밖에 줄 수 없다면 먹기야 먹겠지만 맛있게 먹기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그건 그렇고, 어째서 된장국과 비린내 나는 생선이 동급인 건가요. 대령님, 된장국 싫어하는구나. <서경석의 병영일기>를 보니까 군대엔 콩나물이 너무 많아서 된장국이랑 미역국에도 콩나물을 넣는다더니 그래서 그러는 건가. 어쨌든 댁 같은 분들 덕분에 이런 영화가 나오잖아요, 공포영화를 가장했지만 알고 보면 장군아빠한테 혼날까봐 징징거리는 금수저 중위님 덕분에 소대원 21명 중에 20명이 몰살당하는 <GP506>. 그런 상사를 만나는 것도 공포라면 공포겠다만.

하지만 금수저가 아니어도 진상될 자격은 충분하여 <대한민국 1%>(제목만 보면 착각할 수 있겠지만, 금수저 이야기 아님)에 나오는 여군 하사는 혀 짧은 소리로 명령인 척하는 칭얼거림을 남발하며 1시간9분이 지나도록 아무 드라마 없이 훈련만 한다. 상영시간 1시간 45분의 65%가 그냥 서바이벌 게임, 이게 영화인가.

군필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

서바이벌 게임이라고 하니 내가 만난 숱한 사장 중 한명이 떠오른다. 사장이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며 아는 척을 하는 데다 회사 MT 가서도 직원들을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나는 전날 밤 술 먹고 난간에서 떨어져 면제, 주정뱅이로 살기 잘했다) 해병대쯤은 나온 줄 알았더니, 자유당 시절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금수저로서 당연히 군대 면제였고 그 아들 둘도 군대 안 갔다고. 이런, 그 깔깔이 당장 벗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사장의 심리를 추측해보자면, 힘드니까 군대 가기는 싫지만 군대 갔다 온 사람들 사이에 끼고는 싶다, 왜냐하면 군대 갔다와야 남자가 되고 사람이 되니까, 근데 나는 진짜 사나이에 괜찮은 인간이니까, 힘들어서 군대는 안 갔지만 군필자 못지않은데, 왜냐하면…. 한 무리의 남자와 여자가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나오는 길, 여자들은 모두 궁금했다, 아까 뭐라고 한 거야? 남자들은 키득거렸다. 그걸 못 알아들어? 그 대사는 이런 거였다, X 잡고 반성해. 군필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라던데 사장은 알아들었으려나. 군대가 사람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 망치는 그런 영화는 보지도 않았겠지만.

대한민국 대표 보수 조갑제는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에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군대에갔다온 사람은 언동이 신중하고 조직에 잘 적응하며, 참을성이 많고 뭔가 강인한 느낌을 준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3년이라는 기간을 군대에서 보냈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는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다. 군대는 한국인다운 한국인을 찍어내는 고귀한 생산 현장이다.” 그럼 대한민국 회사들에 빼곡하게 깔린 진상은 전부 군 면제겠다. 세 문장으로 이뤄진 이 단락에서 사실을 기술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문장뿐이다. 만약 세 번째 문장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난 그냥 한국인 안 할래.

모든 군인은 고참이 된다

애인만은 못하겠지만 군인들이 기다리다 미치는 두세 가지 것들

<기다리다 미쳐>

월급이 기다린다

2008년 영화 <기다리다 미쳐>의 장근석 기준으로 군인 월급은 5만원이었다. 이걸 알뜰하게 모으면 사회에 나가 ‘종잣돈’이 된다는 게 2009년에 나온 <군대생활 매뉴얼> 저자의 충고인데, 1년에 60만원으로 살 만한 종자가 뭐가 있더라…. 딱히 없으니까 장근석이 군대에서 삽질하는 것도 모자라 휴가 나와서도 막노동하는 거겠지. <군대생활 매뉴얼>은 이런 비법도 알려준다. 학비가 없으면 사병으로 복무하다가 단기복무 부사관에 지원해 4년만 복무하면 연봉 1500만원을 모아 복학할 수 있다! 사병으로 1년만 복무한다 쳐도 5년, 20대 중반에 복학해서 졸업하면 거의 서른, 대령님, 취직은 어떻게 할까요.

<해안선>

고참이 기다린다

모든 사원은 이사가 될 수 없지만 모든 군인은 언젠가 고참이 된다. 해병대를 사랑해 마지않는 <해안선>의 강 상병(장동건)은 정신적인 문제로 의가사 제대한 다음에도 군복을 곱게 차려입고 해안선에 출몰하며 후임들을 괴롭히는데, 해병대 군인들이 이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반말과 기합, 떼까지 참고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고참이었기 때문에. 귀신은 잡아도 고참은 못 잡는다. 근데 고참들은 사회에서도 민폐다. 고참이 되니까 휴가를 나와도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던 학교 선배는 명절이라고 고향 가는 나를 따라 서울에서 전주까지 내려와 내가 사주는 삼겹살을 먹고도 모자라 노래방까지 가고서야 돌아갔다. 월급 3만원(<기다리다 미쳐>보다 옛날이니까) 아껴서 종잣돈 만들려고 그랬나.

<족구왕>

족구가 기다린다

학기가 바뀌고 복학생들이 돌아오는 계절이 되면 캠퍼스는 족구장으로 변신한다. 뙤약볕 아래 피부 망가지면서도 좋다고 족구하는 <해안선>의 군인들은 몹시 자학적인 해병대 정신으로 그런다고 쳐도, 그냥 군대 갔다온 사람들까지 왜 그렇게 족구를 사랑하는 걸까. <족구왕>의 만섭(안재홍)은 취업과 성적의 노예가 되어 족구를 멀리하는 대학 문화를 탓하지만 옛날에도 족구 안 하는 사람들은 족구 싫어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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