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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퇴고가 거듭될수록 문장에 콘텐츠가 많아지고, 밀도도 높아진다 – <표현의 기술>유시민 작가
김성훈 사진 백종헌 2016-06-30

“목소리가 제대로 녹음될지 모르겠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유시민 작가의 목소리는 많이 쉬어있었다. 인터뷰 하루 전날, JTBC 시사•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을 녹화할 때까지만 해도 이상이 없다가 녹화가 끝난 뒤 목감기에 걸린 탓이라고 했다. 은단으로 응급처치를 하지 않았다면 목소리가 안 나왔을 거라는 출판사 관계자의 말까지 들으니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유시민 작가는 한손으로 녹음기를 입 앞에 갖다댄 채 생생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가 쓰고, 만화가 정훈이가 만화를 그린, 새 책 <표현의 기술>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에 대한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제목대로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을 통해 잘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유시민과 정훈이식 대답이다.

-<표현의 기술>은 최근 낸 책 중 가장 기획성이 강한 것 같다. <유시민의 논술특강>(2015),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2015) 같은 글쓰기와 관련한 책이 두 차례나 출간됐음에도 글쓰기 책을 낸 이유가 무엇인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낸 뒤 온라인 상담실(다음 뉴스펀딩 페이지, 교보문고)을 열어 독자들과 글쓰기와 관련한 여러 고민들을 나눈 적 있다. 출판사가 그 글들을 버리기 아깝다고 해 건질 수 있는 부분은 건지고, 새로 쓸 수 있는 부분은 새로 쓰면 괜찮겠다 싶었다.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활발하게 표현하고 있는 지금,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약간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글쓰기가 직업이 아닌 사람들도 글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시대이기에 표현의 기술이 더욱 필요하다.

-<표현의 기술> 1장 ‘왜 쓰는가’에서 선생님이 글을 쓰는 목적은 ‘여론 형성’이라고 말했다. 생각과 감정을 남들이 이해하고 공감해 사람들과 함께 옳은 일을 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해설한 책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유시민 지음, 돌베개 펴냄)이 떠올랐다.

=글을 쓴 사람이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다는 욕망을 투사해 쓴 글인지 아닌지는 글을 보면 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썼다고 해서 세상이 꼭 그렇게 변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목적이 없는 글이라고 해서 가치가 없는 건 또 아니다.

-책을 쓰기 전, 대화록 전문을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2012년 10월8일,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정문헌 의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존재한다”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NLL(서해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편집자).

=되게 재미있었다. 당시 보도된 기사만 접했던 까닭에 남북 정상이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되게 궁금했었는데, 텍스트(대화록 전문)를 들여다보니 노 전 대통령의 화법, 표정, 억양, 몸짓이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발언이 실제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록의 많은 내용들이 제대로 분석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언론을 지켜봤는데,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매체나 기자도 텍스트 전체를 분석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얘기한 대로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서 노 전 대통령 발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NLL을 포기했다’는 부문만 자극적으로 보도했었다.

=놀랐던 건 텍스트 전문이 공개됐는데 아무도 그것을 분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텍스트(NLL 포기 발언)만 딱 떼낸 뒤 콘텍스트(전후 문맥) 없이 보도했다. 이것은 반지성주의다. 50년 전 있었던 희귀문서들은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않나. 불과 몇년 전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록이 공개된 날부터 한달 반 정도 텍스트를 분석한 뒤 써내려간 책이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이었다.

-다시 <표현의 기술> 얘기로 돌아오면 기자로서, 출판사에 넘기기 직전까지 퇴고한다는 대목도 재미있었다. 글 쓰는 사람마다 퇴고 노하우가 제각각인데, 선생님의 퇴고 방식이 궁금하다.

=글은 만지면 만질수록 좋아진다. 퇴고가 거듭될수록 문장에 콘텐츠가 많아지고, 밀도도 높아진다. 글을 만지다가 지겨워서 더이상 못하겠다 싶을 때 출판사에 넘긴다.

-현재 출연 중인 <썰전>에 대한 질문도 하고 싶다. 작가 전업을 선언한 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썰전> 출연은 책을 쓰는 동기와 똑같다. 책을 쓰는 데 두 가지 동기가 있다. 하나는 책을 통해 중요한 정보와 그 정보를 둘러싼 해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 뒤, 사람들의 생각을 달라지게 하는 게 목적이다. 생각이 달라져야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지니까. <썰전>도 마찬가지다. 방송에 나가 어떤 이슈에 대한 정보, 이론, 해석, 시각을 시청자들과 나누면 시청자들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가진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책을 쓰는 것과 비슷한 효과다. 또 하나는 밥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나. <썰전>에 출연하면 돈을 준다. 이 프로그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여기 하나만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는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출연료를 주는 것 같아 출연하기로 했다.

-방송 녹화일이 매주 월요일이라고 들었다. 준비는 어떻게 하나.

=평소 이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여겨본다. <썰전>은 큰 이슈를 다루니까 자연스럽게 메인 기사부터 읽는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되면 작가가 방송에서 다루어야 할 이슈들을 알려준다. 이런 뉴스는 좀 아닌 것 같다, 이런 이슈도 있지 않나 의견을 내기도 한다. 일요일 낮에 대본 형식으로 정리된 이슈와 그 이슈와 관련된 기사를 받아 방송을 준비한다. 취재도 하는 것 같다고? 그 정도는 해야… 안 그러면 재미가 없다. 언론에서 다루는 수준보다 깊이 들어가려고 한다.

-지난 5월26일 방영된 <썰전>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인식 개선이 우선”이라고 얘기한 게 인상적이었다.

=강남역에서 살인을 저지른 젊은 남자가 살인 동기로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남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식당에서 여자 손님만 그를 무시했겠나. 남자 손님도 있었을 것 아닌가. 자신을 무시한 남자 손님에게는 왜 복수하지 않았나.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존재인 까닭에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자신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농업혁명이 일어난 뒤로 지금까지 양성 사회에서 불평등한 관계가 지속돼오고 있다. 이번 사건은 한국에서 아무리 못난 남자도 여자에 대해서는 ‘아니, 여자가 나를 무시해?’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게 가부장 문화다. 그러니 ‘미친놈의 소행’이라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해보자는 뜻으로 한 얘기다.

-방송을 함께하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와 티격태격,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람이라는 게 자주 보면 정도 생기고, 그게 또 당연한 거 아니겠나. (웃음) 이 방송에서 전 변호사와 나는 우파이상주의자와 좌파리버럴이 대화를 나누는 조합이 되어버렸는데, 그걸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현재 신간 준비 때문에 유럽을 여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어떤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나.

=어떤 나라는 안 가고, 어떤 도시에만 간다. 프랑스가 아닌 파리로, 터키가 아닌 이스탄불에 간다는 얘기다. 보통 도시는 국가의 영토에 속해 있지만, 어떤 도시는 그 도시가 속한 국가와 안 어울리는 경우도 많다. 아테네는 현대 그리스와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

-질문을 다시 하겠다. 지금까지 어떤 도시를 돌아다녔나.

=아테네와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터키의 영토이고, 도시지만 터키보다 훨씬 크다. 도시 기행기를 쓰는 이유는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관련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호모사피엔스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내가 가고 싶은 도시에 간다. 도시 선정도 내 마음대로 했다.

-앞으로 어떤 도시를 찾을 계획인가.

=빈, 부다페스트, 로마, 베네치아, 파리, 이르쿠츠크 순으로 갈 계획이다.

-유럽 도시 기행이라 그보다 더 많은 도시를 돌아다닐 줄 알았다.

=돌아다니기만 하면 책은 언제 쓰나. (웃음) 가기 전에 조사 연구하고, 가서 보고 느끼고 돌아와 정리하면 석달에 두 도시 소화하기도 쉽지 않다.

<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만화 / 생각의 길 펴냄

정훈이가 그린 만화는 유시민의 글을 보완해주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1장 ‘왜 쓰는가’에서 유시민이 자신의 글쓰기를 정치적 글쓰기라고 표현했다면, 정훈이는 만화를 왜 그리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자서전 <나는 어쩌다가 만화가가 되었나>를 실었다. 그의 일대기는 웃음을 빵빵 터트리다가도 눈물샘을 짜낸다. 유시민은 그의 자서전 중에서도 “삼수 끝에 대학 입시에 또 떨어진 정훈이가 울다가 만화 <시티헌터>를 보고 웃는 장면을 최고”로 꼽으며 “무언가에 몰입하면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아픔을 잊을 수 있는 거구나.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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