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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혼자서 치른 마이클 치미노 추모 회고전
박수민(영화감독) 2016-07-19

<대도적>에서 <선체이서>까지

머지않은 장래에 예술이란 개념은 중2병의 하위 장르가 될지 모르겠다. 1% 귀족들 외에 모두 개돼지일 뿐인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어쩌고 하며 고민하는 걸 들켰다간 현실 인식이 매우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는다. 완전무결한 예술이란, 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그 일기장을 불에 태운 다음 내가 뭔가를 썼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자신은 지킬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 창밖의 미친 세계와 매정한 타인으로부터. 그러나 야망을 가진 인간은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계로 나가고야 만다. 겨우 글을 쓸 줄 안다는 한줌의 재능만을 가지고서, 인간은 과연 세계의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재능에 문학적 감성과 회화적 감각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성격에 완벽함에 대한 강박까지 있다면? 영화를 택해 감독을 꿈꾸어볼 것. 그것은 능히 한 기업을, 한 사업을 망하게 할 수 있다. 내 일기장이 아니라 남의 돈을 불태울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예수가 되는 일은 아주 쉽다. 실패하여 조롱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된다. 작금의 영화감독들은 트위터와 댓글을 모조리 읽으며 노잼과 폭망 사이 별이 다섯개인 것은 자신의 영혼이 아니라 돌침대뿐임을 안다. 죽거나 망하지 않고 살기엔 사실 힘든 직업. 실패의 대선배, 마이클 치미노가 지난 7월2일 세상을 떠났다. 7월2일은 또한 헤밍웨이가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 불길한 날짜다.

<대도적>

<대도적>, 치미노 세계의 정수를 담은 데뷔작

치미노의 데뷔작 <대도적>(1974)은 교회에서 시작한다. 목사가 설교 중에 이사야서의 구절을 읊는다. “늑대와 양이 같이 뛰놀고, 맹수와 아이가 함께 누우리라.” 열린 교회 문으로 괴한이 들어와 설교단의 목사를 향해 기관총을 내갈긴다. 목사가 급히 교회 뒷문으로 도망치면, 광활하게 펼쳐진 갈대밭 위로 이어지는 기이한 추격전. 지평선 저편에서 방금 차를 훔친 청년이 나타나 이들과 벼락치듯 조우한다. 한국전 참전 용사에 프로페셔널 범죄자였던 가짜 목사 썬더볼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근본 모를 떠돌이 좀도둑 라이트풋(제프 브리지스)과 그렇게 친구가 된다. 이미 대스타이자 자신의 영화사를 세우고 권력을 가졌던 이스트우드는 전에 한번 같이 일해본 풋내기 각본가의 쓸 만한 재능과 만만찮은 고집을 알아보고서 치미노의 첫 장편 연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제프 브리지스의 모습에 자꾸만 치미노가 겹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히 나와 독대하고 같이 일을 하기엔 10년은 이른 애송이가 자신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둥 까불거리는 것이다. 아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막내 아우나 사촌동생뻘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이 세상 모르고 잘나서 떠드는 꼴을 보고 있으면, 선배 남성들은 한두방 쥐어패서 닥치게 해주고픈 기분을 숨기지 못한다. 한번 턴 은행을 똑같은 방법으로 또 털자는 라이트풋의 아이디어를 썬더볼트가 받아주면서, 한 무리 늑대들은 이 길 잃은 어린 양과 팀이 된다. 하지만 레드(조지 케네디)는 라이트풋 녀석을 언젠가 꼭 손봐주리라 잔뜩 벼른다.

<대도적>에는 치미노의 뒤이은 영화들의 이면에 층층이 쌓일 어떤 요소들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리에서 가장 강한 탓에 고독한, 그래서 오만하고 독선적인 남자가 있고 그와 애매한 우정을 나누는, 겉으론 세상에 평범하게 물들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면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를 유약함을 지닌 다른 남자가 있다. 그 둘을 잇는 고리, 혹은 지켜보는 시선은 늙어가는 남자의 늙는 기분이다. 그는 그 기분이 싫어서 젊어지려 하고 홀로 극단적으로 완벽해지려 한다. 아니면 설마 나도 세상과 타협할 수 있지 않을까 못 이기는 척 기회를 엿본다. 그러니까, 애초에 하나였던 자아와 욕망이다. 그 결과 치미노가 선택하는 것은 철저한 실패의 세계다. <디어 헌터>(1978)에서 마이클(로버트 드니로)은 친구 닉(크리스토퍼 워컨)에게 나머지 얼간이들은 상관없고 사슴 사냥을 너하고만 가고 싶다고 말한다. 다들 결혼하고 여자를 만나 춤을 추는데 마이클은 구석에서 혼자 술만 퍼마시며 늑대왕의 하늘이니, 사슴을 쏠 땐 두방은 겁쟁이니까 한방에 쏴죽여야 한다는 둥 딴 세상 얘기만 한다. 닉의 두려움은, 마이클의 말을 자신은 알아듣는 것 같은 거다. 그래서 마이클에게 말한다. “네가 뭐라건 난 우라질 이 동네가 좋으니까, 날 거기(베트남) 남겨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러나 마이클은 닉을 거기 내버려두고 혼자 돌아온다. 입대 전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닉의 여자인 린다(메릴 스트립)에게 느닷없이 시도했던 입맞춤을, 닉이 없는 동안 못 이긴 척해낸다. 인간적인 욕망은 남들의 것인 양 홀로 고고하려 했지만 실은 꼭꼭 숨긴 내면이 온통 분열되어 있는 이 남자는 한방이건 두방이건 이제 자신이 사슴을 쏠 수 없음을 깨닫는 지점에서야 뒤늦게 사랑하는 친구를 찾으러 떠난다. 그래서 그 결과는 영화 사상 가장 서글픈 장례식 뒤풀이다. 문제는 이 개인적인 영화로 치미노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을 성공과 명성과 기회에 너무 일찍 도달해버린 것이다.

치미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정착하려 노력하는 길 잃은 자들이다. 애초에 근본이 이 땅의 주류와는 다른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꾼다. 부모나 가족이 제대로 없는 대신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 자신이 강하기에 타인에게 제의 가능한 이 수평적 관계는 그러나 오히려 수직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의 홀로 강함은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강함을 강요하는 꼴이 된다. 누구도 그만큼은 강하지 않기에 비극이 발생한다. <디어 헌터>의 삼각관계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을 <천국의 문>(1980)에선 피아(彼我) 양쪽에서 고용된 두 남자- 보안관 제임스(크리스 크리스토퍼슨)와 총잡이 네이트(크리스토퍼 워컨)- 사이 창녀 엘라(이자벨 위페르)를 통해 관계의 중심으로 드러내놓고, 이 땅에서 이민자들을 몰아내려는 지배층과 버티려는 피지배계층간의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욕망을 역사적 사실의 대서사시적 재현으로 그리려던 치미노의 야심은, 안타깝게도 프로젝트의 외양이 결과물의 내용을 짓누르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스크린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려는 욕망이 하려는 이야기의 본질을 역전한 것이다. “당신은 부자이고 가문도 좋지만 가난한 척하려 하죠.” 극중 하버드 출신의 제임스가 보여주는 위선과 당착처럼, 치미노는 사실 자신이 제임스보다는 신문지로 벽지를 바른 아주 작은 집 한채를 가지려 했던 무지렁이 네이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거나 끝내 잊으려 한 것 같다. 전작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귀족이 되었던 그는 타인의 존경(respect)이 아니라 경외감(awe)을 원했다. 영화 자체를 뛰어넘은 야망,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절대로 망치 지 않겠다는 강박은 그의 독선과 아집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참혹한 결과가 나오자, 업계는 이 땅딸막한 이탈리아 놈을 왕위에서 끌어내렸다.

편협함을 드러내다

이후 이 이민자의 후손은 미국에 사는 자신의 편협함을 에둘러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인종차별적인 소재와 문제의식을 자극적인 톤으로 적나라하게 그린 <이어 오브 드래곤>(1985)은 지금 와서 다시 보면 거의 <블레이드 러너>처럼 보인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폴란드계 백인 형사 스탠리(미키 루크)는 차이나타운을 지배 하려는 야망을 가진 중국계 이민자 조이(존 론)에 대해 거의 망상과 집착에 가까운 의심을 품고 그를 추적한다. 2.35:1 사이즈로 대자연과 서사시를 그리는 데 능했던 치미노는 이 현대극에서도 세트를 지어 차이나타운 너머로 보이는 뉴욕의 주요 건축물들을 마치 모뉴먼트 밸리처럼 프레임에 걸리게끔 만든다. 두 남자의 최후 격돌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욕망과 감정과 이유가 충분히 공평하게 쌓이지 못하는 흠은 있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환상적인 비주얼을 만나 치미노의 건재함을 증명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업계의 비평은 그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아주 노골적인 스탠스를 취한 걸로 보았던 모양이다. 사실 치미노의 영화는 항상 선정적인 소재와 표현을 일관되게 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시간은 인간을 늙게 만들고, 부당하게 느껴진 대우와 상처 입은 자존심은 작가를 지치게 만든다. 올리버 스톤과 같이 쓴 각본의 대사로 “난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를 쫓고 있어. 멈춰야해”라고 말하는 건 미키 루크가 아니라 이제 지치기 시작할 치미노 자신처럼 느껴진다.

꿈꾸는 프로젝트를 추진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려는 것인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했지만 공사 도중 물러나 그 준공을 끝내 보지 못했던 건축가 예른 웃손의 실화와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의 조건>을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지만, 끝내 얘기로만 남았다. 대신 치미노는 자신의 근본, 이탈리아와 마주한다. 마리오 푸조가 <대부>의 속편이자 외전 격으로, 시칠리아의 실존 의적 살바토레 줄리아노에 대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실리안>(1987)이다. 귀족과 교회와 정부와 마피아가 지배하는 1930년대 시칠리아에서 소작농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려던 산적 줄리아노의 거짓말 같은 실화는 아버지와 형들이 벌인 가족 사업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콜레오네 가문의 그럴듯한 픽션보다 더 위대한 서사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중·후반에 이르면서 2시간 러닝타임을 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몰아가며 안타까울 정도로 만듦새를 포기한다. 많은 미덕이 분명 있었지만 음악은 과도하게 쓰였고, 크리스토퍼 램버트는 줄리아노 역할에 역부족이었다. <대부> 흉내를 내려다 실패했다는 비아냥이 뒤따랐고, 이어서 1955년 토니상을 받았던 브로드웨이 희곡을 그해 윌리엄 와일러가 험프리 보가트와 만든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광란의 시간>(1990)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처럼 보였다. 미키 루크가 앤서니 홉킨스의 가족을 붙잡고서 벌이는 인질극이 어째서? 치미노가 그의 인장과도 같은 2.35:1의 캔버스를 처음으로 포기하고 만든 이 실내극은 집 밖에서 대자연을 배경으로 할 때만 없던 생기가 돌고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오면 이상하게도 힘이 빠진다. 마치 분풀이하듯, 집 밖으로 나온 자들에겐 필요 이상의 피범벅 총기 난사가 내려졌고, 흥행은 실패했다. 이 작품이 극장에 걸린 그의 마지막 메이저 영화였다.

<디어 헌터>

그의 세계가 멈추었다

결국 그의 마지막 장편영화가 된 <선체이서>(1996)는 비디오로 직행했고,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에서 만든 단편을 제외하고 치미노의 필모그래피는 여기서 멈췄다. 하지만 <선체이서>는 치미노의 영화 세계를 집대성하고 결국 그가 도달한 어느 지점을 가늠하게 하기에 중요하고 소중한 영화다. 감독에게 있어 첫 영화는 그의 본질이며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선천적인 기질에 대한 두려움이자 위장이고, 마지막 영화는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나아가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하여 결국 되돌아온 지점일지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이 영화는 <대도적>에서 시작한 여정을 마침내 마무리하는 거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대도적>에서 맹수들과 함께 누웠던 아이, 라이트풋이 당한 일은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도록 처참하게 두들겨맞는 것이었다. 썬더볼트는 어린 시체를 옆에 싣고서 자신의 감정을 선글라스로 가린 채 목적지가 없는 도로를 말없이 달렸다. 이제 <선체이서>에서, 인질이었던 의사는 코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이자 제 머리에 총을 겨누던 탈주자인 소년을 옆에 태우고 그가 믿는 신성한 산과 마법의 호수를 찾아 달린다. 이제 카메라의 포커스가 나가도 그 순간 우디 해럴슨의 감정이 좋으니 테이크를 다시 가지 않는 감독은 이 영적(靈的)인 영화에서 마침내 세상을, 그래서 자신을 용서한다. <천국의 문>에서 “남자란 끝내지도 못할 일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고 대사를 쓰고 말하게 했던 치미노가 <선체이서>의 엔딩 크레딧에서 들려준 노래는 에스더 필립스가 부르는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다. 나는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이 어리석은 글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위대한 영화감독이여, 이제 영원히 꿈 없는 잠 주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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