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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곡성>이 보여준 '현실의 조건'
윤웅원(건축가) 2016-08-30

피나 바우슈의 세계 도시 연작 작업 중 2005년 서울을 주제로 한 공연 <러프 컷>.

“나는 인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보다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 -피나 바우슈

나에게 <곡성>(2016)은 몸짓으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일본인 외지인(구니무라 준)이 네발로 기어가는 행동, 무명(천우희)이 종구(곽도원)에게 돌 던지는 모습, 효진(김환희)의 악몽으로 뒤틀린 몸짓, 종구의 가위 들린 몸의 움직임, 좀비(?)가 나타났을 때의 떼 소동, 일광(황정민)의 구토 장면 등 많은 인상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엑소시스트> 같은 귀신 들림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몸짓들이 불가능한 몸의 형태를 통해서 공포감을 일으키고 있다면, <곡성>의 몸짓은 일상적일 수도 있는 몸의 움직임을 이야기 안에 배치하여, 영화를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곡성>의 인상은 무용 공연에서 받은 느낌을 닮아 있다. 서사 구조보다는 인상적인 몸짓들의 연속, 행동들의 콜라주 같은 느낌이 먼저 다가오고, 동시에 전체를 무언가 쉽게 잡히지 않는 덩어리로 느끼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놀라운 연기들과 잘 만든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가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

독일의 현대 안무가 피나 바우슈는 세계의 여러 도시를 주제로 한 연작 작업의 일환으로, 2005년 LG아트센터에서 서울을 주제로 한 <러프 컷>이란 제목의 공연을 올렸다. 피터 팝스트가 디자인한 <러프 컷> 무대의 한쪽에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암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암벽의 역할은 단순히 시각적인 효과에만 있지 않다. 공연 도중 장비를 잘 갖추어 입은 등반가들이 나타나서, 무용수들의 무용과 상관없이 암벽 타기를 진행한다. 이것은 관계없는 두 요소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낮섦과 함께 우리가 갖고 있는 ‘원칙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팝스트는 한 인터뷰에서 피나 바우슈와의 오랜 무대작업을 ‘현실의 한 조건’(a condition of reality)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으로 설명했다. 고전발레 혹은 현대 무용에서처럼 전통적인 동작들을 답습하기보다 일상적인 몸짓을 통해서 그 안에 내재된 감정을 보여주는 피나 바우슈의 무용에는 ‘현실의 조건’을 드러내는 무대가 어울린다고 그는 말한다.

가편집이라 뜻의 러프 컷(rough cut)은 영화에서 필름을 단어의 의미 그대로 거칠게 혹은 대범하게 짜깁기한 상태를 의미한다.

순수 종교영화는 현대인에게 어려운 장르이다. 일반화될 수는 없겠지만 현대의 합리성으로 교육받은 나는 종교적인 감정을 알지 못한다. 어릴 때 선물을 받기 위해 갔던 주일학교와 중•고등학교 종교 수업 시간의 지겨움, 어머니 방에서 들려오던 불경 낭독의 기괴함만이 내가 종교를 접한 기회이다. 오랫동안 정제된 형식, 형식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으로까지 발전된 종교에 대한 경험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우리나라에서 정제된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는 기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다. 깊은 숲이 주는 두려움, 바닷속을 보았을 때, 불 꺼진 시골 마을을 보았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이다.

시골 마을의 특징 중 하나는 막다른 골목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에서 분화된 마을 길들은 마을 주변의 산이나 숲을 만나 더이상 연장되지 못하고 끝이 난다. 막다른 골목은 도로라는 공공적인 영역이 골목에 접하는 집들에 의해 배타적 이용이 가능한 공간이다. 들어오는 길이 하나라면 마을 전체가 일종의 커다란 막다른 골목이다. 또 다른 특징, 시골 마을에는 지적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길들이 자주 존재한다. 농로로 사용하기 위해서 시간을 갖고 만들어진 길들은 지적도라는 시스템을 비껴서 현실에 존재한다. <곡성>에서 살인이 벌어진 집들은 막다른 골목에 면해 있거나 숲에 면해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산속 깊은 장소, 외지인 일본인의 집은 지적도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의 원인은 찾아지지 않고

<곡성>은 살인사건들이 시골 마을에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이야기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살인자들은 쉽게 잡히거나 발견되지만, 살인의 동기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영화를 진행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영화에서 살인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살인사건 자체는 인간이 살고 있는 어느 장소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곡성>의 살인은 유행처럼, 짧은 기간 제한된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것과 살인자들의 몸에 두드러기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살인은 언제나 원초적인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살인의 추억>(2003) 같은 연쇄살인에 관한 영화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살인자를 찾는 것에 실패한다면, <곡성>은 어디에도 없는 원인을 찾는 데 실패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중반부에, 종구의 딸 효진이 TV를 보는데 짧게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유명해진 대사 “모가 중헌디”를 효진이 종구에게 외치는 장면이다. 영화 속 TV에나오는 <동물의 왕국> 장면은 이제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효진의 대사 “모가 중헌디”와 합쳐져서 나에게 공명한다. 효진의 외침이, 종구가 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기보다는 세상에는 중한 것이 없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인간의 일도 동물세계와 같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암시로 보였다. 모든 것은 그저 수 많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 ‘해석 놀이’에 동참해 본다면, 영화 속 살인사건들은 일종의 집단적인 유행, 베르테르 효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연쇄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다르게 믿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광과 무명과 종구는 각자 자기가 바라본 다른 세계 안에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 해석일 뿐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 살인현장 오랑우탄의 소리를 들은 증인들은 살인 용의자가 이탈리아어, 영국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 저마다 자신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쓰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곡성>을 보고 나서 서사의 충돌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인사건의 이유를 귀신 들림 혹은 악마의 힘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논리적일 수 있는가? 현대인에게 악마의 존재와 현실의 만남이 정돈된 논리로 끝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곡성>이 보여준 혼돈스러움이 바로 ‘현실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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