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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단념의 정조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가 영화적 호흡을 쌓아가는 법
김영진(영화평론가) 사진 최성열 2016-08-3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홈드라마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감동을 준다. 이 장르에서 그가 만든 최고작 <걸어도 걸어도>(2008)의 성취에 못 미친다 해도 상관없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태풍이 지나가고>는 두 가지 점에서 슬픈 여운을 남기는데, 첫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홈드라마가 늘 그렇듯이 죽음과 이별을 포함하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단호한 체념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에선 가장 친절하게 관객에게 설명하려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화법은 이미 충분히 친절한데도 그는 점점 관객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로 가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이는 더 많은 관객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관객이 줄어드는걸 원하지 않는 연출의 방어심리인 것 같아 슬프다. 묘하게도 이는 영화 속 기키 기린이 연기하는 할머니 요시코가 아들과 딸, 며느리에게 줄곧 중언부언하며 잔소리를 하는 상황과 겹쳐 다가온다. 상황을 돌이킬 수 없지만 그게 안타까워 말을 보태다가도 에잇,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인 것이다.

대안의 삶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아버지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집 안 어딘가에 숨겨둔 비상금을 훔치거나 집 안 물건을 저당잡히며 살았던 아버지의 삶은 한때 문학상을 받았던 소설가지만 흥신소에서 부업일로 연명하는 료타에게 대물림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료타는 이혼한 아내와 아들에게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도 못하며 어쩌다 생기는 돈은 경륜과 복권으로 탕진한다. 영화 초반에 그가 아버지 장례식 직후 어머니의 낡은 연립주택을 찾아와 하는 것은 아버지의 값나가는 유품을 뒤지는 일이다. 료타의 어머니는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하지만 료타는 셋슈 작가의 진귀한 족자를 찾아 전당포에 맡겨 돈을 벌 생각이다. 그 족자는 상자만 진품인 모조품이었다.

료타의 행동은 아버지를 꼭 닮았기 때문에 가족에게 쉽게 들통난다. 어머니는 거짓말을 할 때면 세번 반복하는 료타의 습관을 지적하고 료타의 누나도 료타가 벽장 속에 어머니가 숨긴 돈봉투를 찾아내려 할때 미리 바꿔치기해놓고 약 올리는 메모를 남겨놓을 만큼 료타의 행동을 꿰뚫고 있다. 요컨대 료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실패자이며 도둑이고 거짓말쟁이다. 아버지를 닮지 않기 위해 공무원이 되려고 했던 그가 이렇게 된 건 인생의 행운을 바라며 도박에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복권에 매달리는 자신을 힐난하는 이혼한 아내에게 자신은 꿈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수문학이 대접받지 못하는 세태를 한탄하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속물적으로 산다. 흥신소에 의뢰 들어온 일들 가운데 불륜 현장을 포착한 것을 미끼로 협잡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삶을 되돌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도약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료타는 아들 싱고(요시자와 다이요)에게 무능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의 아들 싱고도 아버지 료타를 닮아 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싱고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칭찬받은 글재주를 할머니가 칭찬하자 이 아이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할머니가 아빠를 닮기 싫으냐고 묻자 이 아이는 “엄마는 아빠가 싫어서 헤어졌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러곤 아빠가 사준 복권이 당첨되면 커다란 집을 짓고 가족이 다시 모여 살자고 말한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할머니는 기뻐하지만 이 아이의 천진난만한 꿈이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건 싱고 그 아이 자신도 알고 있다. 싱고는 어느새 아버지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심하게 야구에서 홈런보다는 포볼로 진루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포볼로 진루하는 데 계속 실패하면 이 아이는 홈런을 노려 계속 헛스윙을 남발하며 한방을 기대하는 삶을 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삶을 되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다소 침울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대안의 삶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든 그들의 삶에 어떤 극적 전환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이 살아왔던 궤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바꾸기가 힘들고 오직 필요한 것은 단호한 체념에 따른 긍정뿐이다. 영화는 이에 관한 다소 과도한 대사들을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주입한다. 흥신소 소장은 료타에게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져야 남자는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충고하고 료타의 어머니는 료타에게 ‘행복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런 말들은 근사하지만 너무 직접적인 문어체라서 주제를 굳이 확인시키는 보완물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이런 부연설명은 좋은 영화가 될 수 없게 하는 독이다. 그런데도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이 말들은 아슬아슬하게 상투형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견고한 영화적 호흡 덕분이다. 등장인물들이 이 말을 하는 전후 화면 맥락에서 고레에다의 연출은 쉼표를 거듭 찍으며 실내 공간의 아우라를 살리는 마법을 부린다.

<태풍이 지나가고>

음식을 만드는 시간, 음식을 먹는 시간

태풍이 휘몰아치는 밤, 료타와 료타의 전 아내, 료타의 아들 싱고는 료타 어머니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일요일 오전에 싱고를 만났던 료타는 친할머니를 보고 싶다는 싱고의 청을 받아들여 어머니의 집에 왔고 싱고를 데리러 온 료타의 아내 쿄코(마키 요코)도 태풍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이전 시어머니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들이 동상이몽으로 하룻밤을 보내는 이 대목이 <태풍이 지나가고>의 클라이맥스인데, 낡고 오래된 좁은 연립주택 내부에서 능숙하게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잡는 고레에다의 연출은 관객에게 최적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어머니가 카레 국수를 만들고 쿄코와 싱고가 그걸 거드는 사이 료타는 실없는 말을 이어가면서 모처럼 예전과 같은 가족적 분위기를 만끽하려 하는데 물론 상황은 자연스럽지 않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료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그걸 듣는 쿄코는 살짝 불편하다. 어머니와 쿄코의 대화 사이에 료타가 끼어들려 하면 대사가 중첩되면서 료타의 말들이 묻히는 가운데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우리는 잘 안무된 프레임 안에서 관찰하게 된다. 수선스럽게 활기를 과장하는 료타의 어머니와 료타에 비해 쿄코는 차분하다. 일찍 성숙한 싱고는 그런 어른들의 상태를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카레 국수를 먹는 과정에서 진행된다는 게 중요하다. 정성스럽게 카레 국수를 만드는 과정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붙잡고 있는 과거의 결속에 대한 그리움을 대체하는 이미지다. 함께 준비하고 먹는다는 것은 가족이 하는 가장 흔한 일이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먹으면서 그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 기분을 현재에 불러오고 그 느낌으로 미래를 준비한다. 이 가족에게는 그 기회가 실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도 료타의 어머니와 료타는 안타깝게 그걸 되살리고 붙잡으려 한다. 쿄코는 그게 불편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료타가 잘되고 그럴 리는 절대 없더라도 료타가 정신 차리고 유능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료타가 목욕을 하고 쿄코와 싱고가 거실에서 게임을 하며 료타의 어머니가 가계부를 정리하는 무언의 장면들이 흐를 때 화면 바깥에선 태풍이 임박해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이들이 시연하는 일상의 절차들은 그 바람 소리만큼 위태로운데 이들은 각자 다른 마음을 품은 채로 겉으로는 과거에 늘 함께했던 일상의 순간을 예외적으로 드물게 현재에 시연한다.

이제 이 영화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황이 나온다. 싱고가 목욕을 하는 동안 료타와 쿄코는 방 안에서 잠시 속내를 나눈다. 료타는 쿄코가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에 대해 질투를 숨기지 못하고 쿄코는 양육비도 보내주지 못하는 료타의 바뀐 것 없는 무능을 타박하며 그 대화를 종료한다. 그들의 대화가 끊길 때 거실에선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틈에 바깥의 바람 소리가 화면으로 치고 들어온다. 잠시 예전의 일상적 공기를 억지로나마 나눴던 료타와 쿄코의 위장된 따뜻함은 사라져버리고 이들의 대화는 양육비를 언제 줄 거냐는 쿄코의 냉랭한 말로 끝난다. 어른은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쿄코의 말에 반응하듯 이어지는 장면에서 료타는 어머니가 잠든 틈을 타 벽장을 뒤져 스타킹에 말아놓은 돈봉투를 찾아내려 애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봉투에는 쓸모없는 마분지 조각만 들어 있고 료타의 도둑질을 예견한 누나의 조롱하는 메모만이 적혀 있다.

가정의 원상회복을 원했던 료타의 마음은 절실했어도 그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고 그는 자기 본성대로 도둑질을 한다. 그는 도둑질마저 실패한다. 화면은 그때 예기치 않은 전환점으로 넘어간다. 어머니의 비상금을 훔치려다 실패한 료타는 아버지를 기리는 향을 켜고 타다 재가 되어버린 향초들을 모아 신문지에 펼쳐놓고 심지를 고른다. 양립할 수 없는 행동을 대사 없이 자연스레 이어나가는 이 장면의 묘사는 여러 면들이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료타는 무능하고 나쁜 아들이자 가장일 수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를 자기식으로 애도하는 선한 아들로서의 행동을 동시에 한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이런 식으로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에서 잔상을 남기는 상황을 곧잘 묘사한다. 예를 들면 영화에는 이야기의 진행과 상관없이 배치된 이런 장면들이 있다. 료타의 어머니가 칼피스 음료를 컵에 조금 담고 나머지는 물로 채워 자기식의 아이스크림을 만든 다음, 화분에 줄 물을 페트병에 담는 것을 보여준 후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걸 평범한 롱숏으로 담아낼 때 이 일상의 사소하고 평화로운 순간들은 곧 닥칠 태풍으로 사방 사물이 흔들리는 풍경에 압도당한다. 앞과 뒤가 급격하게 달라져도 그게 가능할 수 있는 게 우리 일상이고 지속적인 삶이며 그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 감흥은 길게 이어지는 대사들로 곧잘 깨진다. 료타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했던 행동, 도둑질하는 자식과 아버지를 추모하는 자식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같은 순간에 시연했던 그 감흥은 그 상황을 목격한 료타의 어머니가 “저 향이 아버지라고 생각했지?”라고 굳이 부연 설명할 때 단단했던 질감이 살짝 깨지는 실망감을 준다. 이 장면에서 어머니가 하는 말들은 영화의 주제를 직설로 친절하게 풀어낸다.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40년이나 살 줄 몰랐다는 어머니의 한탄은 남편과 아들의 무능에 대한 간접적인 힐난임과 동시에 이미 살아낸 삶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며 그럼에도 그 집에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 삶에 대한 미련을 토로한다. 꿈에 나타난 죽은 남편을 거론하며 “네 아버지도 나도 늘 살아 있네, 이렇게 생각하지”라고 말하는 료타의 어머니는 삶의 물질적인 윤기를 체념한 가운데서도 불멸을 바라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행복 운운하는 말들은 굳어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등려군의 노래를 들으며 료타의 어머니가 주절거리는 말들은 어떤 경지에 이른 단념을 표시하기 때문에 생생하다. ‘깊이, 바다보다 더 깊이, 푸르게, 하늘보다 더 푸르게’라는 등려군 노래의 후렴구를 놓고 료타의 어머니는 말한다. “난 바다보다 더 깊이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평생 한번도 없었어.… 없을 거야 보통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그런 적 없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런 매일매일을. 그것도 즐겁게.”

예기치 않게 속깊은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주제를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만 앞서 꾸준히 쌓아두었던 영화적 호흡 덕분에 가까스로 훼손되지 않고 그 준엄하고 슬프고 약간은 행복한 느낌을 화면에 남겨둔다. 료타가 자신의 아버지와 그랬던 것처럼 싱고를 데리고 태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놀이터 미끄럼틀 속에 들어가 과자를 먹으며 놀다가 그들을 찾으러온 쿄코와 함께 놀이터 근처에서 잃어버린 싱고의 복권을 찾는 그 이후의 장면은 시각적으로 그리 인상적이진 않아도 이 영화의 지향점을 완곡하게 드러낸다. 료타와 쿄코와 싱고는 당첨되면 큰 집을 사겠다는 싱고의 염원을 담은 그 복권들을 다 찾아내지는 못한다. 놀이터에서 잃어버린 복권을 찾는 가족의 이미지는 미련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따뜻해 보인다. 앞서 기키 기린이 능숙하게 연기한 료타 어머니의 단념을 담은 행복의 이상에 관한 말을 우리가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인생의 행운은 앞으로도 주어지기 힘들 것이고 개별 인간들의 진화도 이뤄질 리 없을 것이며 남은 것은 대개 상실과 이별뿐일진대 그렇더라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그것도 태연하게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념의 정조는 이 분야의 거장인 오즈 야스지로의 홈드라마와 통하는 게 있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

물질적 흔적들의 이미지

영화의 끝, 료타의 어머니는 남편의 셔츠를 찾아내 료타에게 입힌다. 아버지의 유품은 다 버린 게 아니었느냐는 료타의 물음에 어머니는 깜빡하고 잊어버린 게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단념과 애도를 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있으나 동시에 다 버릴 수 없는 과거의 흔적, 현재에 이어지는 과거의 느낌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도 암시한다. 이는 료타가 아무 생각 없이 집어들고 나왔던 아버지의 벼루가 상상 이상으로 귀한 고가품이라는 걸 전당포에서 확인하는 장면에서도 되풀이된다. 그 벼루는 흔한 게 아니었으며 버려지지 않고 집 안에 남아 있었다. 버려지고 단념한다 해도 들러붙어 있는 것들을 껴안으며 굳이 재수가 좋지 않더라도 작은 크기의 삶의 행복들을 즐기는 것이라는 언명은 상투적일 수 있으나 그것들의 귀함을 일깨우는 이 영화의 물질적 흔적들의 이미지는 역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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