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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참담한 빛>
김수빈 사진 백종헌 2016-09-20

<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펴냄

청춘은 몇몇의 얼굴로 기억된다. 백수린의 두 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에는 그 얼굴들을 자꾸만 돌이켜보는 인물들이 나온다. <짝사랑>의 주인공 ‘나’는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의 만남을 앞두고 원피스를 장만하기 위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하는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J선배와의 기억들을 곱씹는다. “여전히 기특하구나. 술집의 소음은 물 밖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고, 선배의 그 말 한마디가 또렷이 귓가에 울렸다. 나는 정말 기특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었다. 열심히 해라. 나는 정말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스트로베리 필드>의 ‘준’은 유학 시절 추억이 녹아 있는 런던 곳곳을 여행하며 ‘주드’의 고백을 되새긴다. “주드를 향해 품었던 감정, 나를 매일같이 달뜨게 하고, 숨 쉴 수 없게 하고, 비참하게 하던 감정 역시 가뭇없이 사라져 나의 일상은 바람 빠진 색색의 고무공처럼 초라해졌다. 나 혼자만 남아서 우리가 같이 걷던 길을 걷고 나 혼자만 두서가 맞지 않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청춘을 몇몇 얼굴들로 회상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읽는 내내 마음이 동한다.

<참담한 빛> 속 인물들이 겪는 사적인 고통에는 세계의 비참이 항상 뒤따른다. 인생의 정오에 다름없던 스무살 무렵을 회상하는 <여름의 정오>에서는 일본의 사린가스 테러와 9•11 테러, 섬유노동자들의 죽음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 장면이 배경처럼 등장한다. <첫사랑>에서도 ‘나’는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원에도 진학하지만 학교는 구조조정으로 학과를 폐쇄해버리고 경쟁에 내몰린 또래들은 백화점이 상징하는 자본의 최전선을 맴돈다. 작가는 이런 장면을 인물이 가는 길 곳곳에 배치하며 그들이 겪는 고통이 세계의 비참과 무관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 시절 나를 덮쳤던 감정의 실체”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설명이 요원하고,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나무 속처럼” 앞날은 여전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어둡다. 열편의 소설은 대부분 청춘의 서사들이지만 이야기는 단지 청춘이라는 한 시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감을 무기로 한 청춘의 서사

그렇지만 가을비가 내리던 하늘처럼 그즈음 내 마음은 우중충했다. 내가 그토록 우울했던 까닭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가방을 사고 못 사고의 얄팍한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넘을 수 없는 문턱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깨달음 때문만도 아니었다. (중략) 그렇지만 신입생들이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듣던 전공필수 강의가 끝나고 텅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있거나 하굣길,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보면 문득문득 나의 존재가 지닌 밀도라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겨우 스무살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고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많았는데, 그것은 정말 피로한 일이었다.(<첫사랑>,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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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참담한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