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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한복이 계속 현대인들과 소통하며 그 가치를 이어갔으면” - <구르미 그린 달빛> 의상감독 이진희
이예지 사진 오계옥 2016-11-03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하며 ‘이영앓이’를 양산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 최근 종영됐다. 이 드라마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영 세자(박보검)와 라온(김유정)의 아름다운 자태와 감성적인 연기다. 이진희 의상감독은 배우들에게 색색의 고운 한복을 지어 입히며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는 <성균관 스캔들> 속 아름다운 4인방 유생들을 통해 한복이 더이상 고루하고 촌스러운 것이 아님을 보여준 장본인으로, 디자인평론가 최범은 “<성균관 스캔들> 등의 사극을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한복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드라마 <바람의 나라>, <성균관 스캔들>, 영화 <간신> 그리고 <구르미 그린 달빛>에 이르기까지 사극 속 의상을 담당해온 이진희 의상감독을 만나 이영과 라온 의상의 A to Z, 최근 불고 있는 한복 열풍에 대한 생각까지 세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이하 <구르미>)이 성황리에 방영을 마쳤다.

=어제 막 포상휴가에서 돌아왔다. (웃음) 기존에 했던 사극들보다 많은 의상이 투입된 작품이다. 1500벌로 계약했다가, 결국 2천벌을 제작했다. 단체복 빼곤 대부분 손수 제작한 거다. 정신없이 만드느라 드라마가 잘됐고 의상의 반응이 좋았다는 걸 드라마 막바지에서나 알았다. (웃음)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 무드가 주가 된다는 점에서 전작 <성균관 스캔들>과 궤를 같이한다.

=감독님이 <성균관 스캔들> 의상감독을 찾아오라고 했다더라. (웃음) <성균관 스캔들>은 기존 사극 드라마에서는 드물게 한복의 현대화를 시도했던 작품이다. <구르미> 감독님 역시 한복을 트렌디하게 재해석해 젊은 세대와 소통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웃음) 차이점도 있다. <성균관 스캔들>은 캐릭터가 강했고 “옷이 캐릭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의상의 개성도 뚜렷했다. 반면 <구르미>는 캐릭터나 서사구조가 뚜렷한 드라마라기보다는 배우들의 섬세한 감수성을 따라가야 하는 성장 드라마였다. 그만큼 배우가 중요했다. <성균관 스캔들> 때만 해도 옷으로 캐릭터가 완성된다는 자만한 생각을 했지만, 이번 작품에선 배우가 내 옷을 입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다, 옷에 캐릭터뿐 아니라 배우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옷을 완성해주는 건 결국 배우더라.

-그렇다면 세자 이영을 연기한 박보검은 어땠나. 옷을 입히는 재미가 있는 배우였을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땐 <꽃보다 청춘>을 찍고 아프리카에서 온 직후라 까맣고 말라서 동네 동생 같았는데(웃음), 의상을 피팅할 땐 본능적으로 태와 자세가 달라지더라. 키가 크고 비율이 좋아서 한복을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잘 소화할 수 있는 체형이었다. 이후에도 의상에 배우를 담아내기 위해 박보검을 관찰해봤다. 현장에서 항상 먼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세심하게 챙기는, 공감능력이 좋은 친구더라. 이영과도 닮은 면이 있다. 이영은 세자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굳센 성정을 갖춘 한편, 내관과 친구 하자고 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캐릭터지 않나.

-그런 면을 의상에 어떻게 녹여냈나.

=그의 인간적이고 섬세한 면을 색감으로 풀어내려 했다. 채도감을 조금 낮춰 기품 있고 우아한 아름다움은 살리되, 편안하고 부드러운 색을 썼다. 삼놈이(김유정)와 친해지는 초반에는 밝은 푸른 계열로 발랄한 친밀감을 표현하고, 자신만의 공간인 비밀의 화원에서는 오묘한 비취색을 썼다. 라온이(김유정)를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는 자줏빛으로 무게감과 격을 줬다. 풍등 날릴 때 입었던 녹색 의상은 박보검이 제일 좋아했던 옷이다. 안에 겨자색 실크 원단을 받쳤고, 겉에는 짙은 녹색의 옥사 철릭을 둘렀다. 오묘한 투톤이 알록달록한 풍등 컬러와 어우러져 동화적인 미장센을 완성했다. 이런 색감들이 이영의 감수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영은 세자인데도 다양한 옷을 입는다.

=곤룡포만으로는 이영 세자의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더라. 어떻게 하면 그의 성장 과정에서의 디테일한 감성을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집무를 보지 않을 때 입는 ‘평거복’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처음엔 이영 의상을 11벌 제작하기로 했다가 결국 30벌이나 만들었다. (웃음)

-라온을 연기한 김유정은 어떤가. <해를 품은 달> 때부터 한복을 근사하게 소화한 배우다.

=눈망울이 맑고 피부가 하얘서 한복이 지닌 색채를 잘 살릴 수 있는 배우다. 사극을 많이 해봐서 그런지 한복의 선과 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더라. 아직 어린데도 놀라왔던 건, 내관복 하나로 많은 캐릭터를 완성해내는 모습이었다. 옷은 배우가 완성시킨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남장 여자 내관인 삼놈, 즉 라온의 캐릭터는 남성의 옷과 여성의 옷을 다 소화해야 했다. <성균관 스캔들> 때부터 남장 여자 한복에 능통한데.

=남장 여자라고 남자 옷에 여성스러운 라인을 넣는 것보다는 남자친구 옷을 입은 듯 박시하게 표현하는 게 포인트다. 내관복이 복식적으로 예쁘진 않지 않나. 라온이 남자 옷을 입고 코미디부터 멜로 등 다양한 신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운 과제였다. 감독님은 라인을 넣자고 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보자기에 아기를 싼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낫겠더라. 옷의 스케일감을 키워서 크게 입히고, 곽대도 남자 걸 그대로 써서 흘러내릴 정도로 연출했다. 영이를 좋아하게 되고 스스로를 여성으로서 정체화하고 나서부터는, 영이의 어머니처럼 아름답고 단아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복숭앗빛과 살굿빛 나는 원단을 많이 사용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의상이 있다면.

=마지막에 영이와 라온이 입은 의상이다. 라벤더 컬러에 꽃무늬를 써서 화사하게 표현했고, 실크 위엔 옥사를 시스루로 받쳐 깊이감과 격도 살렸다. 내가 가진 한복 판타지를 극대화한 의상으로, 아픈 성장을 겪고 난 이 친구들이 마지막에 꽃길을 걸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디자인했다.

-<구르미> 외에도 <성균관 스캔들>, 영화 <간신> 등 사극을 자주 작업했다. 언제부터 한복의 매력에 빠졌나.

=<성균관 스캔들> 때는 송중기가 신인이었는데, 한복과 배우의 결이 만났을 때 캐릭터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게 인상적이더라. 이때부터 한복의 자연스럽고 우아한 멋, 판타지스러운 느낌과 유니크한 매력에 빠졌다. 한복이 계속 현대인들과 소통하면서 그 가치를 이어갔으면 했다. 드라마와 영화 속 한복을 작업하면서 한복의 아름다운 곡선과 직선, 형태의 가치는 그대로 두되, 색에 있어서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컬러들을 도입했다.

-요즘 청년들은 다시 한복을 찾는 추세다. 최근의 한복 붐을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현상이다. 2~3년 전부터 경복궁이나 서촌을 가보면 젊은 친구들이 많이들 한복을 입고 즐기더라. 그런데 조금 안타까웠던 건, 기존 한복의 고유한 선과 형태, 아름다움을 담고 있지 않은 옷들이 많았다. <성균관 스캔들>을 통해선 한복이 촌스럽거나 불편하다는 편견을 깼다면, 이번 <구르미>를 통해선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한복의 진정한 멋과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하다가 의상감독으로 전향한 이력이 있다.

=대학생 때 체코 프라하 전쟁기념관을 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피묻은 옷을 전시해놓은 걸 봤다. 그 옷에서 그 사람의 운명과 시공간이 보이는 것 같더라. 무대미술은 인물과 시공간을 미술로 재현해내는 작업인데, 옷으로 그걸 구체화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전향했다. 지금도 사연 있어 보이는 옷을 좋아하고, 빈티지를 모으는 취미도 있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우선, <구르미>의 의상들을 전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드라마 팬을 비롯해 대중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 한복의 멋을 담아낸 브랜드 ‘하무’ 론칭도 준비중이다. 한복의 매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평상시에 우아하고 모던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선보이려 한다. 진흙이나 감물로 염색한 실크 등 우리 소재와 색이 가진 기품 있고 유니크한 매력을 도시인의 현대복에 담아보고 싶다. 현재는 무대미술로서의 옷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작업했던 의상들을 통해 풀어내는 책을 쓰고 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세자 이영(박보검)과 내관으로 들어온 남장 여인 라온(김유정)의 로맨스를 그려낸 사극으로, KBS에서 8월22일부터 10월18일까지 방영됐다. 세자 이영은 자신이 쓴 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무능한 왕과 강력한 외척의 입김 속에서 똑바로 서려는 굳센 성정의 인물이다. 하지만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연모하는 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분이 들떴다가 내려앉기도 하는 감성적인 소년이기도 하다. 한편, 저잣거리에서 뛰노는 남자아이로 자라난 라온은 내관으로 궁에 입궐하지만, 세자 이영과의 로맨스가 싹트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다. 이영과 라온은 풋사랑에 빠지고, 라온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깨닫게 되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아간다. 소년 소녀의 풋풋한 감성을 여실히 살려낸 드라마로, 왕위 후계자로서의 세자가 아닌 사랑에 빠진 한 소년으로서의 세자를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소년미와 소녀미의 대명사 박보검, 김유정이 호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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