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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원의 영화와 건축] 바르셀로나 도시계획과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윤웅원(건축가) 2016-11-03

현재의 바르셀로나.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현대 도시들도 계획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거칠게 써보자면 미리 정할 수 있는 도로나 교량이나 공원 같은 공공시설을 먼저 계획하고, 개인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건물의 용도와 크기를 제한하는 식으로 미래를 통제하는 방법이 있다. 유럽의 도시들처럼 구체적인 도시의 형태를 블록으로 정해서 도시의 변화를 통제하는 방법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원래 예측한 방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효용성이 약화된다. 예측을 넘어선 일들이 일어나거나 게임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축구팀과 가우디의 건축으로 유명한 도시 바르셀로나는 도시계획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면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블록으로 구획된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눈썰미 좋은 방문객이라면 블록 하나의 크기가 다소 크다는 점, 도로가 반듯하고 넓다는 점, 블록의 형태가 팔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 등을 특이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긴 시간을 통해 변화하기 전, 바르셀로나의 초기 도시계획은 현재와는 매우 달랐다.

시우타트 베야와 세르다의 도시계획.

바르셀로나의 급진적 도시계획

19세기 초의 바르셀로나는 지중해 지역 상업의 중심지로 인구밀도가 파리의 두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인구는 시우타트 베야(Ciutat Vella)라고 부르는 성곽으로 둘러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좁은 도로와 밀집한 건물들이 만들어낸 열악한 도시환경 때문에 전염병이 돌았고 기대수명이 낮았다. 파리가 건물을 허물고 길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근대적인 도시가 되었다면 바르셀로나는 도시 자체를 외부로 확장하는 방식, 도시를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새로운 지역은 에익삼플레(Eixample)라고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확장이라는 뜻이다. 바르셀로나는 현대적인 의미의 도시계획이 처음으로 실행된 도시 중 하나로, 도시계획안에는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매우 급진적인 아이디어가 있다.

1859년 토목공학을 공부한 일데폰스 세르다는 동일한 모양과 크기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격자 형태의 도시계획안을 제안한다. 모서리를 깎은 팔각형 모양에 113.3m×113.3m 크기의 블록이 520개로, 계획안에 따르면 몇 가지 블록 타입을 조합해서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블록 형태가 대부분 미음자인데, 세르다의 계획안에서는 열린 블록 형태를 볼 수 있다. 블록의 양 끝단에 병렬로 건물을 배치하는 타입, 건물을 기역자 형태로 블록에 배치하는 타입, 디귿자 형태로 블록 삼면에 건물을 배치하는 타입. 이 세 가지 블록 타입이 만나서 도시가 만들어진다. 이 세 타입은 만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외부공간을 만들어낸다. 병렬 타입이 연속으로 배치되면 블록들을 가로지르는 긴 공공 정원이 생기고, 기역자 타입 네개가 모이면 중앙에 넓은 공원을 만들 수 있다. 실행된 계획안은 주로 블록의 양 끝단에 건물들이 병렬로 배치되는 타입을 사용했다.

블록의 변화.

블록 조합처럼 사랑도 다양하게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는 원제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다. 제목에 두 여자주인공 이름과 함께 바로셀로나라는 도시 이름을 넣어서,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로셀로나라는 도시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됨을 암시한다. 우디 앨런의 최근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된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비키(레베카 홀)는 사랑에 대해 이성적인 현실주의자 타입으로,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호기심과 충동에 이끌려 쉽게 행동하는 타입으로, 후안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는 욕망에 솔직한 타입으로, 후안의 전처 마리아 (페넬로페 크루즈)는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타입으로 정의할 수 있다. 별자리 성격의 전형 같기도 한 이들은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는 경구처럼 영화에서 자신의 성격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

우디 앨런의 시나리오 작업을 도시를 계획하는 방식으로 상상해보자. 그는 먼저 바르셀로나를 영화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서로 다른 네 타입의 주인공들을 만든 다음 도시에 배치한다. 도시에서 주인공들이 서로 만나면 자신의 성격에 따라 얼마간 예상 가능한 행동을 하게 된다. 주인공들의 성격은 전형적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조합의 가능성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인이 된다.

비키는 논문 연구를 위해서 바르셀로나를 방문한다. 친구 크리스티나는 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기분전환을 위해서 비키와 동행한다. 여행지 바르셀로나에서 이 둘은 욕망에 솔직한 미술가 후안 안토니오를 만나는데, 그의 유혹 앞에서 자신들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 비키가 바르셀로나에서 생겨난 자신의 감정에 조심스러운 반면 크리스티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비키는 후안과의 관계를 마음에 묻어둔 반면, 크리스티나는 후안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후안의 집에서 크리스티나는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의 전처 마리아를 만난다. 후안은 마리아의 자살 충동을 우려하여 잠시 동안 셋이 같이 살자고 제안하고, 이 새로운 조합으로 크리스티나와 마리아의 관계가 생겨난다. 이어서 크리스티나와 마리아와 후안의 삼각관계, 이른바 메나주 아 트루아(Menage a Trois)가 만들어진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면 남남커플의 유형도 만들어냈겠지만 우디 앨런은 여기까지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크리스티나는 후안과 마리아의 관계가 주는 충만함이 사라지자 곧 관계가 끝났음을 알아차린다. 바르셀로나에서 약혼자 더그(크리스 메시나)와 결혼한 비키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후안을 만나기로 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비키는 충동적인 성격의 마리아가 쏜 총에 손 부상을 입는다. 이 총기사고는 계속될 것 같던 영화 속 사랑의 유형학(typology)에 균열을 낸다. 비키는 더그에게 총기사고를 설명해야 하는 불편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세르다의 도시계획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동일한 크기로 이루어진 블록의 반복을 통해 도시의 모든 지역이 동일한 조건을 가질 수 있다. 넓은 도로와 블록으로 연결된 정원은 밝은 태양과 자연스러운 공기 순환을 보장하고 부자와 빈자 구분 없이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된다. 몇 가지 기본 블록 타입을 통해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세르다의 초기 계획은 시간이 지나며 변질되었다. 더 많은 개발을 원하는 땅의 소유자들과 이들의 욕심에 부합하는 정치가들이 만나면서 세르다의 열린 블록은 닫혀버렸고, 블록 내부의 정원들도 대부분 건물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세르다의 바르셀로나는 흔적으로만 남게 됐다. 비키의 상처가 바르셀로나의 여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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