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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우리 역사와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 <나의 살던 고향은> 도올 김용옥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6-11-24

‘우리 민족은 왜 스스로를 왜소하게 바라보게 됐는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질문한다. 주체적인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중국의 중원 중심주의나 신라사 중심의 한국 고대사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발해의 정신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도올 김용옥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직접 중국 다롄과 환인, 연길 일대의 땅을 밟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흔적을 좇았다. 11월24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나의 살던 고향은>(감독 류종헌)은 이러한 도올의 지적 여정의 기록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20년 된 그의 동숭동 집필실로 향했다. 소담한 텃밭을 지나 아담한 양옥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온통 사상가 김용옥의 말과 글이 돼준 책들뿐이다. 그의 눈가에는 약간의 피로가 엿보였으나 그것도 잠시뿐. 예의 시원시원한 말투로 작금의 시대를 향한 자신의 언어를 풀어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고구려, 발해 기행 관련 강의와 2015년에 출판한 <도올의 중국 일기> 5권의 축소판이다. 다큐멘터리로 만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2014년 연변대학교에서 객좌교수로 강의하며 연길에 잠시 머물렀다. 동북 3성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더라. 그곳 조선족들의 생활사를 들여다보다가 그들의 역사를 파헤치게 됐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뿌리구나!’ 싶더라. 이 지역의 유적을 진실하게 탐구해보고 싶어 원정대를 꾸렸다. 연변대학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답사에 들어갔다. MBC PD로 일했던 후즈닷컴(www.hooz.com, 온라인 청강 사이트)의 류종헌 대표가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 일이 진행됐다. 대단한 촬영 방식을 동원한 것도 아니고 사전, 사후 기획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여정을 성실히 따랐다. 내가 느끼고 감탄한 걸 그대로 담았고 내 현장 발언으로 모든 내레이션을 구성했다. 순수한 현장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특징이다.

-2016년 한국 사회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환기하는 작업이 어째서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동북 3성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기본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자치주를 운용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1949년 3월에 대학을 세웠다. 그게 연변대학이다. 조선족이 자신들의 위대함을 스스로 알린 것이다. 주몽이 최초로 도읍한 환인 지역에 대종교 3대 종사인 윤세복 선생이 동창학교를 세우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초청한 일도 있다. 1914년의 일이다. 단재는 고구려의 유적을 보고 이 위대한 민족이 일본에 당하고 살 수 없다며 <조선상고사>를 썼다. 민족사학의 출발이다. 단재가 섰던 그곳에 내가 꼭 100년 만에 간 거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워진 지 1600년 만에 그것을 보게 됐다. 나의 무지를 개탄할 수밖에. 역사는 현장으로 가서 감을 잡고 자기 의식 속에서 새롭게 구성해내는 일임을 아는 게 필요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국정 농단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11월12일 광화문에서 진행된 민중총궐기 촛불집회 때 무대에 올라 ‘박근혜 하야, 혁명의 시작’이라는 요지의 말을 전했다. 오늘 인터뷰 시작 전에도, ‘나의 언어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는데. 사상가로서 현 정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의 역사가 혼란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곪은 데를 짜내는 일이라고 본다면 모든 현실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여태까지 속은 데 대한 분노는 있지만 그 분노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적 에너지로 써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불법으로 정권을 점유해 정당성(legitimacy)이 없었다. 오직 그 점만 붙잡고 그를 몰아내면 됐다. 박근혜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투표로 대통령을 만든 경우다. 정당성이라는 게 있었다. 다만 5년간 일하라고 위임한건데 이토록 참혹한 상황을 만들다니. 다수의 국민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 박근혜, 최순실의 죄악은 그 둘만의 죄악이 아니다. 이 체계를 조장해온 재계, 정계, 관계, 언론까지 모두가 완전히 하나의 복합체가 돼 국민들을 갖고 논 것이다.

-9월24일에 펴낸 <박원순과 도올, 국가를 말하다>에서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를 냉전 질서의 패러다임이라 보며 이후의 한국 대통령들 역시 그 패러다임에 대한 승계 내지는 반동의 역사였다고 평했다.

=우리 민족의 지배 권력 구조의 끈질긴 면모다. 일종의 종교에 가까운 반공 사상이다. 외견으로는 민주정치를 해온 듯 보이나 인간의 자발적 결정은 죄다 묵살됐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박근혜와 최순실을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사회체제를 변혁시켜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한 엄중한 평가와 철저한 반성의 경험을 쌓아오지 못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좌절부터 이명박의 안일한 임기 만료까지 계속 반복돼오지 않았나. 프랑스도 드골 이후 과거를 청산했고 독일도 나치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독일이 있다. 반면 미국은 베트남전쟁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 문제에 대한 반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의 이 추태가 일어난 거다. 미 대선에서의 트럼프 승리는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힐러리의 패배다. 현 상황에 대한 안티테제로 트럼프라는 별종을 찍은 거다.

-국가 재건에 있어서 <나의 살던 고향은>이 전하는 ‘고구려 패러다임’, ‘조만(朝滿) 문명권’은 유효하다고 보나.

=최근에 손자가 태어나 내가 할아버지가 됐다.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더라.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세계사의 주축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고대사라고 하면 초라한, 신화적 세계라고만 상상한다. 오히려 그들은 광활한 대지에서 풍요롭고 멋지게 살았다. 고대에 대한 이미지를 바꿈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멋있게 건설할 수 있다. 맹자는 식색(食色) 본성이라 했고 불교는 아집을 버리라 했다. 민주를 위한 제도적 개선은 이뤄져야겠지만 지도자가 탐욕적 인간으로 길러지면 개선될 희망이 없다.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면 결국 거대한 비전을 가져야 하고 광활한 땅을 소유할 게 아니라 광활한 의식의 지평을 확보해야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은 젊은이들에게 광활한 의식의 지평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 역사와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갖길, 각성이 되길 바란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민생이다. 그러려면 남북 대결 양상이 해소돼야 한다. 북풍, 반공만 사라져도 젊은이들은 해방될 거다. 당장 북한으로 가서 비즈니스를 할 수도 있고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마음대로 오갈 수도 있고. 그럼 영화산업도 북한을 상대로 더 발전할 텐데. 여전히 우리는 이념적으로 막혀 있다.

-사상가이기에 특정 계파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정당 활동을 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겠다고 해왔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가들에게 사상가로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을 것이다.

=11월12일의 국민들의 열기는 열기대로 있겠지만 그것의 구심점이 없다는 게 문제다. 자발적인 개인이 화가 나서 거리로 나와 집회에 참여했지만 구심점 없이는 100만명이든 1천만명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 야3당이 연합전선을 만들어 정당이 주도하는 정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한다. 프랑스혁명도 그랬지만 뜨거운 국민의 열기도 뚜렷한 정치 세력과의 결합 없이는 실패다.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은 책임 총리다. 하야를 기정사실로 뒀을 때 권력의 공백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 현 총리가 권한대행을 해 60일 이내에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다. 기존의 권력과 단절된, 국민이 믿을 만한 총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간 정계 주요 인사며 대선 주자들을 여럿 인터뷰해왔는데 그중 ‘이 사람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 한명이 있다.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젊고 뜻있는 인물,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김부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후에 <나의 살던 고향은>의 VIP 시사회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정치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걸로 안다.

=참석자인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이 이 영화를 보는 게 중요하다. <도올의 중국 일기>를 비롯해 이 영화의 문제의식은 국정교과서 반대에서 출발했으니까. 두분이 학생들에게, 젊은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라고 소개해주면 좋겠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마친 학생들도 많이 봐주면 좋겠고.

-<도올의 중국 일기> 6, 7권도 준비 중이다.

=써야 한다. 오늘로써 나는 이제 집회에도 안 나가고 정국과 관련된 글도 안 쓸 거다. 지쳤다, 지쳤어. 이젠 완전히, 굿바이! 오로지 고구려에 관한 공부만 할 거다.

<도올의 중국 일기>

<나의 살던 고향은>이 영상으로 보는 도올의 역사 인식이었다면, <도올의 중국 일기>는 도올이 일기 형식으로 풀어낸 중국과 고구려, 고려사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다. 연변대학에서 머물던 시기에 일상적으로 체험한 중국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빼곡히 기술한다. 다섯권의 연작을 관통하는 핵심은 중국을 통해 본 도올의 한국사 재인식이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사상가의 ‘체험과 감각’으로 전하겠다는 것이다. 이 작업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지평을 넓히는 길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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