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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미스 함무라비>
김수빈 사진 백종헌 2016-12-20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남자에겐 니킥을 꽂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얌체 운전을 하는 운전자를 끝까지 쫓아가 한마디 하는 여자. 법원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들어섰다가 손가락질을 받자 이내 시위하듯 부르카로 갈아입고 나오는 여자. 20대 중반의 젊은 신입 판사 박차오름은 인터넷에선 ‘미스 함무라비’로 통한다. 법관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옷차림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박차오름 판사가 해석하는 함무라비 법전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평민이나 노예가 귀족이나 힘 있는 사람의 털끝 하나만 실수로 건드려도 목이 날아갈 수 있었던” 고대에, “피해와 동일한 만큼의 처벌만 허용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복수를 엄청나게 제한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편견, 권위 따위에 굴하는 법이 없는 박차오름 판사와 서울중앙지법 44부 판사 동료들은 서로를 거울삼아 성장해나간다.

<미스 함무라비>는 문유석 작가가 2015년 봄 <한겨레>에 연재했던 소설들을 한데 모은 연작 콩트이다. 작가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의 모습을 그리되, 그것을 재판하는 판사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현직 판사가 직접 집필한 만큼 재판과 소송 과정, 법원 생활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인다. 소설 속 판사들은 “법대 위에 무표정하게 앉아 ‘망치’를 두드리는 무표정한 존재”에서 벗어나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는 이들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여기엔 소설 중간중간 삽입된 작가의 짧은 에세이가 한몫한다. ‘판사의 일’이란 제목의 코너를 통해 작가는 성희롱 사건, 심신미약에 따른 처벌 문제 등 법을 둘러싼 각종 사회적 논제들을 꺼내놓는다. 여성 법관의 비율 문제를 지적하는 등 미래 법원에 대한 제언 또한 꼼꼼하게 담겨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십보와 백보가 어떻게 같을 수 있죠? 오십보와 백보 사이 거리는 출발점에서 오십보까지의 거리와 같아요. 티끌 하나 없이 고결한 사람만 상대방 잘못을 물을 수 있는 건가요? 오십보 백보면 백보가 두배의 벌을 받아야죠. 그리고 누구 몸에 묻은 게 겨고 누구 몸에 묻은 게 똥인지도 가려야죠. 이런 걸 가리지 않으면 누가 득을 보죠? 백보만큼 나쁜 짓을 한 인간, 몸에 똥 범벅된 인간들 아닌가요? 그런 인간들이 상대방에게도 서너보 흠이 있으면 이걸 꼬투리 잡아 오십보 백보 운운하다가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겨 묻은 개인 척하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요?”(63쪽)

사회가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 역시 그런 방식이 아닐까. 법정 저 높은 곳에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판사들이 실제로는 무력감을 느끼며 정답이 없는 안갯속을 헤쳐나간다. 판사는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일 뿐이다.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기능한다. 그 법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결국 시민들이 쥐고 있다. 권리 위에 잠자지 말자,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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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미스 함무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