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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현 감독의 첫사랑에 바치는 헌사
2002-04-06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E.T.>에서 배웠다

예전에 한 술자리에서 내가 스필버그를 존경한다는 것에 대해서 발끈하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게 대체 스필버그 영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냐고 물어봤고, 난 당차게도 <E.T.>에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노라고 대꾸했던 게 기억난다. 물론, 그뒤로 나는 그분의 가열찬 비웃음의 융단폭격을 받아내야 했지만, 지금도 이전의 그 생각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솔직히 난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항상 15페이지 이상 발전시킨 적이 없었으며, 웬만한 영화과 학생들은 필독하고도 남았을 <영화의 이해> 같은 영화이론서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는 나도 안다. 그래서 요즘 반성중이며 열심히 독서하고자 노력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내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들은 어떻게 보면 본능적인 작업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것 같다. 어린 시절 <E.T.>라는 영화를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 손에 이끌려가서 졸음과 싸워가며 본 그날의 기억 이후로 지금까지 놓치지 않고 가져온 ‘영화감독의 꿈’(이것이 그 당시 내가 생각한 E.T.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꿈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었고, 내 영화의 토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난 자랑스러운 서울예대에서 열심히 영화에 대한 수업도 받았고 거기서 많은 영화적 능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학교교육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표현의 영역이 그러하듯이 영화 또한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 자극받고,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화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을 담아내는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에 좀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시작이 반이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아이의 수줍게 웃던 얼굴의 보조개를 못 잊듯이 처음 영화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E.T.>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달콤한 첫사랑의 대상이자, <스타워즈>의 요다 같은 나만의 스승이다. 내가 힘들어 잠시 영화에 대한 꿈을 접으려 할 때 내 가슴팍에 다가와 그 가녀린 손가락의 불빛으로 다시금 영화에 대한 꿈을 피우게 해주고, 영화현장에서 부딪히는 무수한 고난의 벽들을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날아올라 넘어가기도 하면서 E.T.는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왔다. 또한 E.T.는 내게 어떤 영화교과서보다도 영화에 대해 많은 부분을 가르쳐주었다.

영화 초반에 E.T.가 지구에 홀로 남겨지게 되는 과정을 담은 시퀀스는 영화가 어떻게 영상의 힘으로 관객에게 언어보다 더 깊은 정보와 느낌을 전달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장면에서 가장 주가 되는 것은 빛과 소리인데, 지구의 식물들을 채집하는 E.T.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 영화는 오로지 자연의 소리와 외계인들의 숨소리로만 표현을 하면서 매우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곧이어 굉음과 함께 나타난 일군의 과학자들에 의해 깨어진다. 과학자들의 강한 손전등 빛은 후반에 엘리엇의 집을 점거하는 과학자들의 무례한(?) 등장에서도 효과적으로 쓰이면서 엘리엇과 E.T.가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공간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파괴돼가는 것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

영화 <E.T.>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에서부터 고다르의 점프컷까지 영화광 스필버그가 이전의 영화들을 보면서 쌓아온 영화적 지식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또한 다양한 장르영화의 특징들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자전거 추격 신은 이전의 어떠한 추격 신보다 실험적이며, 석양을 뒤로하고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엇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우주복 입은 사람들이나 초반 E.T.와 엘리엇이 만나는 장면은 영화가 어떻게 공포감을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E.T.>에는 내 영화의 근간이 되며, 또한 자극이 되는 무수한 영화적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물론 한편의 영화로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는 말처럼 우스운 말은 없다. 그러나 난 아직도 <E.T.>를 보면 영화가 찍고 싶어지고, 뭔가 열심히 해서 나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볼 때마다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는 영화 한편이 내 맘속에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게 또 있을까? 오늘도 난 ‘E.T.’와 함께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민동현/ 단편영화 감독·<지우개 따먹기> 등▶ 빅히트 그리고 재개봉 <E.T.> 를 이해하는 11개의 키워드 (1)

▶ 빅히트 그리고 재개봉 <E.T.>를 이해하는 11개의 키워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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