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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이상해서 좋다
2002-04-06

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김지운: 하나의 공간에 신하균의 죽은 누나가 묻히고 송강호의 딸이 죽고 결국 그 자리에서 신하균도 송강호도 죽는다. 그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나.

박찬욱: 그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반대의 지점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하고 싶었다.

김지운: 그런데 문제의 강변은 극중 인물의 비밀이 집중되어 있으면서도 오픈된 장소다.

박찬욱: 대낮의 야외공간, 적나라하고 가혹한 일광이 꼭 필요했다.

김지운: 어려서 산과 계곡을 많이 쏘다녔는데 은폐돼 있고 비밀스럽고 음습한 공간에서 어두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탁 터진 공간에서 오히려 다 벗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툭 터진 장소에 사람을 끌고와 죽이는 것이 어둠 속의 살인보다 훨씬 안심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욕망의 발현이랄까.

박찬욱: 영화 속 죽음의 강가는 한국의 소박하고 평범한 산하이며 신하균 남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자연에는 어머니 품 같고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것은 가장 가혹한 존재이기도 하다. 완전노출 상태의 적나라한 가혹함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였다.

김지운: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 원본에는, 가족들이 시체를 푸대에 넣어 묻는데 노인 한 사람이 계속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설정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주 은밀한 행위를 그 노인은 멀쩡히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박찬욱: 여기선 신하균이 그런 존재다. 송강호가 누나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에도 둑 위로 트럭이 한대 지나간다. 그 설정을 고집한 것은 이곳이 오지도 아니고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이란 느낌을 주고 싶어서였다. 어릴 적 시골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어른들은 어린 나를 겁주려했는지 농촌에는 알고보면 밭고랑 같은 곳에 시체가 많이 묻혀 있다고, 사람이 드문드문 사는 이런 곳에서는 죽여서 가까운 데 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김지운: 캐릭터에서 재미있는 점은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저렇게 참담한 사건을 맞이하면 저런 식으로 나가겠구나 싶었던 거다. 거울 앞에서 혼자 팔굽혀펴기를 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처럼. 자신이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로 느껴질 때의 쾌감에서 나오는 자가발전 같은 게 분명히 있다. 배두나가 도심에서 미제축출을 외칠 때, 신하균이 장기밀매단에 복수를 하러 갈 때 그들은 영혼이 구제받는 순간이라고 느낄 거다.

박찬욱: 송강호가 신하균을 잡았을 때도 그렇다. 신하균을 방 한가운데로 끌어놓고 문을 닿고 숨을 고르고 돌아서서 내려다볼 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 받았을 때와 같은-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혹감을 느끼는 거다.

김지운: 이 소재에 적합한 더 사실적이거나 안정적인 방식이 있었을 것도 같다. 그랬으면 영화가 훨씬 더 높이 평가받고 대중적인 장도 더 크게 확보했을지 모른다는 짐작이 든다.

박찬욱: 그러면 더 나쁜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됐을 거다. 아마도 ‘정글’ 같은 느낌이 더 살았을 것이고. 그러나 일부러 그런 스타일을 택했다면 내 정체성을 배반하는 일일 것 같았다. 형식주의자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스타일이 ‘출구없음’의 느낌을 더 강하게 전할 거라고 판단했다.

김지운: 하긴 그런 길을 택했다면 박찬욱 감독 영화는 다 봤다는 느낌이었을 거다.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박찬욱: 아, 감독은 부디 잊어달라니까. 난 훗날 영화사가가 내 영화의 일관성을 논하는 것보다, 이러이러한 영화들을 보다보니, 공통점은 감독이 같은 사람이라는 점뿐이더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김지운: 우리 영화산업의 인프라가 4, 5년 전보다 비대해지고 매체도 많아지면서 감독들도 모르게 덩달아 조급해지는 경향이 있다. 뭐든 빨리 표현하고 노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중예술이건 고급예술이건 간에, 인생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새 스타일을 찾아내기도 하고 끝없이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신속히 결론을 내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욕구를 거역하게 해주고 반성하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복수…>를 보는 일은 즐거웠다.

▶ 제 1장 그 감독, 이상하다

▶ 제 2장 그 영화, 이상하다

▶ 제 3장 그 배우, 더 이상하다

▶ 제 4장 리얼리즘, 그것도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