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 4장 리얼리즘, 그것도 이상하다
2002-04-06

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김지운: 영화에서 결정적인 모티브로 작용하는 누나와 보배의 죽음이 너무 느닷없이 개연성 없이 들이닥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어떻게 생각하나.

박찬욱: 누나의 죽음은 느닷없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개연성은 잠깐 생각해보면 납득할 정도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 묘사할 수는 없으니까. 누나는 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격이라기보다는 기계장치 같은 존재, 던져진 인물이다.

김지운: 신하균이 누나를 닦아주는 장면은 경험이 있나?

박찬욱: (흠칫 놀라며) 경험? 그런 것은 없고 근친상간의 뉘앙스를 의도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변태엽기영화가 될 거라 안 그런 척하려고 했다. 신하균이 몸을 닦는 연기를 할 때 나의 주문은 “더 깊숙이 닦아라”였다. 신하균이 클로즈업에서 목욕탕 때밀이처럼 수건을 탕탕 치며 웃는데 약간 음탕한 표정이 잘 살아 마음에 들었다.

김지운: 그 밖에도 섹슈얼리티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었나?

박찬욱: 송강호가 전기고문을 하며 배두나의 귀에 침을 바르는 장면이 상징적인 강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문자들이 즐겨쓰는 방법은 전극을 젖꼭지에 연결하는 건데 그건 너무 ‘그쪽’으로 가는 것 같아 귀로 했다. 두나가 뒤늦게 원래 아이디어를 듣고 경악하는 표정이란!

김지운: 최초의 동기야 무엇이건 피해자는 송강호인데 그가 가해자들에게 가하는 보복행위가 더 잔혹하고 범죄적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송강호의 행위는 심리적 쾌감에 기인하나. 폭력을 둘러싼 관계를 어디에 중점을 두고 봐야 하나.

박찬욱: 심리적 쾌감이나 폭력중독은 좀 심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명이나 임무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배두나의 명석한 정의에 의하면 가해자는 점점 불쌍해지고 피해자는 점점 잔인해지는 역할 바꾸기의 게임이란다. 뭐 그렇게 악마적이거나 변태적인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이라고 우기고 다닌다.

김지운: <어둠의 표적>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변화 같은 건가? 이 영화에 관해서는 리얼리즘을 고지식하게 해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리얼리즘에도 자연주의가 있고 진짜 사실주의도 있고 마술적 리얼리즘도 있는 건데, 대부분 리얼리즘 하면 합리적 세계만 상정하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박찬욱: <복수…>의 리얼리즘은 관념적 해석을 통과한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삶을 크게 좌우한다는 인식이 반영된 리얼리즘. 왜 하필 신하균과 배두나가 정찰을 갔을 때 팽 기사가 배를 칼로 긋는 소동을 피워 유괴 표적을 바꾸게 했는지, 왜 하필 류승범은 그 순간 강가에 있었는지. 이 영화에서 불운은 혼자 오지 않는다. 누나의 죽음은 보배의 죽음으로 곧장 맞닿아 이어진다. <복수…>는 인생은 그런 것이라는 내 머릿속의 관념을 통해 걸러진 현실이다.

김지운: 그런 말을 꺼낸 이유는 자칫하면 운동권 사람들을 희화화했다거나 계급문제를 폭력문제로만 해석했다거나 비장감은 넘치는데 결과는 밋밋하다는 해석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나는 그 인물들이 나름대로 비장하고 폭발 일보 직전까지 고양돼 있지만 시점을 바꾸면 인생이 소극이고 희비극임을 노출하는 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사실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웃기는 순간이 많다. <복수…>의 리얼리즘은 그런 종류다. 배우가 막 우는 클로즈업을 러시필름으로 소리없이 보면 웃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듯이.

김지운: 아무튼 이상하고 기이한 영화다. 제작사 스튜디오 박스 사장께 “현 단계 한국영화 최고치인 것 같다”고 했더니 흥행 감독이 영화 좋다고 했다고 너무 좋아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작년에 좋게 본 영화들이 다 망했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웃음) 나는 제작진을 제외하면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찌 볼까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일 거다. 지금까지 내가 다루는 이야기에 내포된 공포가 너무 커서 오히려 더 코미디로 간 면도 있었는데 <복수…>는 그걸 한번에 다 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암울하고 시니컬한 세계관을 그것도 일급배우들을 데리고 한국영화에 옮겨놓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는데 이렇게 해냈다. 항상 내가 하려는 걸 한두발 앞서서 하는구나 싶다. 송강호라는 배우만 해도 나는 <넘버3>보다 <초록물고기>에 감동받으면서도 코미디 연기만 연출했는데, 박 감독은 그에게 <…JSA >의 연기를 시켰다.

▶ 제 1장 그 감독, 이상하다

▶ 제 2장 그 영화, 이상하다

▶ 제 3장 그 배우, 더 이상하다

▶ 제 5장 이상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