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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그 영화, 이상하다
2002-04-06

김지운, 이상한 감독 박찬욱을 만나 <복수는 나의 것>을 논하다

김지운: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면 현실적 소재, 사회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다룰 때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은 점에서 영화의 장단점이 동시에 나온 것 같다. 그런 부정합이 박 감독이 원한 아우라였던 것도 같고. 이질적인 소재와 형식이 빚는 충돌 때문에 한번에 소화하기 힘들었다.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 내 계급대결 구도와 베트남전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룬 <택시 드라이버>를 몽환적으로 풀어서 잊지 못할 영화로 만들었는데, <복수는 나의 것> 역시 그런 종류의 강렬함이 있다. 이런 소재를 현실적 시각으로 풀 때 더 섬뜩할까, 스코시즈나 린치처럼 부조리한 악몽으로 풀었을 때 더 섬뜩할 것인가. 대중적으로는 전자가 답일 테고 소수 마니아는 후자에 열광할 것 같은데 <복수…>의 개봉결과가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복수…>를 박 감독의 상업적인 실험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박찬욱: 개봉을 앞두고 불안, 초조, 긴장…,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덤덤하지도 않다. 지금 심정은 호기심에 가깝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일반 관객이 별점 주는 사이트에 갔더니 <복수…>는 다섯개 아니면 반개였다. 예전과 달리 리뷰, 홈페이지 게시판을 다 챙겨본다. 욕은 해도 좋은데 자꾸 전작과 비교해 배반이네 발전이네 반전이네 하는 건 불만이다. 다만 스타들이 이런 영화에 나와준 것은 내 영화가 아니라도 고무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이 수준의 영화를 다시 못 만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갖는 것도 이런 배우들이 이런 영화에 다시 모이기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계급대립의 관점에서 보는 평도 재밌게 봤다. 그런 의도도 명백히 있었고 운명론적 입장도 들어가 있다. 무정부주의 유물론자 테러리스트들이 신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는 설정이 보여주듯 나는 순전히 모순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김지운: 그와 관련해 나는 <복수…>의 주요 캐릭터들이 우리나라에서 듣도 보도 생각도 못 했던, 생각하더라도 감히 실현시킬 수 없었던, 말하자면 어두운 열정의 소유자라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들은 온전한 삶의 대응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마니아들에게 천진한 구석이 있듯 정신적 순결성, 고결함이 훼손됐을 때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박찬욱: 영미를 비롯해 그 인물들은 몹시 위험한 존재들이지만 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김지운: 그러니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아주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움직이는 결과가 된다. <복수…>에서 모든 리얼리티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평범한 사람인 나도 기존 질서를 지키며 살려고 하면서도 무서우리만치 적개심에 불타고 상상의 낭떠러지로 치달을 때가 많다. 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지만.

박찬욱: 운전중에 무섭다는 소리는 들었다.

김지운: 흠. 말하자면 삶에 서투른 거다. 배두나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도 순진하고, 송강호도 신하균도 누구 하나 순리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 이 세상 속에 같이 살고 있다. 불가해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또 하나의 축이 굴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재수가 없어서, 어떤 계기 때문에 그 금에 발이 걸린다. 예전에 교도소의 조직폭력배 순화교육하는 스님을 따라간 적이 있는데 중간보스와 화양리를 걷는 동안 15미터에 한명씩 200~300미터에 걸쳐 인사를 하더라. 어떤 끈을 잡으니까 안 보이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섬찍한 느낌을 안 그때부터 부조리도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박찬욱: 실은 그런 것을 너무 의식해 데이비드 린치처럼 아예 다른 세계로 영화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김지운: 그래도 <복수…>에는 와이드를 쓴 양식적인 앵글이나 기괴한 조형감, 인물을 포진시키는 방법, 양식화된 캐릭터 설정 등등 현실을 악몽으로 치환시키는 일종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있다.

박찬욱: 사실 광각렌즈도 너무 감독을 내세우는 것 같아 피하려 했는데, 떨어져 있는 인물을 잡기 위해서는 심도가 필요한 나머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기더라. 심도는 확보되지만 양식화된 느낌, 과장된 거리감이 생기니 고민이었다. 그런데 또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양식화된 화면이 싫지 않은 거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면서 내심 좋아했던 거겠지.

김지운: 장면묘사나 전개가 현실의 숨막히는 압박감을 전하면서도 매순간 이것은 어쨌든 유머라는 점을 자꾸 노출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밖에서는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카메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거나. 알게 모르게 감독의 존재와 의도를 상기시키는 터치들이 보였다.

박찬욱: 스타일을 추구한 건 아니지만 잘 구도 잡힌 단정하고 엄숙한 화면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에서 어떤 감독은 흐트러지고 꾸밈없는 앵글을 선호할 수도 있겠고 미학적으로 미결된 그림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나 결국 지금처럼 해야 관객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김지운: 그점이 열광해야 할 지점인 것도 같고 말이 많아지는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교는 안 되지만 <조용한 가족> 할 때 고호경이 세트에 들어가면 벽이 보이고 다시 후진하면 벽이 없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다들 이해 못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기사님만 그러자고 해서 기뻐했는데 나중에 “뭐, 편집에서 자를 것도 있고 일단 다 찍어둬!” 하시더라. (웃음) 어쨌든 나는 폭력의 잔혹성, 박진감과 더불어 끊임없이 유머와 픽션의 징표를 노출하는,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단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복수…>의 장악력이 좋았다.

박찬욱: 그게 바로 인터뷰의 곤란함이다. 예컨대 “소외효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치자. 나는 한 가닥의 실로 꿰어지는 전략이 싫고 설사 있다 해도 들키는 게 질색이다. 그런데 질문이 나오면 자꾸 한 가지로 대답해야 되니 멋이 없어진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처럼 대응하면 되지만, 보통사람이 그게 되나. 자꾸 성의있게 대답하고 싶어지는 걸 어떡하나.

김지운: 나도 감독 입장이 돼봐서 아는데 (웃음) 자기조차 궁금한 지점이 있다. 모르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의도도 없이 할 수도 있고, 마음속으로 이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가 거론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노출할 수는 없는 게 있다. 평론가들이 감독이 말하기 힘든 잠재의식을 짚어줘야 하는데. 표면에 드러난 걸 말하는 거야 누가 못하나.

박찬욱:그렇지. 내 입으로는 말 못 하지. 최근 누군가 <복수…>가 말이 없어진 이유는 내가 <…JSA > 이후 너무 많은 인터뷰를 해서가 아닌가라고 써서 철렁한 경험은 있다.

김지운: 그런데 영화를 만들면서 절제의 과잉이 있었다는 생각은 없는지? 오버액션만 과잉은 아니니까. 분명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잡았다는 느낌은 들지만, 나 역시 현장에서 절제하는 맛이 너무 좋은 나머지 풀지 못하고 갈 때가 있다.

박찬욱: 촬영이 끝난 시점에서는 오히려 “미니멀하게 가려 했는데 너무 감상적이 된 게 아닌가, 더 눌렀어야 하는데”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다 편집으로 솎아내고 나니까 충분히 건조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지금 김 감독이 말한 것과는 반대다. 성격 탓인지 확 눌러간 테이크만 고르게 되더라. 예컨대 송강호가 마침내 신하균을 잡아 기절시켜 때리는 신에는 비통한 심정이 정점에 달해 거의 발광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토해내는 테이크도 있었다. 누구나 그것이 오케이라고 했다. 나와 송강호만 빼고. 물론 너무 건조한 것도 폼이니까 경계해야지 하는 생각은 있었다.

▶ 제 1장 그 감독, 이상하다

▶ 제 3장 그 배우, 더 이상하다

▶ 제 4장 리얼리즘, 그것도 이상하다

▶ 제 5장 이상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