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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배순탁의 <매그놀리아> 취중 관람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 출연 톰 크루즈, 필립 베이커 홀, 줄리안 무어,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윌리암 H. 머시 / 제작년도 1999년

누구나 술 취하면 당기는 음악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누구나 술 취하면 당기는 영화 한편쯤은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내 책 <청춘을 달리다>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취향에 관한 한 그리 이성적인 타입의 사람이 못 된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거다. “인생의 영화 한편을 고른다면?”이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결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고르기 힘들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질문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머지 그냥 <그랜 토리노>(2008)라고 발설해버린다. 물론 이 단 하나의 리스트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대개, 기분 탓이다. <빌리 엘리어트>(2000)가 될 수도,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가 내 입에서 나올 수도 있다.

기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단순하고 명확할수록 좋았다. 그리하여 내 선택은 바로 이 작품 <매그놀리아>(1999)다. 기준이 뭐냐고? 별거 없다. 그냥 ‘본 횟수’다. 글쎄, 정확하게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 영화, 거의 10번은 본 것 같다. 나는 술에 취하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타입의 인간이다. 술 취하면 글이 더 잘 써진다고 하는 몇몇 동료들을 봤는데, 그건 나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신의 경지다. 그래서 술 취하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감상하거나 게임을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다. 적어도 영화의 경우 나는 술 취하면 <매그놀리아>를 본다. 오랜 버릇이다.

대사부터가 주옥같다. “난 정말 줄 사랑이 많은데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과거를 잊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앞의 대사는 어린이 퀴즈왕 출신의 주인공, 뒤의 대사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주인공의 대사다. 영화 속 이 두 대사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먹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럿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페르소나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바로 결핍과 상처를 어떻게든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자신이다.

저 유명한 개구리비는 아마도 ‘인생의 부조리함’을 상징하는 거라고 나는 여겨왔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때론 유쾌하게, 때론 자조적으로. 그러면서도 우리 인생의 궤도가 질서정연하기를 몰래 꿈꾼다. 내 삶이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기를, 그도 아니면 지금 정도의 수준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참혹했던 20대를 돌이켜보면, 지금은 거의 천국에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한데 지금 같은 인생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거 참,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부조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상처받는다. 쉽게 아물지 않는 내면의 상처는 결핍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 상처와 결핍이 나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거라는 죄의식에 휩싸이기도 한다. “It’s not your fault.” <굿 윌 헌팅>의 이 대사처럼 내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영혼이 골절된 우리는 그것이 비록 찰나의 행복일지라도, 자신의 결핍을 메워줄 누군가를 찾아헤맨다. “One is the loneliest number.” 영화에서 에이미 만의 이 노래가 괜히 흐르는 게 아니다. 참고로 이 곡 <One>의 오리지널은 해리 닐슨, 에이미 만 외에도 스리 도그 나이트의 커버가 특히 유명하다. 명색이 음악평론가인데, 음악 얘기는 좀 써야 하지 않겠나.

이 영화, 2월14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로버트 알트먼 X 폴 토머스 앤더슨’ 기획전을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뿔싸. 화요일쯤 예매하러 들어갔더니 표가 거의 동나버린 게 아닌가. 내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건 이번이 최초다. 어서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앞에서 세 번째 줄이라 목이 좀 아플 것 같긴 하지만.

배순탁 음악평론가.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청춘을 달리다>를 썼고 <모던 팝 스토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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