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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페니웨이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
오승욱(영화감독) 2017-04-06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모방”, “표절”, “영향”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아마도 이런 책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책이냐고? 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로봇이 등장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그렇다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냉혹하게 단죄하는 책은 아니고,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이런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었나 하고 신기해할 정도로 잊혀졌거나 존재 가치가 거의 없었던 작품들까지도 과거의 어둠에서 꺼내 빛을 보게 한다.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는 치욕스런 역사라도 우리의 얼굴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책이다. 치욕스런 도작(盜作)의 역사를 창피하다고 흙더미 속에 묻어버리거나 아전인수 격으로 미화하는 책이 아니다. 흙더미로 덮어봐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언젠가는 덮어놓은 것이 흙더미 사이로 비어져 나올 것이 분명하기에, 왜 우리는 이토록 창피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 꼼꼼히 살피는 책이다.

1968년에 만들어진 <황금철인>을 시작으로 40여편의 애니메이션이 극장 개봉순으로 소개된다. 로봇이 중요한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한편도 빠짐없이 소개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자료의 보관 상태를 아는 사람이라면 글쓴이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이다.

돌려막기, 표절, 도작이 난무하던 시기

나는 로봇 애니메이션에 열광했던 세대는 아니다. <마징가 Z>가 나오기 이전, <사이보그 009> <가면 라이더 X>와 같은 사이보그나 인조인간에 첫사랑을 바친 세대였고, <마징가 Z>가 TV에서 방영될 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기에 어린 동생들과는 열광의 온도차가 있었다. 1976년, <로보트태권V>가 극장에서 상영될 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막내 동생의 보호자로 극장에 갔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막내 동생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막내 동생과 극장 안의 모든 어린이들은 마치 교회 부흥회에서 손뼉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과 비슷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들에게 동참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분노했다. 앞 장면에 쓰인 컷들이 그대로 몇번이고 반복해서 쓰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 숏들이나 태권V가 하늘을 나는 장면들이 감정과 상황에 따라 새로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그냥 기계적으로 재사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컷을 더 그리는 수고와 제작비를 절감하느라 돌려막는 방법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런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은 태권V의 속편을 보고 나서였다. 시퀀스 전체가 회상 장면이란 명목으로 다시 반복해서 새 영화에 나오는 것이었다. 이야기 전개와 아무런 관계없이 억지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우겨넣은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야 이거, 그리기 싫으니까 또 써먹는 사기를 치는구나” 했다.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의 클라이맥스는 이런 돌려막기 장면만으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내 어마어마한 애니메이션이 소개되는 챕터다. 이런 뻔뻔함은 그 옛날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동전이 든 컵을 찾아내는 도박판을 벌이던 늙은 어른들의 모습들과 비슷하다. 어쩌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그 공로자 중 하나는 절대 반공 이념으로 표현의 자유를 앗아간 박정희 유신정권과 전두환 군사정권이고, 80년대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스폰서가 되어 표절과 도작을 적극적으로 부추긴 완구제작업체들이라는 것을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애니메이션 제작 연구과정에서 코치와 비슷한 일을 6년간 하면서 다섯편의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에 참여했다. 그 시기에 대한 기억은 스탭들이 제작기간 동안 절인 오이처럼 쭈글쭈글 피폐해지는 모습들이었다. 애니메이션은 터무니없는 노동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셀애니메이션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그리고 또 그리는 과도한 노동력 없이는 절대로 탄생할 수 없는 것이 애니메이션이다.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

끔찍했던 작업현장에 관한 기억

1981년 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를 졸업한 선배 중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한 선배가 있었다. 그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나와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직장을 구경시켜주었는데, 과도한 노동으로 절인 오이처럼 피로에 절어 있는 모습으로 용산역 앞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그는 근처의 순댓국집에서 소주 한잔을 사주고는 자신의 일터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창고 비슷한 건물의 작업장에 들어선 순간, 코와 눈을 찌르는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 때문에 정신이 어질해졌다. 채색을 하는 알파포스터컬러 물감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였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어둠침침한 작업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책상마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토시를 끼고 채색을 하는 스탭들의 피곤을 짊어진 등을 보다가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평화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고모를 따라 평화시장 건물의 좁은 복도를 지나 옷 만드는 작업장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둠침침한 옷 공장에는 솜 덩어리 같은 커다란 먼지들이 둥둥 떠다니고 옷감에서 뿜어져나오는 화학약품 냄새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워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 나보다 불과 대여섯살 많아 보이는 어린 여공들이 피로에 전 등을 보이고 미싱 앞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용산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들과 평화시장의 여공들의 모습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때 내가 보았던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은 일요일 아침에 보았던 디즈니랜드에서 소개한 애니메이션 제작현장과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났다. 디즈니랜드에 등장하는 애니메이터들은 지나치게 쾌활한 월트 디즈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나치게 쾌활하게 웃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한국 슈퍼 로봇 열전: 태권브이에서 우뢰매까지>는 그 끔찍했던 80년대 초반 용산 작업장의 기록이다. 그 당시는 값싼 노동력으로 미국과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하청 작업을 하던 시기였고,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동토의 왕국이었으며, 완구사업 자본이 애니메이션으로 들어와 한국 애니메이션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리는 참담한 시대였다. 이것은 70년대 말 한·홍 위장 합작으로 제작된 한국 액션영화 제작현장과 쌍둥이 형제지간이며 관객을 상대로 사기를 치며 어린이들의 코 묻은 돈을 우려내던 처참한 시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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