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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혁 추모] 우리가 기억하는 김주혁
씨네21 취재팀 2017-11-08

김주혁의 필모그래피가 새로이 추가될 수 없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타깝고 슬프다. 영화를, 연기를 사랑했던 배우 김주혁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좋은 영화들을 남겼다. 다음은 <씨네21> 기자들이 가장 아끼는 김주혁의 장면들이다.

김성훈 기자의 <청연>(2005)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입에 거의 대지 않는 김주혁은 유독 <청연>에서 만취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가 연기한 한지혁은 박경원(장진영)의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곯아떨어졌고, 그 다음날 박경원이 모는 택시를 다시 불렀을 때도 만취해 있었다. 박경원이 그에게 “비너스(술집)에 자주 가시나봐요”라고 묻자 그는 “우울할 때마다 가요”라고 대답하고, 박경원은 “매일 우울하신가봐요”라고 말한다. 중의원이 되기 위해 자신을 입대시킨 아버지에 대한 원망,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인한 그의 우울한 얼굴이 영화 내내 아른거린다. 그럼에도 박경원과 함께 있을 때 그의 얼굴은 가장 환하다. 기상 장교가 되어 박경원과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고, 박경원의 옆에서 그녀의 꿈을 지지할 때 활짝 웃는 잔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장면! 박경원을 두 번째 만났을 때 한지혁은 매우 기쁜지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담배를 입에 문 채 노래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희망이다.”

장영엽 기자의 <공조>(2016)

“김주혁씨가 정말 의외였다.” <공조> 개봉 당시, 이 작품의 액션을 설계한 오세영 무술감독은 액션배우로서 김주혁의 강렬한 존재감에 대해 힘주어 말한 바 있다. 북한에서 위조지폐 동판을 탈취해 남한에 잠적한 특수부대 출신의 악한, <공조>의 차기성은 로맨틱 코미디의 얼굴로 각인되어왔던 김주혁에게 액션배우, 악역이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안긴 역할이다. 이 작품으로 김주혁은 배우 경력 20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상(제1회 더 서울어워즈 영화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조> 인터뷰 당시 “김주혁씨는 언젠가 액션영화를 본격적으로 함께 찍어보고 싶은 배우다. <공조> 2편을 찍는다면 기성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고 했던 오세영 무술감독의 말이 가슴 아프다.

이 장면! 터널에서 탁 트인 도로까지 이어지는 총격 액션 시퀀스는 액션배우로서의 김주혁의 유려한 몸놀림을 만끽할 수 있었던 장면이다.

이주현 기자의 <비밀은 없다>(2015)

야심만만한 정치 신예 김종찬. 영화에서 결정적 동기를 제공하는 인물은 김종찬이지만 영화의 매 신에 등장하는 건 김종찬의 부인 김연홍, 즉 손예진이다. 딸의 죽음 이후엔 거의 손예진의 원맨쇼가 펼쳐지지만, 김종찬이라는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우리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주혁의 얼굴을 연상하게 된다. 보이지 않아도 함께하는 존재로서 김주혁은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역할의 비중에 연연했다면 선택할 수 없었을 캐릭터. 김주혁은 “아무것도 아닌 걸 잘하는 사람이 진짜 (연기)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적 있다. <비밀은 없다>는 그것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이 장면! 특정 장면보다 선거 선전물 속 김주혁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젠틀한 이미지는 고도로 활용됐고, 그 이미지는 ‘기호 1번 김종찬’으로 각인됐다.

송경원 기자의 <YMCA 야구단>(2002)

영화에 첫발을 디딘 건 <세이 예스>(2001)지만 진짜 데뷔라고 할 만한 영화는 <YMCA 야구단>이다. 일본에서 야구 유학을 하고 돌아와 YMCA 야구단의 주장이자 투수를 맡은 독립운동가 오대현은 어쩌면 너무 멋져서 빤하고 심심한 캐릭터다. 하지만 김주혁이라는 옷을 입었을 때 편편하던 캐릭터가 부피를 가지고 설득력을 얻는다. 함께 연기한 송강호의 표현을 빌리면 “기본기가 아주 탄탄하게 잘 닦이고 훈련되어 고전 배우의 무게감을 지닌” 배우다.

이 장면! 함정인 걸 알면서도 마지막 경기를 치르러 서울로 올라온 오대현. 초췌하고 지친 표정과 결연한 눈빛의 얼굴이 한컷에 잡힌다. 허락된 분량 안에 캐릭터를 표현하는 정확한 연기.

임수연 기자의 <광식이 동생 광태>(2005)

광식은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을 마음에 품은 복학생이다. ‘주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광식은 자신의 ‘주책’을 인정해버렸다. 남을 위해 희생만 하다가 7년 동안 로맨스의 기회를 놓친 남자의 지독한 자기 연민이 이어지나 했더니 “어쩌면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바보짓들을 즐겼는지도 모른다”고 회고한다. 첫사랑의 실패를 후회하는 수많은 남자 캐릭터 중 유독 김주혁이 연기한 광식에게 남다른 호감이 생긴 이유는 명확했다. 빤한 겸손이 아니라 정곡을 찌르며 결점을 고백하는 진솔함은 희귀한 미덕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진단하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장면! 7년간 좋아하던 윤경(이요원)과 자신의 조수로 있던 일웅(정경호)이 사귀게 되자 광태(봉태규) 앞에서 화는 못내고 애꿎은 새우볶음밥 이야기를 하던 장면. 공격성이 없는 남자의 매력을 새삼 알았달까.

김현수 기자의 <방자전>(2010)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소설거리가 되나?” 방자의 입에서 춘향(조여정)과의 숨은 사연이 흘러나온다. 머뭇머뭇 다가가서는 냅다 진심을 휘두르는 방자의 역할은 몽룡(류승범)과 춘향의 수상한 거래를 이어주는 돌다리나 다름없었다. 굳이 두드려 건너볼 필요가 없는 듬직한 존재감. 방자는 언제나 진심을 담아서 진짜로 그 인물이 되어보는 것을 연기 철학으로 삼았던 김주혁의 성정처럼 춘향을 사랑한다. 언제나 몽룡과 춘향 뒤에서 제 역할을 다한 방자에 대해 더 이야기할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 장면! “등장만 시켜주십시오. 마음만 주인공이면 되지요.” 춘향을 등에 업은 방자가 남은 생도 그녀 곁을 지킬 것을 다짐하던 마지막 순간. 노래 한 토막도 제대로 못 불러 서먹거리던 방자, 김주혁이 남긴 진심 한 토막이 느껴지던 순간이다.

이화정 기자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남자’들은 매번 지질함을 경신한다. 김주혁이 연기한 영수도 그렇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지질함’에 김주혁이 불어넣은 새로움은 확연하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을 것”이라 결론내린 이 남자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남자였다. 그 모습이 무슨 캐릭터를 맡아도 늘 젠틀한 면모를 놓지 않았던 김주혁과 참 많이 닮아 보였다. 홍상수 감독이 영수 역으로 그를 캐스팅한 것도, 한번도 ‘생떼를 쓰지 않았던’, 정도를 아는 남성성을 가진, 김주혁의 모습에서 찾아낸 1%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 큰 키의 김주혁이 목발을 짚은 불편한 상태로 연남동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는 장면. 당시 김주혁은 실제로 다쳐 목발을 짚은 채로 촬영에 임했는데, 민정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그 ‘걸림장치’ 덕분에 더 애잔하고 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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