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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립 투 이탈리아] 타비아니 형제, 데릭 저먼의 영화 속 사르데냐

유배지 혹은 목가적 유토피아

데릭 저먼의 <세바스찬>.

D. H. 로렌스는 1차대전 때 독일 스파이 혐의로 영국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았다. 로렌스의 아내 프리다 위클이 독일인이었던 게 혐의를 더욱 굳혔다. 위클은 6살 연상이었고, ‘광부의 아들’인 로렌스와 달리 귀족 출신이었다. 로렌스의 출세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묘사된 상층부 여성과 사냥터지기 남성 사이의 신분 격차를 넘어선 사랑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별로 다르지 않다. 평범한 커플이 아니었던 이들은 종종 주위의 질시를 받았다. 로렌스 부부는 결국 군의 수사 압력을 이기지 못해 자발적인 망명길에 오른다. 1919년 이들은 영국을 떠났고, 1922년 이후 미국에 정착하기까지 세상을 유랑하는 삶을 산다. 로렌스 부부가 영국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이탈리아였다. 중부 이탈리아, 카프리, 시칠리아를 거쳐 도착한 곳이 지중해 서쪽의 섬 사르데냐(Sardegna)이다. 로렌스는 이곳에서 자신이 사실은 ‘여행’이 아니라 ‘유배’의 운명에 놓였다는 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로렌스의 눈에 비친 사르데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서 길을 잃은 곳,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황무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바다와 사르데냐>, D. H. 로렌스 지음).

D. H. 로렌스의 눈에 비친 황무지

로렌스 부부는 시칠리아를 여행한 뒤, 1921년 1월 사르데냐섬에 도착했다. 로렌스는 칼리아리(Cagliari) 항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섬의 헐벗은 풍경에 압도당하고 만다. 날카롭고 삭막한 풍경들, 이를테면 나무가 별로 없어 차라리 사막처럼 보이는 들판과 산들의 황량한 모습은 여행자의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로렌스의 눈에 비친 사르데냐는 너무 가난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보다 더 가난한 곳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부랑자나 다름없는 남자들이 무심히 외국인을 쳐다보는 모습에서 경계심 혹은 호기심보다는 체념의 무관심을 읽는다. 로렌스에게 사르데냐는 ‘시간과 역사의 바깥’에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로렌스가 묘사한 황무지로서의 사르데냐가 세계 영화사에서 전환점을 맞는 건 타비아니 형제의 <파드레 파드로네>(1977) 덕분이다(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파드레 파드로네>는 사르데냐 출신 언어학자인 가비노 레다의 자전적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레다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친에 의해 강제로 교실에서 끌려나온 뒤, 20살이 될 때까지 양치기로 지냈다. 부친의 말에 따르면 ‘교육이 의무’가 아니라 ‘가난이 의무’인 까닭에 아들이 6살이 됐으니, 자기처럼 산에서 양치기를 하며 살림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무학에 문맹인 가비노 레다는 20살에 군에 입대하면서 처음 집을 떠났고, 군 동료의 도움으로 글을 익히고(그 동료 역으로 난니 모레티가 나온다), 대학에 진학한 뒤 결국 사르데냐 지역어 전문가로서 언어학자의 삶을 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가난이 의무’라는 레다 부친의 말은 사르데냐의 운명을 압축하고 있다(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 안토니오 그람시도 사르데냐 출신이다). 소년 레다는 산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해 혼자 남는다. 밤이면 어둠과 동물들의 울음 때문에 죽음 같은 공포가 몰려오는데, 아버지의 매질이 더 무서워 동네로 내려갈 수도 없다. 로렌스에게 사르데냐는 잠시 머무는 유배지였다면, 소년 레다에겐 그곳은 버텨내야 하는 일상의 터였다. 그런 생활을 20살이 될 때까지 이어간다. 돌산은 늘 날카롭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갑고, 사방엔 양들뿐이다. 매일 젖을 짜고 양들을 방목하는 반복되는 일상, 내일도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을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가난한’ 시간에 대한 체념은 ‘시간과 역사의 바깥’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게 한다. 타비아니 형제는 사르데냐의 잔인한 자연을 소년 레다의 역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르데냐는 로렌스가 썼던대로 형벌의 땅처럼, 혹은 유배지로 기억되는 것이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사르데냐섬이 주요 배경이다. 가운데는 본드 역의 로저 무어.

영화 속 과거와 다른 현재의 사르데냐

영국의 혁신적 감독 데릭 저먼은 장편 데뷔작 <세바스찬>(1976)에서 사르데냐를 실제로 유배지로 그린다. 화살에 맞아 순교한 성인 세바스찬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서, 저먼이 ‘영화적’ 순교지로 설정한 곳이 바로 사르데냐다. 로마 황제의 근위대 장교인 세바스찬은 당시 금지된 종교인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성인은 무명의 땅으로 추방됐다. <파드레 파드로네>가 사르데냐의 산악지대를 주로 그렸다면, <세바스찬>은 섬의 해안지대를 주로 그린다. 바닷가의 황량한 벌판에는 로마제국의 수비대가 파견돼 있다. 성인은 이곳에 사병으로 강등된 뒤 유배됐다. 메마른 땅, 날카로운 돌들, 헐벗은 산과 들판 등 황량한 느낌이 드는 것은 <파드레 파드로네>와 비슷하다. 그나마 옆에 물이 있다는 게 다른 점이다.

에로티시즘을 상징하는 물이 <세바스찬>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데릭 저먼은 데뷔작에서부터 자신의 일생의 테마인 동성애를 적극 표현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전사들이 물에서 맨몸으로 함께 어울리는 장면들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 열리는 것처럼, 혹은 그리스의 조각들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저먼은 여기에 성적 열정을 덧붙여놓았다. 성인 세바스찬은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무기를 버리고, 군사훈련 받기를 거부한다. 결국 금지된 종교를 문제 삼아, 성인은 사형에 처해진다. 이 사형 집행이 <세바스찬>의 마지막 장면이다. 수난을 상징하는 날카롭고 딱딱한 돌이 온 세상을 뒤덮은 사르데냐의 벌판에서다. 여기서 성인은 나무 기둥에 묶여있고, 전사들은 화살을 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전부 슬로모션으로 표현돼 있다. 누군가에겐 성인의 순교의 고통이, 또 타협을 거부한 순수한 정신이 천천히 각인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육체의 허무함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사르데냐의 황량한 벌판에서 촬영된 <세바스찬>의 마지막 10분은 역사적 종교화에 빗댈 정도로 숭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사르데냐는 영화 속 과거와는 달리 유명 관광지로 거듭났다. 지중해의 대표적인 섬 시칠리아가 대중적 관광지라면, 사르데냐는 부유층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다른 국가로부터의 접근성 때문인지, 특히 유럽 부자들이 최고급의 여름 휴양지로 이곳을 꼽는다. 푸른 바다와 황금빛 모래사장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붉은 사막>(1964)에서 ‘비현실적’인 동화 이야기를 펼칠 때, 그 배경으로 등장한 바다가 바로 사르데냐다. 그만큼 사르데냐의 바다는 ‘환상적’이다.

관광지로서의 사르데냐의 명성은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 이후 증폭됐다. ‘데탕트’ 시대를 맞아 영국과 옛 소련의 스파이들이 핵전쟁을 노리는 ‘전쟁광’에 맞서 합동 작전을 펼치는 스릴러다(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은 현대 정치의 불안을 예견한 듯하다). 핵잠수함이 주요 배경인 까닭에 영화는 주로 바다와 수중에서 전개되는데, 전반부의 폐쇄적인 공간을 벗어날 때 화면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곳이 사르데냐다.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들판을 거니는 양떼들은 사르데냐를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인 세상으로 바꾼 것 같다. 곧 사르데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지상의 낙원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다.

사르데냐와 관련해서, 영화사적으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작품은 비토리오 데세타 감독의 <오르고솔로의 산적들>(1960)이다(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신인감독상). 2차대전 이후 사르데냐의 산악지역 오르고솔로(Orgosolo)를 배경으로 한, 한명의 평범한 양치기가 어떻게 산적으로 변해갔는가에 대한 다큐드라마다. 가난한 양치기, 낭떠러지 같은 돌산들, 매일 산을 뛰다시피 양떼를 쫓는 험난한 노동 등이 사르데냐의 가파른 삶을 압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르고솔로의 산적들>은 무명의 섬 사르데냐에 영화적 ‘세례’를 한 셈이다. 이 작품 덕분에 사르데냐는 영화적 발견의 대상이 됐고,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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