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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 공간의 틈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응시하다
송경원 2018-01-03

당신의 마음이 읽어내는 당신만의

낯선 만큼 더 아름답다. <고스트 스토리>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연인과 헤어진 남자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다. 언뜻 상투적일 수 있는 소재지만 영화는 색다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 영화는 고요한 가운데 애잔하고 서늘하면서도 따스하다. 무엇보다 장르영화로 체감하기 힘들었던 시간과 기억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이건 러브 스토리일까. 호러영화일까. 그것도 아니면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는 영화일까.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이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영화를 선보였다. 이 매혹을 정의내리기란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은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여운은 좀처럼 씻겨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좀더 체험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서면 인터뷰와 함께 뒤늦은 고백을 전한다.

가끔 10살 무렵에 찍었던 사진을 들춰볼 때마다 낯선 느낌을 받는다. 익숙한 얼굴을 한 꼬마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거기 서 있는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간혹 남아 있다 해도 그게 진짜 내 기억인지 의심스럽다. 지금 시점에서 인과를 재구성하여 말이 되도록 이야기를 짜맞춘 쪽에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제멋대로 불쑥 치고 들어오는 단편적인 감각들이 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어린 시절 그 골목길을 다시 걸었다. 두꺼운 아스팔트로 덮이고 커다란 건물들의 그림자에 가려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하지만 문득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그날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골목길의 냄새는 기억이 났다. 담벼락을 타고 길게 늘어지는 햇볕의 온기가 아직 생생했고 골목길을 울리던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안다. 착각이다. 하지만 가끔 내가 그 장소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장소가 나를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골목 틈새마다 시간이 두껍게 쌓여 있고 조금만 들춰보는 수고를 하면 그날의 그 감각이 바로 어제처럼 되살아난다. 어쩌면 기억이란 지금의 감각을 더듬어내는 데 필요한 시간의 다른 이름일까. 낯선 공간을 익숙한 장소로 만들어주는 건 결국 그 장소와 엮인 나의 체험들이다. 흔적이나 얼룩이라고 해도 좋겠다. 여기 오래된 집에 새겨진 또 하나의 얼룩이 있다.

공간의 기억을 목격하다

<고스트 스토리>는 제목 그대로 유령처럼 떠도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유령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형상, 흰 천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집 안을 배회한다. 왜 유령은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나. 그 이전에 그것은 왜 유령이 되었나. 그 가운데 어떤 러브 스토리가 놓여 있다. 남자 C(케이시 애플렉)는 작곡가다. 그는 사랑하는 M(루니 마라)과 함께 교외의 작고 낡은 집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화로운 어느 아침 남자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홀로 남은 M은 슬픔에 잠겨 힘겨운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때 남자는 유령이 되어 깨어난다. 병원 영안실에서 무언가에 이끌린 듯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C는 M과 같은 공간에 머물지만 그때부터 전혀 다른 시간 속을 떠돈다. M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상처를 치유하고 집을 떠나는 동안에도 C의 유령은 항상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바라본다. M은 집을 떠나기 직전 쪽지에 무언가를 써서 벽 안 틈새에 끼워두곤 빈틈을 메운 후 떠난다. 이후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오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지만 C는 여전히 집을 떠돈다. 그러다 문득 쪽지를 꺼내려고 벽을 파기 시작한다.

이건 러브 스토리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C와 M은 사랑했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놨다. M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C는 그런 M을 지켜본다. 아마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 속에 갇힌 듯한 C는 M이 상처 입고 새살이 돋고 떠나가는 과정을 그저 바라보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까지라면 여느 러브 스토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M이 떠나고도 C는 영화 속을 떠돈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훨씬 더 긴 시간을 버텨야 한다. 상처의 기억을 흘려보내기 위해 애쓰는, 아니 애쓸 수 있는 M과 달리 C에게 허락된 시간은 우리의 감각과 다르다. 그는 마치 집의 화신, 아니 공간 그 자체가 된 듯 거기에 머물러 있다. 다른 가족이 집에 이사 오고, 떠나고, 누군가가 파티 장소로 삼고, 이윽고 집이 낡아 허물어진 후 그 자리에 빌딩이 들어 설 때까지 C의 유령은 어떤 말도,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수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지만 유령은 시간의 두께에서 비껴나 있는 것이다.

관객은 C가 견뎌내야 하는, 아니 견디는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 시간의 굴레를 목격해야 한다. 그 끝에 다다르는 건 인과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시간의 흐름이 남긴 얼룩이라고 해두자. 이 영화는 사랑과 고독, 공허와 상실, 덧없는 시간과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감각에 관한 얼룩이다. 우리는 그 얼룩을 정확히 기록하거나 시간순으로 복기하거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런 걸 원하는 영화도 아니다. 누군가는 그 얼룩의 형태를 보고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마주할 테고, 누군가는 유령으로 남겨진 자의 공허와 상실감을 발견할 것이다. 어떤 이는 공간과 장소에 대한 사유를 펼칠 것이고, 간혹 시간의 굴레를 하나의 우주까지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이 영화가 전에 없던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 감각을 실시간으로 재현시킨다는 점이다. 경이로운, 아름다운, 몽환적인, 애틋한, 뭐라 형언하기 힘들지만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마주한다. ‘무언가’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용서하기 바란다. 스크린과 관객 사이를 배회하는 유령처럼 그것의 정체는 아직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실감하는 방식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러티브 영화의 경우 짜임새 있는 사건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이해시킬 것이다. 마치 기억을 이야기의 형태로 조각하는 것처럼. <고스트 스토리>가 취하는 방식은 다르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어떨 때 보면 배우가 서 있다는 사실보다 실내의 문턱, 복도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배우 벤 포스터의 말처럼 감독은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공간 그 자체의 형상을 화면에 채워넣는 데 집중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방식이다. 우리가 침묵을 말할 수 없다면 그저 침묵으로 공간을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작은 소리가 침묵을 깨는 순간 역설적으로 침묵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것처럼 <고스트 스토리>는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멈춰 있는 존재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형상화한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이 감각하는 것을 투영했다고 해도 좋겠다. 영화 속 어떤 시간은 확장되어 있고 어떤 시간은 극단적으로 생략되며 간혹 되돌아가 처음과 겹치기도 한다.

C의 유령은 흘러가는 시간의 목격자다. 영화는 그에게 카메라를 고정하고 그의 주변을 수시로 점프시킨다. 모포를 뒤집어쓴 채 초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가는 유령의 모습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아낸 화면은 마치 시간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사건의 시간은 대부분 생략하고 대신 사건과 사건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 공간의 틈새에 카메라를 놓는다. 그 결과 여느 영화에서 빠르게 점프할 법한 시간을 긴 호흡으로 응시한다. 처음 오래된 집의 외경을 롱숏으로 바라보던 카메라는 집 밖으로 나와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가는 M을 바라본다. M이 집 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카메라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문다. 깊은 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C와 M을 부감으로 찍은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문다. 키스하는 순간을 찍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코를 부비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고 얼굴을 문대는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C가 유령이 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C의 시체가 놓인 영안실에서 모두가 자리를 비운 후 C의 유령이 일어나기 전까지, 비어 있는 혹은 기다리는 시간을 찍는다.

절정은 M이 친구가 가져온 파이를 먹는 장면이다. M은 C를 잃은 공허를 허기로 메우려는 듯 파이를 우걱우걱 퍼먹는다. 유령이 된 C는 그런 M을 가만히 바라본다. 무려 몇분에 걸쳐 먹는다와 바라본다는 두 가지 행위만을 수행하는 장면. 이 시간은 일상에서는 존재하는 시간이지만 대개 영화에서는 생략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소위 말하는 남겨진, 잉여의, 일상의 시간을 응시하여 영화 속 시간에 대한 우리의 굳은 감각에 균열을 낸다. 여기에 채워지는 건 시간이나 사건, 스토리가 아니라 감각이다. 한 호흡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무는 카메라를 통해 보이지 않는 감각을 형상화한다고 해도 좋겠다. M의 상실감, C의 고립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들이 그 장면 안에 휘몰아치며 관객이 각자의 체험과 해석으로 끄집어내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응시는 몹시 모호하고 그래서 명확하며 동시에 아름답다.

<고스트 스토리>는 공간의 틈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응시한다. 바라본다는 명제를 부각시키는 건 이 영화의 독특한 프레임이다. 1.33:1의 화면비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효과를 자아낸다. 하나는 지금 당신은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는 거라는 시선의 환기. 다시 말해 일정한 거리두기가 일어난다. 동시에 정반대로 상황에 깊숙이 몰입시키는 효과도 있다. 둥글게 처리된 네 귀퉁이의 모서리는 마치 아름다운 액자마냥 사랑스럽다. 정사각에 가까운 프레임은 공간을 양옆으로 펼치는 대신 깊숙이 파고든다. 인물들이 화면 안쪽으로 파고들 때의 우아한 동선은 보는 이를 공간 저 깊숙한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영화이되 아름다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고요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 압도한다. 이 모든 시공간을 하나로 묶는 사운드와 음악이 화면 위에 겹치면 관객은 마치 유령처럼 스크린 안과 밖을 배회할 수밖에 없다. 낡고 오래된 집이 터를 잡기 전부터 시작해 허물어져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공간을 거쳐간 모든 이들의 기억과 정념이 차곡차곡 쌓여 이윽고 하나의 장소로 거듭난다. 그렇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를 목격한다. 그 덩어리의 이름은 무엇인가. 유령인가. 기억인가. 역사인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대로

C의 유령이 명확한 의사를 표시하는 딱 한순간이 있다. 건너편의 또 다른 유령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두 유령은 분명한 대사를 주고받는다. “거기서 무얼 하나요.” “누굴 기다리고 있어요.” “누굴?” “기억이 안 나요.” 이들의 대화처럼 영화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M은 쪽지에 뭐라고 쓴 걸까’, ‘C의 유령은 어떤 존재인가’ 등 이야기상의 해석부터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건 누굴 위함인가’, ‘존재에는 기억과 흔적이 필요한 걸까’ 등의 철학적 명제. 심지어 ‘<피터와 드래곤>처럼 친절한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 왜,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유령 연기는 케이시 애플렉이 했을까’ 하는 사소한 궁금증까지 온갖 질문으로 넘쳐난다. 당연히 영화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다. 그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가서 이건 러브 스토리인가.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다면, 그렇다. 사랑, 상실, 추억, 기억, 뭐라 부르건 그건 화면 너머 스크린에 매우 아름다운 문양으로 얼룩져 있다. 제각각 보고자 하는 바대로 읽어낼 수 있는 이 얼룩들은 각자의 기억과 체험으로 열려 현재진행형의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우리가 지나온, 지나는 중인, 앞으로 지날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스크린 바깥까지 오래도록 퍼져나가는 기억이 교감은 무척 투명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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