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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드렁`’ 미학, `낄낄낄`의 발견
2002-04-17

신경숙의 이창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홍상수 영화를 좋아한다. 주변 사람이라고 해봐야 다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이들이니 문인이라는 편이 낫겠다. 그래서 이따금 홍상수 영화가 화제에 오른다. 프랑스에는 홍상수가 여럿인데 한국에는 한 사람뿐이라는 과격한 평을 하는 이도 있고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치부를 들킨 것 같아 화가 난다, 고 말하면서도 그의 영화가 개봉되면 어김없이 가서 보고 온다. 홍상수는 인간이 지닌 특성 중 타자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 치부에 렌즈를 정확히 갖다댄다. 어느 때는 참 가혹하네, 싶을 때도 있다. 우리가 갖은 의미를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환상과 꿈을 빼고 나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내가 위로받기 위해 덧칠해놓은 위선을 확인하러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내 친구들은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강북에서만 이십년을 살아 강남에서 영화를 보는 건 상상도 안 간다는 어떤 친구는 강남의 시사회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어떤 이는 생활의 발견이 개봉된 첫날, 출판사에 출근해서 얼굴만 비치고는 슬쩍 빠져나가 첫회를 보고 왔단다. 그의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고까지 했다. (농담 아니다, 내 귀로 분명 들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너무 궁금해서 빨리 가서 보지 않고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가 개봉 첫날에 보았다면 나는 씨네큐브에서 종영하는 날 가서 보았다. 함께 볼 사람을 찾는 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혼자 영화보는 즐거움을 모르는 바 아닌데도 왠지 생활의 발견은 누구랑 같이 보고 싶었다. 나랑 함께 사는 사람은 지난주 언제인가 날씨가 무척 화창한 날 제자들이 야외수업하자고 졸라서 제자들과 함께 보았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내가 전화를 걸어 생활의 발견 보러 가자고 하면 나는 봤는데… 나도 봤는데… 그랬다. 하나같이들 봤다고 해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홍상수 영화가 터졌나, 보군 생각했다. 전화를 걸기 시작해 이틀이나 지난 후에 용케도 아직 안 본 친구와 연결이 되어 씨네큐브에 갔는데 종영일이라고 하질 않는가. 게다가 관객이라고는 나와 내 친구를 비롯해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문인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일반 사람들도 좋아하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홍상수가 생활의 발견에 깔아놓은 유머는 심드렁한 유머다. 감독은 별로 웃기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제목부터 뒤퉁수를 치며 사람을 웃게 만든다. 그가 만든 영화의 다른 제목들도 그랬지만 생활의 발견은 더 윗길이다. 영화제목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뭐가 수상한 기분이었는데 야릇한 일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제목 너무 잘 지었다, 로 마음이 바뀌질 않는가. 심드렁한 홍상수의 위력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낄낄대며 웃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낄낄대는 웃음이지 시원한 웃음은 아니었다. 확 웃어버리기에는 화면이 거울로 보이는 까닭이다. 구질구질하고 수치스럽고 얄궂었던 일들, 가능하면 잊어버리고 싶었던 어색하고 자존심 구겼던 기억 속의 일들이 스멀스멀 안으로부터 재생되니 어찌 남의 일처럼 시원하게 웃고 말겠는지. 하지만 예지원 앞에서는 그것마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그녀는 시종일관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그녀의 걸음걸이나 말투 행동거지 앞에서 우리는 낄낄대지만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한 사람쯤은 꼭 있다. 별 감정 없다가 하룻밤 자고 난 뒤엔 그 동안의 모든 의미를 다 사랑으로 연관시키려는 그녀의 갖은 노력들은 우리를 시종일관 웃기다가 결국 경수로부터 미친년 소리나 듣지만 그게 우리 안의 감춰진 어떤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 하루가 지난 오전에 운전을 하다가 경수와 작별인사를 나누러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예지원의 얼굴이 떠올라 쿡, 웃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춤을 출 수가 있었을까. 생활의 발견은 내겐 예지원의 발견으로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