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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망막에 남은,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이여!
2002-04-19

김선주, 박평식, 김의찬의 3인3색 <집으로...> 이야기

형,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 속담이 저주스럽습니다. 사이버펑크를 얘기하는 시대에 무슨 놈의 얼어죽을 색깔론입니까. 홧술깨나 마신 듯한 후배가 전화로 분통을 터뜨린다. 어느 문학잡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나온 후배는 자기 본업이야말로 재야 영화평론가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바닥 인간들 수준이 본래 그런 걸 어떡하냐는 내 말투가 못마땅했는지 녀석은 영화판을 겨냥한다. 한국영화와 조폭의 인연 한번 질깁디다. 욕을 못해 환장했습니까. 도대체 왜 그리 거칠고 시끄럽죠? 세상도 나도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면 좋겠어요. 침묵이 그립습니다.

침묵이 그리운 녀석에게 침묵의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비를 맞으며 매표소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는 감독보다 행복한 이가 또 있을까. 부럽고 흐뭇한 풍경이었다. 닭백숙을 뜯을까, 자장면을 말아올릴까. <집으로…> 를 보고 나온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하던 끝에 중국집에 들어갔다. 아무리 자장면이 맛있어도 옆에서 짬뽕 국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면 자장면 시킨 걸 후회하게 된다. <신장개업> 에서 가장 실감나는 대목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영화의 리얼리티란 그렇게 사소한 데서 온다.

귀를 기울이게 하고, 마음을 녹이고

어때, 괜찮았어? 우선 상영시간이 짧은 게 맘에 들어요. 두 시간이 넘으면 화장실 생각부터 나니까요. <그린 마일>처럼 길어터진 영화는 광고문안에 ‘방광염 주의’를 넣어 마땅하죠. 가위질에 맛들인 수입업자들이 좋아할 소리는 그만 하고 소감이나 풀어봐. 제겐 한마디로 ‘횡재’입니다. 평론가는 곤혹스럽겠어요. 귀를 기울이게 하고 마음을 녹여주는데, 어느 구석을 뜯어보고 무얼 따지겠어요. 그윽하고도 짠한 영화야. ‘평생토록 생솔가지 태운 냉갈에 젖은 할머니’라는 네 싯구절이 생각나더라. 요강, 소쿠리, 뒷간, 은비녀, 30촉 백열등을 보며 제 나이를 떠올렸어요. 바쁘게 헤매고 많이 부대낀 세월이었죠.

<집으로…>는 한국영화사에 ‘할머니의 영화’로 기록될 거야.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다 마침내 화해하게 되는 <장마>의 두 할머니와 수몰된 고향을 떠나 콘크리트벽에 갇힌 <장남>의 노부부가 나왔으나, 대사 하나 없이 이토록 강한 인상을 남긴 할머니는 없었지.몇몇 장면에선 할머니가 적막처럼 정지된 느낌을 받았어요. 할머니 얼굴에서 그 마음에 패인 주름살이 잡히기도 하구요. 그런데 할머니의 동그란 손짓은 수화입니까. 글세, 관객들에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 손짓에 우는 사람이 많았을 걸.

어떤 대목이 좋았나요? 두 할머니가 초콜릿을 주고받는 장면이 아프더라. 노인들의 작별 인사에선 물기가 묻어나오지. 바느질 장면은요? 우리 할머니들이 그렇게 고독과 허기를 기우며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요. 오버하지마, 소통의 단계를 밟아가기 위한 설정이야. 키아로스타미도 탄복할 만한 할머니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잖아. 동네 사람들의 연기도 끝내주지만, 손자 역을 맡은 아이는 너무 많이 훈련을 받은 것 같아요. 나도 그점이 걸리더라. 소녀와의 소꿉놀이가 튀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고.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식의 동화 수준에 그칠 뻔한 소재를 이만큼 향기나게 만든 것은 감독의 외할머니에 대한 또렷한 기억 덕분일 거야. 사랑, 그리움, 부끄러움, 후회…. 말줄임표는 그래서 사용했는지도 몰라. 깡촌에서 미친 소까지 끌어들여 촬영하기가 쉽지 않았겠어요. 이정향 감독은 몸집도 작거니와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죠? 아마 깡다구로 버텼을걸.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도 악착 같은 기질이 보였어. 세상 노인들이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치매만은 비켜갔으면 해요. 그래, 우리도 곱고 씩씩하게 늙기로 하자.

말줄임표의 진실

횡재한 보답이라며 후배는 시 한편을 들려주었다. “나는 대처로 나왔다. /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갔다. /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 허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은 것을 보고 들을수록 /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 내 망막에는 마침내 /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 실루엣만 남았다. / 내게는 다시 이것이 /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들은 조금씩 살아나건만 그 얼굴이 생각나질 않는다. 꿈속에서도 모습은 비치질 않았다. 외할머니, 우리 어머니를 만나셨죠?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신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평안합니까. 여기는 아직도 야만의 바람이 그치질 않아요. ‘인간 폐광촌’입니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jeruel@empal.com▶ `액자` 속의 외할머니

▶ 마침내 망막에 남은,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이여!

▶ 상우는 반드시 큰 돈을 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