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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1 ~ 2001. 12. 31
2002-04-19

<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2001년 11월

“충남 금산에서 왔소”

이틀째의 자동차 신 촬영이다. 오늘은 앵글을 위해 숏메이커라는 이동형 크레인도 왔다. 트럭 위에 탐재된 숏메이커가 썩 멋지다. 코리아타운의 한 중심 올림픽 대로를 달리면서 촬영을 한다. 한국 선술집에서 나오는 한 취객이 영화 촬영 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면서 “재키챈!” 하고 외치다가 차 안에 차인표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어, 진짜 차인표다!” 하고 외친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앞뒤에서 우리를 호위한다. 무섭기만 하던 미국 경찰이 나를 호휘하는 것 같아 기분좋다. 신호대기를 하는데, 옆차의 미국 사람들이 신기한 듯 본다. 그들을 아주 늠름한 표정으로 본다. “그래, 내가 바로 한국 충남 금산 출신의 육상효다.”

2001년 12월

촬영은 싸움이다

촬영 12일째 배우들의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져간다. 차인표의 피부가 부쩍 거칠어졌다. 얼굴도 눈에 띄게 빠졌다. 배우도 힘든 직업이다. 차인표는 촬영기간 내내 쉬는 날이 하루도 없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그는 12시간씩 일해야 한다. 미국 노동청에서 조사 나오면 고용주가 잡혀갈 수 있는 노동시간이다. 그래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는다. 아침에 나오면 스탭들에게 일일이 인사부터 한다. 미국 스탭들은 자신들이 일해본 스타 중 가장 나이스한 스타라고 인기 만점이다. 저녁 촬영에서 스탭들에게 짜증을 냈더니 부쩍 피곤하다. 감정의 노출은 에너지를 소진하게 만든다. 이동숏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좋았는데도 카메라 조감독 존이 자꾸 포커스를 틀리게 했다. 촬영감독도 배우들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른다. 한바탕 짜증을 내고 혼자 앉아 있는데, 마티가 온다. 모든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려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나도 안다. 하지만 짜증은 짜증이다. 짜증은 그런 논리적인 생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라이팅 시간을 줄이려고 같은 방향의 숏들을 먼저 찍느라 생각의 부담은 한층 늘었다. 촬영 종료시간이 가까워 오면, 마티는 언제나 숏리스트를 들고와 무엇이 가장 희생하기에 적합한 컷이냐고 묻는 걸 잊지 않는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 시간이 안 돼 못 찍으면 내일 같은 장소로 다시 온다고 했더니, 마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러면 그뒤의 모든 스케줄이 바뀌어야 하고, 그러면 모든 로케이션의 약속 시간이 바뀌어야 하고, 그러면 모든 단역배우 스케줄들이 재조정돼야 하고…. 마티 놀라지 마라, 네가 늘 그러듯이 나두 한번 협박해본 거다. 괴롭다. 촬영은 곧잘 행복한 선택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지는 제약들과의 싸움이 된다.

젊은 남녀는 끊임없이 연애한다

분장 크리스탈에 대한 남자 스탭들의 암투는 최종적으로 브래드 피트를 닮은 붐맨 대니엘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다. 새벽 촬영에 주차장에서 같은 차에서 내리다가 날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 젊은 남녀들은 끊임없이 연애한다.

2001년 12월 23일

울지 마라 울고싶은 건 나다

라스베이거스 호텔을 나서는데, 프로듀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온다. 스탭들이 파업을 한단다. 애초에 사막신을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깐 찍는다고 얘기한 게 화근이었다. 그러고나서 촬영 계획표를 보니, 신이 세개나 된다. 스탭들은 일당을 두배로 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단다. 빡빡한 스케줄에 대한 그동안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일단 촬영지로 간다. 미국 스탭들이 아무도 안 오면 한국 스탭들만 데리고 찍을 것이다. 영화는 단순하다. 카메라와 배우만 있으면 찍을 수 있는 것이다.”

다 거짓말이다. 한국 스탭들은 홍보관계로 한국에서 온 스탭들이라 전혀 촬영일정이 될 수가 없다. 카메라와 배우만 있다고 어떻게 영화를 찍냐? 조명은 누가 하고, 분장은 누가 하고. 촬영지에 도착하니 그래도 주요 키스탭들은 와 있다. 그런데 대부분 조수들이 없다. 사운드 데이비드가 디에이티 녹음기를 옆구리에 차고, 붐대를 들고서 날 보고 씩 웃는다. 스크립터 린다 아줌마는 차가 고장나서 못 오는 거란다. 거짓말이다. 스탭들의 파업에 동참하면서 나와의 관계를 고려해 차가 고장나서 못 온다고 둘러댄 것이다. 촬영감독 필과 조감독 마티가 단순 스탭이 아니라 이 영화의 주인으로서 나와 같은 입장에 있어주는 게 눈물나게 고맙다. 아쉬운 대로 온 그립 중에서 한명을 뽑아서 카메라 조수로 임명했다. 마티는 스크립 보드를 직접 들었다. 필이 분위기를 띄우려고 “우리가 대학교 때 영화를 시작할 때는 다 이렇게 찍었다”고 농담을 한다. 문제는 또 있다. 주연배우의 의상을 싣은 차가 오지 않는다. 분장 엘리자베스가 새로 산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섰는데, 의상 마브가 의상을 들고 그 차를 탔단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여자다. 사막 지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데다 차를 새로 샀으니 운전 서투른 건 물론이고. 해가 저물어 간다. 제작부 케빈이 휴대폰에 대고, 거의 울 듯이 외치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지리를 알려주고 있다. 프리프로덕션 시작부터 사무실 행정보조로 일했던 얌전하고 착한 청년이다. 그러나 좀처럼 엘리자베스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상이 필요없는 롱숏을 먼저 찍고, 의상 박스를 뒤져서 색깔이 같은 옷을 찾아서 입히고, 가능하면 와이드 앵글로 찍어야 한다. 촬영 직전에 엘리자베스가 도착했다. 프로듀서가 달려가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한 가장 험한 욕을 해댄다. 의상 마브가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자동차 촬영이 시작됐다. 저녁 광선이 그래도 아직은 아름답다. 3일간의 크리스마스 휴가에 들어가는 스탭들이 서로를 안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엄마, 아빠의 촬영을 따라 라스베이거스까지 다라온 지민이가 눈물을 흘린다. “임마, 왜 울어.” “몰라 슬퍼서.” 울지 마라.울고 싶은 건 나다.

차인표를 메다꽂는다, 고통스럽다

벌써 차인표를 매트 바닥에 30번은 넘게 메다꽂았다. 촬영장으로 오기 전 몸살로 병원에 갔다 왔다고 들었다. 그의 얼굴에 어린 고통스런 표정을 안 보려고 연기 얘기할 때도 자꾸 다른 데를 쳐다봤다. 한번 매트 위로 넘어질 때마다 그만큼씩 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앞으로도 태권도장 대결 신 완성을 위해서는 그를 얼마나 더 매트 위로 메다꽂을지 모른다. 고통스럽다.

2001년 12월 31일"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아직도?"

아침 7시 20분. 지난 장면에서 빠진 차인표의 클로즈업을 찍었다. 내가 "오우케이"를 부르자, 스탭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린다. 조감독이 "픽쳐랩!"하고 크게 외친다. 차인표가 곧장 내게로 와서 날 포옹한다. 이 장면을 여러 번 머릿속에 그렸다. 실제로 이 장면이 왔을 때 너무 감정적이 되지 않도록 날 준비시키기 위해서다. 초라영 전에는 촬영을 시작하는 날이 안 올 줄 알았다. 그리고 촬영을 시작한 뒤에는 이렇게 촬영을 끝내는 날이 안이 안 올 줄 알았다. 조감독이 한명씩 스탭들을 호명한다. 그럴 때마다 스탭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필이 내게로 왔다. 다시 포옹한다. 아내, 아니 이제는 현지프로듀서라고 불러도 마땅한 이윤정이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의 첫 영화이자, 자신의 첫 영화의 촬영을 이제 막 마쳤다. 의상 리사가 아서 날 바라보낟. 의상연결 문제로 촬영 중간에 나와 싸운 이유로 일에 관게된 간단한 말 이외에는 거의 안 했다. 그녀가 나의 포옹을 기다린다. 포옹하는데 그녀도 울음을 터뜨린다. 거칠기만 했던 이 큰 몸집의 미국 아줌마도 울 때는 소녀 같다. 김윤진, 박광정, 찰리 천 세 배우가 이 순간을 같이 할 수 없어서 무척 아쉽다. 홍지용 프로듀서가 저만치 위에서 날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젊은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축하 방식이다. 누군가 스탭들에게 한국 맥주를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촬영이 끝났다. 연초 3일을 쉬고 바로 편집에 들어가야 한다. 첫 영화의 촬영을 미국에서 끝냈다. 미국에서 하는 것이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 특별히 더 힘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 어디서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예산과 시간에 싸울 것이다. 조감독 마티가 온다. 자신이 절대로 불가능하리라고 장담했던, 31개의 로케이션을 30일의 촬영기간 동안 찍었다. 스토리보드상으로 계획했던 컷들도 거의 다 찍었다.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냐?" "이런 영화를 다시 해도 난 또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내 일이니까." 멍한 표정으로 서서 스탭들의 환호를 보고 있는 내게 제작부 한명이 의자를 갖다준다. 앉는다. 졸린다. 30일간의 전투가 끝났다.▶ <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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