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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10 ~
2002-04-19

<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2001년 10월

감독 ‘쌩 효 육’

사무실에 입주했다. 한평도 안 되는 아주 비좁은 사무실을 감독방이라고. 내 표정을 보고 미국 프로듀서가 그래도 창 밖으로 보이는 게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라고 너스레를 떨고 나간다. 그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본다. 난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605번지에서 태어났다. 요즘 드라마 <상도>의 촬영지가 돼서 갑자기 고향이 유명해졌단다. 그래 여기가 할리우드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605번지 육상효 많이 컸다. 파라마운트 스튜디오가 바로 건너 보이지 않는가. 난 내 방에서 그 스튜디오를 건너다 본다. 이기성 조감독이 와서 멋지게 만들어진 사무실 팻말을 자랑한다. 아이언 팜, 감독 쌩 효 육.

널 상처주지 않으면 내가 상처받는다

스토리보드 영의 그림 그리는 속도가 오늘은 유난히 느리다. 말은 안 하지만 내 컷 아이디어를 맘에 안 들어하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는 거다. 봉황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아랴. 구조와 캐릭터. 이게 이 코미디의 두축이다. 캐릭터는 구조에 의해서 첫 장면부터 정교하게 짜여진다. 그렇게 짜인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논리 속에서 움직이며 관객에게 웃음과 슬픔을 줄 것이다. 난 한 장면의 개그로 웃기는 코미디는 하지 않는다. 빌리 와일더가 그랬던 것처럼 코미디의 기본 요소는 웃음과 슬픔의 아이러니다. 코미디의 가장 큰 재산은 우리가 다 아는 우리 스스로의 약점이다. 코미디는 그걸 통해서 비로소 진실에 다다른다. 그렇게 될 때 코미디는 어떤 다른 장르의 영화보다도 진실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리처드 커티스의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을 봐라. 그의 코미디가 따뜻한 건 그가 코미디를 통해서 인생에 대해 발언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에서 패럴리 브러더스까지 아우르는 그의 코믹센스는 때로는 웅장하기까지 하다. 캐릭터 코미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요 인물들의 등장이다. 지금 네가 그리는 건 지니의 등장이다. 지니는 아이언 팜의 시선 속에서 관객에게 드러난다. 그것은 캐릭터 지니의 최초 등장이자. 지니 역을 맡은 배우 김윤진의 이 영화 속 최초 등장이다. 여전사가 로맨틱코미디의 여주인공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말한 대로 그려라. 내 생각이, 아니 내 꿈이 그렇다는 거다. 아니꼬워도 참아라. 그랬다가 네가 감독할 때 네 영화로 내가 틀렸다고 말하라. 미안하다. 널 상처주지 않으면 내가 상처받는다. 영화감독이란 직업은 그런 거다. 남에게 상처주지 않으면 자신이 상처받는.

이걸 늘리면 저걸 줄이고

고성도, 이천우 두명의 스탭이 한국에서 왔다. 고성도는 프로덕션 제반기능을 도울 거고, 이천우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단다. 그들과 같이 들어와야 할 배우들이 이번에 들어오지 못했다. 미국쪽 비자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애초에 변호사를 믿지 말었어야 했는데, 스토리보드에 신경쓰는 사이 변호사 자식이 일을 망쳤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조감독 이기성이 엉엉 운다. 현지 프로듀서 이윤정은 아침부터 변호사 사무실에 진치고 있단다. 멱살이라도 잡고 이민국으로 끌고 가서 오늘 중으로 받아내겠단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될 거 같진 않다. 늘 정겨운 후배들인 고성도, 이천우가 오늘은 별로 안 반갑다. 배우가 없으면 영화는 찍지 못한다. 비자가 늦어지는 것만도 수백 가지의 문제를 만들어낸다. 촬영일정의 일주일 연기가 불가피하다. 미국 프로듀서들은 그렇게 될 경우 하루 5천달러가 들어가는 프리프로덕션 일정이 늘어나서 촬영 기간을 줄여야 된단다. 저 인간들은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예산을 잡고 늘어진다. 이걸 늘리면 저걸 줄일 수밖에 없다고. 장비를 하나 늘리면 엑스트라 명 수를 줄일 수밖에 없고, 로케이션을 늘리면 스탭 숫자를 줄여야 되고. 차량 신을 늘리면 미술 규모를 줄여야 되고. 말은 늘 항변할 수 없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리허설 날짜도 이틀이 줄어든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은 배우들과의 사전조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촬영의 연기는 영화의 마지막 촬영이 크리스마스를 넘기게 만든다. 미국의 본격적인 홀리데이 시즌이다. 스탭들의 보수도 다 두배로 뛸 것이다. 그러면 저 프로듀서들은 내게로 와서 또 뭘 줄이자고 할지.

배우들의 표정 찾기

차인표의 기본 표정을 찾았다. 입을 약간 작게 오므리고, 눈빛에 힘을 주자. 그 표정이 순수함, 집념, 내 방식의 용어로 부조리한 집념을 보여준다. 표정을 찾고 난 뒤에 한결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 김윤진은 물리적으로 목소리를 반피치 올리라는 나의 주문을 부자연스러워 한다. 정통 드라마적인 호흡으로 연기하면 김윤진의 새로운 이미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치 연설처럼 대사는 빠르게 다소 불안한 호흡을 가지고 진행돼야 진짜 지니가 된다. 목소리를 부자연스럽게 올리지 말고, 그 느낌만 가지고 평소의 목소리를 살리기로 한다. 그러니 금방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흐뭇하다. 배우에 대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박광정 선배는 연극연출도 많이 했고, 나보다도 연기에 대해 더 많이 안다. 그래도 나는 그 앞에서 내가 더 많이 아는 것처럼 하루 종일 헛폼을 쟀다. 전라도 사투리 톤을 좀 넣어보자는 건 박 선배의 제안이다. 그러니까 동석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내 제안이 아니라 좀 아니꼽지만 그래도 그게 맞는 걸 어찌하랴.

스탭들을 엉터리 영어에 적응시키기

촬영기사 필과 하루 종일 숏리스트 가지고 회의하다. 내가 처음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느꼈던 느낌들을 얘기했다. 그때의 빛이나 공간에 대한, 이방인으로서의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다. 지니의 집은 오렌지, 동석의 집은 회색, 지니의 바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옐로 톤의 조명이 밑에서… 등등. 영어로 한참 얘기하다보면 나중에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촬영이 계속되는 한 이런 영어 대화의 피곤함은 지속되겠지. 방법은 하나. 중요스탭들을 내 엉터리 영어에 빨리 적응시키는 것이다. 단어 하나만 얘기해도 알아들을 만큼.그래도 기본 원칙들을 정리했다. 아주 베이식한, 그러니까 단순한 촬영을 해줄 것. 다시 말하면 불필요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자제하고, 너무 패셔너블한 앵글도 자제할 것. 유기적(Organic) 화면 구성, 비주얼의 초점을 비주얼 자체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에 집중할 것. 리듬이 늘어지는 것은 후반작업에서 빠르고, 역시 유기적인 편집으로 보강될 것이다. 몇개의 시각적 개그들은 부자연스런 특수효과나 옵티컬을 전혀 배제하고, 가장 기본적인 필름과 카메라의 성격, 그리고 배우의 움직임으로 구성할 것임. 컬러의 컨셉에 대해 항상, 아무리 바빠도 잊지 말 것. 햇빛에 대해 자신이 느꼈던 느낌들을 항상 유지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코미디영화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람.

아름다운 코미디를 만들자

첫번째 프로덕션 미팅. 30명쯤 되는 키스탭들이 회의실에 둘러앉았다. 시나리오를 장면별로 훑어가면서 거기에 연관되는 모든 요소들을 점검한다. 분장 엘리자베스가 아이언 팜과 동석의 얼굴상처 연결문제로 자꾸 아까부터 신경을 거스른다. “연결은 신경쓰지 마라. 이 몽타주에서 그들의 상처는 느낌이지 하등 연결과 관계될 것이 없다”고 수차례 얘기했는데도, “그래도 시나리오상의 날짜로 바로 다음날인데 어떻게 얼굴의 상처가 없어질 수가 있으면, 그 전날인데 어떻게 더 심해질 수가 있어요?” 제기랄, 그놈에 스크립 데이는 늘 나를 괴롭힌다. 시나리오상의 모든 장면에 이들은 날짜를 붙인다. 이 신은 같은 날이냐? 다음날이냐? 며칠 뒤면 실제로 며칠이냐 흘렀냐? 어떤 때는 생각없이 얘기하면 그것이 모든 스탭들에게 스크립 데이의 원칙이 돼서 분장, 의상, 소품, 심지어 촬영 라이팅 조건까지도 결정돼버린다. 그것들은 때에 따라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나올 수도 있다. 스크립 데이에 짜증내는 나에게 조감독이 말한다. “감독, 그러면 내일 다시 처음부터 스크립 데이를 조정하자.” 모든 스탭들이 나를 압박하기 위해 모인 것 같다. 4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 끝에 조감독이 나보고 프로덕션을 시작하는 소감을 한마디 해달란다. 미국에 온 지 3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다중을 상대로 하는 영어에는 자신이 없다. “에… 한국에서 많은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우리의 프로덕션을… 에… 그러니까 지켜보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가 미국에서 모인 최고의… 에… 그러니까… 팀이라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 한국 스탭과 미국 스탭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가 없도록… 서로 신경을 쓰고… 그리고 다 같이 합심해서… 아름다운 코미디를 만들자.” 갑자기 스탭들이 숙연해진다. 저 중의 반은 내가 말한 내용 때문에 비장해지는 거지만, 저 중의 반은 내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몰라서 지금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다. 회의 끝.

“불가능하다”

프로덕션 하루 전이다. 아침 일찍 마티가 내 방문을 노크한다. 앉더니 하는 첫마디가 “이 스토리보드는 불가능하다”다. “왜?” “우리 스케줄에서 이 컷 수가 소화가 안 된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난 장편영화를 10편 했다. 이건 불가능하다. 컷 수를 줄이든지 촬영날짜를 늘리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내 입장에선 그 양쪽 다 불가능하다. 난 컷 수도 줄이지 않을 거고, 촬영일자는 내가 늘리고 싶어도 현 예산에서 늘릴 수 없다. 찍든지 못 찍든지 이 영화의 책임은 나니까 넌 현재 스케줄대로 진행해라.” 갑자기 마티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쌩, 컷 수가 적고도 훌륭하게 찍은 영화들이 많다.”

어라, 이 친구는 지금 월권을 하고 있다. “마티, 미학을 논하는 건 네 일이 아니다. 컷 수가 많아서 스케줄을 소화할 수 없다고 말하는 데까지가 네 일이다. 넌 지금 내 영화의 미학을 바꾸라고 하는 거다.” 내 방문을 박차고 나온다.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면서 흥분을 가라앉히자. 일단은 내 방에 장승처럼 버티고 앉은 저 조감독을 피하고 보자. 그리고 계획대로 내일 촬영을 시작한다.

이걸 위해 지난 2년을 달려왔나?

첫 촬영 날이다. 지민이가 “아빠 촬영 잘 하세요”라고 어색하게 쓴 카드를 줬다. 주머니에 단단히 넣었다. 이윤정과 차를 타고 다운타운 뒷골목의 첫 촬영지로 향한다. 제2 조감독 스퀴럴이 내가 어디 있냐고 계속 휴대폰으로 묻는다. 걱정하지 마라. 난 이날을 위해서 지난 2년을 버텨왔다. 내가 촬영지를 못 찾아서 촬영을 못하는 일은 없을 거다. 도착하니 스탭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준비를 하고 있다. 첫 컷은 버스정류장 매스터 컷이다. 버스가 프레임 인 해야 되는데, 교통신호 통제에 대한 허가가 없어, 자연적으로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매테이크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버스가 잘못됐다. 수송부장 빌이 내게 보여준 두개의 버스 샘플 중에서 저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빌이 달려온다. 자신도 분명히 다른 걸 주문했는데, 저 버스가 왔단다. 프로듀서 아만드가 왔다. 조감독 마티도 달려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지금 버스를 다시 바꾸려면 오늘치 촬영분을 끝낼 수가 없단다. 침묵, 긴장. “미술 마들라를 불러와라.” 마들라에게 시간이 허용하는 한 이 버스를 최대한 다른 버스처럼 보이게 만들어주라고 말한다. 드디어 프로듀서, 조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좋은 결정이다.” 좋은 결정 좋아하고 있네. 난 속이 바짝바짝 탄다. 이윤정이 속상한 얼굴이다. 스퀴럴이 엑스트라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온다. 그들에게 한참 연기지시를 했는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맙소사, 흥분했나보다. 나 지금 그들에게 한국말을 하고 있다. 버스정류장 신을 찍고, 바로 그 버스에 타서 버스 신들을 찍기 시작한다. 촬영 버스가 앞에서 가고, 의상, 분장 그립 등이 탄 버스가 뒤를 다른다. 밖의 풍경을 찾아서 코리아타운을 돌다가, 다시 좀더 미국적인 풍경을 찾아서 서쪽으로 간다. 낡은 버스가 내는 엔진 소음에 사운드 데이비드가 울상이다. 키그립 다니엘은 반사판을 들고 움직이는 버스 속에서 중심을 잡느라 애쓴다. “지금 우리는 계획보다 30분 늦게 진행되고 있다.” 고맙기도 하지, 마티가 한 시간 간격으로 시간진행상황을 나에게 알려준다. 해가 다른 날보다 일찍 들어갈 것 같다는 공포의 협박도 해댄다. 버스 신을 찍고, 계속 그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 고가도로 밑 신을 찍으러 이동한다. 다른 스탭들은 저녁을 먹고, 주요 스탭만 고가도로 위, 폐허 신을 찍으러 이동한다. 햇빛이 30분 남았다. 촬영감독 필이 불안한 얼굴이다. 차에서 내리는 차인표의 달리 클로즈업을 먼저 찍고 부랴부랴 카메라를 언덕 위로 옮겨서 부감 와이드 숏을 찍는다. 빛이 너무 없다. 필이 셔터스피드를 반으로 내리자고 한다. 어차피 배우들의 움직임이 없으니 상관없고, 그러면 노출을 조금 늘릴 수 있으니. 그러면 엑스트라는 쓸 수가 없다. 엑스트라가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폐허에 망연자실한 아이언 팜의 뒤로 날씬한 백인 미녀가 아주 섹시한 조깅복을 입고 달리게 하고 싶었다. 그 엑스트라는 아까부터 핫팬츠 조깅복을 입고 떨고 있었다. 할 수 없다. 엑스트라 빼고, 셔터스피드를 내리자. 바로 언덕을 내려가 고가도로 밑 신 야간 촬영을 시작한다. 박 선배의 대사가 아주 긴 신이다. 수십번의 테이크 속에서도 박 선배는 거의 틀리지 않는다. 미국 스탭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도 박 선배의 연기에 감탄한다. 드디어 첫날 촬영이 끝났다. 내 첫번째 장편영화의 첫날이고, 미국 촬영의 첫날이다. 장비를 챙기느라 정신없는 스탭들 사이에서 담배를 피우고 망연자실해 앉아 있다. 이상하게 슬프다. 이걸 위해서 난 지난 2년을 달려온 건가?▶ <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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