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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비엔날레
2002-04-19

인간 없는 인간 내면의 극사실화

라울 세르베 회고전

벨기에 출신의 라울 세르베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아우르는 실험적인 이미지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다. 1960년 <항구의 불빛>으로 데뷔한 이래 14편에 이르도록, 그의 애니메이션은 현대 문명에서 파생된 억압과 부조리에 대한 우화이자 셀과 종이, 연필과 잉크, 실사영상, 컴퓨터그래픽 등 갖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휘두른 상상화였다. 다섯살 때 이미 아버지의 소장 필름을 뒤적이며 애니메이션의 마술을 궁금해했다는 그가 본격적인 탐사에 나선 것은, 겐트의 왕립예술학교에서 회화와 영화를 수학한 뒤다. <항구의 불빛>, 거리 악사의 쓸쓸한 삶을 그린 <잘못된 음표> 등 초기작이 낭만주의적인 여운을 지녔다면, 65년작 <크로모포비아>부터는 풍자의 날이 예리해졌다.

모습도, 움직임도 천편일률적인 회색 군대에 모든 색깔과 다양성을 박탈당한 나라의 사람들이 자유를 회복해가는 싸움의 과정을 만화적으로 그린 <크로모포비아>는 획일적인 질서와 권력에 대한 우화. 낚이는 거라곤 생선뼈뿐인 황량한 미래풍 도시 앞바다에 나타난 반인반어의 사이렌이, 이내 감시자 같은 기계구조물에 의해 처단당하는 <사이렌> 역시 마찬가지다. 최고의 감독이라는 골드프레임이 자신의 그림자마저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골드프레임>의 위험한 독선이나 강대국이 가스 신무기를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국민 모두가 날개 달린 돌연변이로 변해 결국 죽고 마는 나라의 운명을 그린 칸영화제 수상작 <오퍼레이션 X-70>의 폭력적인 권위 역시 비판의 대상. “인간을 위협하는 편견과 권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고”는 세르베의 작품세계에 일관된 시선이다.

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여인을 구해준 남자가, 알고보니 탐욕의 신 ‘하피’인 그 존재의 무지막지한 식욕에 하반신까지 먹히고 만다는 <하르피아>, 시계와 카메라 등 시간을 인식하는 모든 것을 금지함으로써 개인을 통제하는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를 다룬 장편애니메이션 <탁산드리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실사배우를 촬영한 영상과 셀애니메이션, 일부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이 두 작품은 표현주의영화의 기괴한 명암과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낯선 이미지로 ‘세르베그라피’란 별칭을 얻으며 각각 칸과 안시에서 단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세르베의 유일한 장편인 <탁산드리아>와 9편의 단편을, 회고전에서 만날 수 있다.

페도르 키투르크 특별전

페도르 키투르크는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성장기를 풍요롭게 일궈온 선구적인 작가다. 혁명의 해인 1917년에 태어난 그는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과 같은 영화를 보며 자랐고,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따라간 독일에서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직후 디즈니의 <아기 돼지 삼형제>를 보고 애니메이션에 매료됐다는 그는, 3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튜디오인 소유즈멀트필름에서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다. 단편애니메이션을 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 이번 특별전에서는 데뷔작인 <바실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롯한 단편애니메이션 연출작 5편과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일찍부터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혁명의 꿈과 현실의 거리를 모두 지켜본 세대인 탓인지 키투르크의 작품은 이념적인 틀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바실리가…>는 밤새 파티와 부부싸움 등 이웃의 소음에 시달리다 못해 아침나절 아파트 앞에서 떠들던 두 여인을 냄비로 내려친 남자의 이야기.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현대인들의 이기심과 “늘 소란한” 러시아인들의 일상을 웃음으로 드러낸다. 콜라주 기법을 활용한 <프레임 속의 남자>는 관료화된 사회에 대한 뾰족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수작이다. 사회적인 경력 혹은 권력을 상징하는 프레임이, 상관의 헛기침에 무조건 박수를 친다거나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 만한 것을 내칠 때마다 더욱 두꺼워진다. 그게 결국 주인공의 모습까지 덮어버리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담배에 찌든 시나리오 작가의 고군분투부터 에이젠슈테인을 닮은 감독과 스탭들이 날씨에, 아역배우의 컨디션에 일희일비하다가 시사회 날 얼싸안고 울어버리기까지, <필름! 필름! 필름!>은 영화만들기의 과정을 발랄한 유머와 생기 넘치는 만화체로 보여주는 작품. 그 밖에 외딴 섬에 고립된 남자와 그가 ‘발견’된 뒤 몰려드는 매스컴, 교회, 장사꾼 등을 통해 문명의 속성을 풍자한 칸 그랑프리 수상작 <섬> <사자와 소> 등이 상영된다. 세계 주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자문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오토 앨더의 <다큐멘터리 페도르 키투르크>에서는, “손과 발의 움직임이 아니라 영혼의 움직임”을 만들어야 한다던 키투르크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체코 애니메이션 특별전

체코는 오랜 인형극의 전통에 바탕한 인형과 오브제 애니메이션의 세계적인 명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리 트른카, 브레티슬라프 포야르 등 거장들의 작품을 포함한 28편을 모은 이번 특별전에서는 체코 애니메이션의 명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듯. 우선 장편으로는 월트 디즈니에 비견되곤 하는 인형 애니메이션의 대가 이리 트른카의 <한여름밤의 꿈>과 <황제의 나이팅게일>, 그와 더불어 다양한 기법을 개척해온 카렐 제만의 <한스와 마리의 이야기> 등 3편이 상영된다. 유명한 셰익스피어 원작에 바탕을 둔 1959년작 <한여름밤의 꿈>은 체코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표정과 움직임이 크지 않은 인형의 특성을 고려한 연출은 정적이면서도, 손놀림과 같은 섬세한 표현과 정교한 세트, 음악 등으로 풍부한 정서를 전달한다. <한스와…>는 중세의 낭만적인 모험담을 섬세한 컷아웃의 질감으로 그려낸 작품. 세 요정의 수호를 받는 가난한 청년이 귀족들의 방해 등 갖은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이룬다. 그 밖에 상대를 거덜내고야 마는 가난의 화신을 지혜롭게 피해가는 성실한 가족 이야기인 <레이디 파버티> 같은 인형애니메이션, 전통적인 만화체를 활용한 차세대 작가 파벨 쿠츠키의 작품 등 다채로운 체코의 단편애니메이션들이 상영된다.

일본 단편애니메이션

구리 요지와 오카모토 다다나리, 다무라 시게루는 눈에 익은 ‘아니메’와는 또 다른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가들이다. 신문 만화가로 먼저 이름을 떨친 뒤 회화와 조각, 애니메이션과 실사영상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온 구리 요지는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1세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채 갖가지 방식으로 때리는 여자와 맞는 남자를 그린 <인간동물원>, 끊임없이 도망치는 남성과 그를 쫓는 여성을 그린 <사랑> 등 단순하고 만화적인 그림체로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된 성 이데올로기를 파헤친다. 인간의 육체를 해체하고 새가 새장을 먹어버리는 기괴한 이미지를 선의 움직임으로 이은 <방>의 초현실주의적인 세계 역시 그의 작품의 일부다. 2세대라 할 수 있는 오카모토 다다나리는 일본의 전통과 문화적 정서를 잘 살린 인형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은 작가. 늙은 무녀와 샤미센 반주에 맞춰 노래하며 병을 고치는 여우 오콘의 관계를 담은 <여우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인형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숲에 간 사냥꾼들이 들고양이들의 함정인 기묘한 레스토랑에 들어섰다가 잡아먹힐 뻔한다는 <주문이 많은 요리점>의 회화적인 색채와 질감도 눈길을 붙들어맨다.

다무라 시게루의 <은하의 물고기>는 그림책 작가이자 만화가로 특히 그래픽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많이 했던 작가의 장점이 살아 있는 작품. 은하수의 작은곰자리를 파괴하는 괴어와 싸우는 소년과 노인의 이야기이다. 단순하면서도 동화적인 그림체와 우주 같은 배경, CG애니메이션의 명료한 색감이 잘 어우러져 있다.

실험애니메이션, 어제와 오늘

실험애니메이션은 올해 애니메이션 비엔날레 중에서도 가장 야심찬 프로그램 중 하나다. 내러티브보다는 선과 면, 색채 자체의 조합과 움직임의 리듬, 문자 그대로 순수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내는 실험애니메이션은, 끊임없이 양식화하는 예술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얼핏 봐서는 동그라미와 세모, 주파수 같은 곡선의 흐름 등 갖가지 문양의 나열 같지만, 낯설고 역동적인 시청각적 경험과 함께 인식의 관성을 해체하는 영상은 영화제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실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과 유리 위에 기름으로 그린 추상 이미지들의 분방한 흐름이 만난 <모션 페인팅 No.1> <헝가리 무곡 #5>의 오스카 피싱어는 음악의 사운드와 리듬을 조형 요소들의 춤과 결합시킨다. 렌 라이는 <색채의 비명> <색채의 비행> 등에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암실에서 필름을 펼쳐놓고 스텐실과 컬러 젤, 섬유조직 등으로 덮은 뒤 노출시키는 다이렉트 필름으로 색채와 질감의 새로운 결을 발견한다. 이런 1920∼30년대 거장들의 작품부터 최근까지 쉼없이 이어지는 이미지 전복의 시도를 22편에 걸쳐 소개한다.

전쟁과 애니메이션, 한국 인디 애니 스페셜

‘전쟁과 영화’라는 올해 전주영화제의 주제를 이어받은 ‘전쟁과 애니메이션’에서는 지미 T. 무라카미의 장편애니메이션 <바람이 불 때>와 4편의 중·단편을 소개한다. <바람이 불 때>는 전원에서 평온한 노후를 보내던 부부의 일상이 핵전쟁에 의해 산산이 파괴되는 과정을 파스텔 톤의 그림체로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 <스노우맨>으로 낯익은 레이먼드 브릭스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와 함께 신사와 기모노를 입은 여인 등 시각효과와 실사영상을 적극 이용해 히로시마 원폭투하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담은 <부유하는 세계의 이야기>, 1차대전 중 크리스마스에 전투 대신 축구경기를 벌이는 영·독 양국 젊은이들의 실화를 그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 등이 상영된다.

한국 인디 애니 스페셜의 상영작은 모두 21편. 바쁜 엄마와 자신을 따돌리는 학교 친구들,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에서 소외된 채 옥상에서 별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조숙한 아이 요요의 내면을 서정적으로 드러낸 <요요지가>, 번번이 감옥 같은 초라한 방에서 깨어나지만 끊임없이 천사가 되어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남자의 집착을 좇는 3D애니메이션 <엔젤, 엔젤> 등 올해 자그레브와 안시의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본선에 오른 작품들을 비롯해 한국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화제작을 모았다. 황혜림 blauex@hani.co.kr

▶ 2002 전주국제영화제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회고전

▶ 크리스틴 버천 회고전 부문

▶ 아시아 독립영화포럼 부문

▶ 현재의 영화 부문

▶ 애니메이션 비엔날레

▶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 주간, 한국영화의 흐름

▶ 중국과 일본의 전쟁영화·어린이 영화궁전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