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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개봉 앞두고 서울 찾은 일본 감독 사카모토 준지
2002-04-24

“제작 전부터 내가 살해될 거라고들 하더군”

<케이티>(KT)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과 일본의 중견 감독 사카모토 준지가 연출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다. 한때 한국에선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로 여겨졌던 이 사건의 진실과, <멍텅구리 천사> <신 의리없는 전쟁> 등으로 일본사회에 비판적 시선을 던져온 사카모토 감독의 시각이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5월3일 개봉을 앞두고 최근 시사회를 통해 국내에서 첫선을 보인 <케이티>는 일반적인 예상을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에 속하는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과 일본 자위대 소령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들의 내면을 파헤친다는 점이나, 일본 군부나 사회의 움직임에 상당한 비중을 뒀다는 것 등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들을 내세워 거대한 역사와 조직에 희생당한 개인들의 운명을 논하는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물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평가도 얻었다.

교토에서 신작 <마이 하우스>를 촬영하다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랴부랴 한국을 찾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인상은 피곤해보였지만, 한국 관객의 반응이 못내 궁금했는지 두눈만큼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월드컵 이전에 한국과 일본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입을 열었다.

<케이티>의 제작 배경을 밝혀달라.

요즘 들어 한·일 합작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주로 러브스토리다. 사랑을 매개로 한국과 일본이 하나가 된다는 안이한 테마를 담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무거운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기획안을 만들어 시네콰논을 찾아갔다. 이봉우 대표가 이에 호응했고, 결국 영화화하게 됐다. 사실 영화의 기획단계에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한 적이 있었다. 의외로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차가운 반응 일색이었다. 이런 영화가 흥행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이웃나라의 대통령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봤자 일본 관객이 공유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위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일수록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내 열망은 뜨거워졌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열정 하나로 밀고 나간 영화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고,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나리오 작업은 혼자서 진행했나.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발간된 나카조노 에이스케의 소설 <납치>를 원안으로 삼았다. 영화에는 사실과 픽션이 공존하는데, 당시 이 사건에 관련됐던 한국쪽 인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주로 미국에서 나온 자료를 참고했다.

역사적인 사실과 픽션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사실과 픽션의 비율이 몇 대 몇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도미타 소령과 미시마 유키오의 이야기는 픽션이다.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KCIA) 요원을 도왔던 자위대 장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DJ납치사건 3년 전인 70년,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했던 육상자위대의 방 앞에 한 장교가 국화꽃을 가져다 놓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하나의 인물이라는 것은 나의 상상이다. 그 외에 KCIA의 김차운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던 것이나, 배 안에서 KCIA 요원 중 하나가 DJ의 발에 ‘안심’이라고 손가락으로 글씨를 쓴 것 등은 이들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없었나.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의 발언을 들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도 국회 차원의 조사가 있었지만 자위대원의 증언은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가설만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미행과 도청 등 위험한 일도 많았다. 일본에선 제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카모토 준지라는 사람은 살해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케이티’(KT)란 무엇을 의미하나.

조사과정에서 입수한 한국쪽 자료엔 이 사건이 ‘KT공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김대중을 KT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이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암살을 암시하는 ‘Killing the Target’의 약어일 수도 있다. 나도 어떤 게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에서 상영되는 버전이 다르다고 하는데(한국판이 일본판보다 10분가량 짧다).

단지 상영시간이 다를 뿐이다. 원래 버전(138분)으로 일본에서는 5회씩 상영을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4회밖에 못한다더라. 그래서 영화 앞 부분을 약간 편집했다. 사실 두 가지 버전을 제작하는 것은 원래 의도된 바가 아니었다. 제작 초기에 이 영화는 순수한 일본 자본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구체화하려는 시점, 한국쪽(디지털 사이트 코리아)에서 합작을 제의해왔다. 한국 입장에선 한국의 관객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 관객에 맞는 편집본을 만들게 됐다.

다소 무거운 소재의 영화인데 어떤 고민이 있었나.

이 영화를 만들며 고민했던 부분 중 하나는 젊은 층이 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이 사건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관객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극장을 찾아 진실을 알았으면 했다. 때문에 봉인된 역사를 여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진실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오락적인 요소에 중점을 둬야 할까,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민했다. 하긴 나로선 할리우드영화처럼 오락에 치중한 영화는 만들지 못하니까….

일본에선 정치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다. <케이티>는 본격적인 정치영화를 지향한 것인가.

이 영화가 정치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기겠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터부를 깨고 싶었다. 천황제나 자위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이 영화는 정치적 경향을 띠거나 정치적 발언을 하려 했다는 점에서 기존 일본영화계에선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파는 이 영화를 좌파식으로 볼 것이고, 좌파는 우파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여러 가지 의문만을 제기하고 있다. 결정은 관객에게 맡기는 것이다.

극중에는 도미타 같은 극우파에서 진보적 성향의 DJ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다채로운 정치적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감독 본인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어느 인물쪽에 속하는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여러 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영화를 만드는 입장이므로 여러 인물들에 공감한다. 젊은 시절에는 온건한 좌파적 사고를 가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우파에 속하는 친구들도 많다. 어떤 하나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다만, 극중 도미타의 대사 중 “이런 일본은 싫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에 지녀왔던 이야기다.

“일본은 싫다”라니.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이지만, 일본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진 게 있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또 행하면서도 애매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교과서 문제도 그런 종류에 속하는 것이지만, 도미타가 속한 자위대에서도 그러한 부분은 드러난다. 그의 말마따나 자위대는 군대도 아니고 은자도 아니다. 이런 점들에 상당히 염증을 느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루면서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의 가해자들로 내세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적 영화이자 무거운 테마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개인을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30년 전 사건을 관객에게 전달하려면 개인들이 겪어왔던 고통이나 어려움을 영화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메시지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개인들이 조직에 의해 희생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메시지 말이다. 김차운과 도미타는 조직의 부속물이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둘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교감을 느끼고 친구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 김대중을 한국으로 데려가는 장면에선 조직과 국적의 차이에서 오는 본질적인 거리감도 느끼게 된다. 둘은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초 우리는 김대중의 보디가드인 재일한국인 김갑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다 보니 정의라는 문제가 부각됐다. 그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정의나 도덕 같은 것을 영화의 전편에 깔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정의조차도 의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영화와는 자못 다른 분위기다. 스스로 생각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전 작품들은 사회적 배경이라든가 개인들의 입장 같은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으나, 이 영화에선 개인들의 인생사나 입장에 초점을 맞췄다. 개인들이 자신을 울타리 짓는 국적이나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영향받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이 영화의 큰 테마는 인물 설정에서 드러난다. 김차운과 도미타뿐 아니라 DJ의 경호원인 재일동포 김갑수 등에서도 말이다. 이들은 사건에 관련을 맺고 있지만 이 일을 막을 수 없었고 이기지도 못했다. 이것이 테마였다.

대형 프로젝트라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있었을 것 같다.

홍보 팸플릿에 나와 있는 60억원이라는 수치는 마케팅비라든가 기타 비용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실제로 제작에는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다. 제작일수도 40일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자연 그리 대규모 예산이 든 것은 아니고 이에 대한 부담감도 많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이미 신작을 현재 교토에서 촬영중이다. <마이 하우스>라는 제목의 블랙코미디다.

현재 일본영화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흥행도 그저 그렇고, 대작도 많이 제작되지 않지만, 독립영화사에서 만드는 저예산 영화가 많이 나온다.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4월12일 서울에서 가진 인터뷰와 지난 2월16일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 내용을 종합한 내용입니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