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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1)
2002-04-24

시의 피가 흐르는 늑대인간, 영화의 달을 베어물다

유하 연표

1963 전북 고창에서 태어남

1981 세종대 영문학과 입학

1986 8mm 단편영화 <게으름의 찬양> 제작

1988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대학원 입학,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1989 시집 <武林일기> 출간

1990 16mm 단편영화 <시인 구보씨의 하루> 제작

1991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출간

1993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개봉,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출간

1995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출간

1999 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산문집 <재즈를 재미있게 듣는 법> 출간

2002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개봉

시인이자 영화감독 유하. 그는 언제나 대중문화 한복판에 있었다. 할리우드 고전영화와 배우 문희는 유년 시절의 첫사랑이었고, 이소룡과 무협지는 그의 사춘기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세운상가의 ‘빨간 책’과 과천경마장의 마권은 그의 욕망선을 부풀렸다. 흔히 대중문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예술로 여겨지는 시를 쓰던 그는 대중스타로 떠오르기도 했고, 대중문화의 꽃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첫 연출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실패 이후 대중문화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던 그가 10년 만에 새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들고 다시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유하 안에서 불온하게 동거해온 시와 영화의 나날들을 돌아본다. 편집자

“유하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나는 가설을 두개 세웠다. 첫번째 가설은 유하가 늑대인간이리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일 때, 그는 지극히 건강한 한 사람의 엔터테이너이다.(…) 그런데 그가 혼자일 때가 문제다. 그는 아주 기괴한 일을 한다.(…) 그는 시를 쓴다.”(‘유하의 정체에 관한 몇 가지 가설’ 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그와 절친한 소설가 김영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유하의 첫인상은 늑대인간을 연상케 한다. 187cm의 거구와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의 소유자인 그가 만약 험한 표정을 짓는다면 <엑스맨>의 울버린쯤은 오줌을 질질 뿌리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유하가 늑대인간으로 변신해 최근 벌인 ‘기괴한 일’은 시작(詩作)이 아니다. 한 남자와 여자의 기이한 사랑이야기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그러니까 장편 상업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여섯권의 시집과 두권의 산문집을 통해 작가로 잘 알려진 그의 이러한 변신은,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유하는 이미 자신의 시를 바탕으로 만든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감독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이 영화는 1993년 1월 개봉했지만, 제작은 92년에 이뤄졌으니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복귀는 딱 10년 만이라 할 수 있다. 잠깐, 그렇다면 혹시 그는 10년 주기로 영화감독으로 변신하는 늑대인간은 아닐까. 그러나 이같은 가설은 방증자료에 의해 부정되고 만다. 유하가 김성수 감독, 안판석 PD 등과 함께 만든 단편영화 <게으름의 찬양>이 나온 해가 86년이며, <시인 구보씨의 하루>라는 단편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90년이니 말이다. 이같은 의문을 갖고 파고들다보면, 유하에겐 언제든 영화감독으로 변신할 수 있는 유전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소룡, 모험의 세상으로 통하던 문

“내 마음속에 둥그렇게 휘돌던 키치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엔 언제나 이소룡이란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현 선생이 말한 내 키치중독의 시원은 다름 아닌 이소룡이었던 것이다.”(‘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중에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63년에 태어난 유하는 고향인 전북 고창 인근의 하나대라는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동네엔 TV가 흔치 않았을 뿐 아니라, 수신상태도 시원치 않았던 탓에 읍내 고창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첫사랑 문희의 촉촉한 눈매를, 왕우의 비장한 액션을, 장철과 호금전의 손길을 만났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꿀꺽 침을 삼키던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70년 서울 답십리로 이사온 그는 TV라는 대중문화의 거대한 바다에 다다른다. 거기서 “어린 날의 수많은 우상들. 황금박쥐, 배트맨, 왕거미, 밀림의 왕자 타잔, 김일, 이회택, 아르무감, 어니언스…”를 만난 그는 대중문화라는 이름의 유혹에 홀딱 반하게 된다.

그의 영원한 우상 이소룡을 만난 것은 조금 뒤였다. <정무문>을 보다가 10번씩 벌떡 자리에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을 정도로 그는 이소룡에게 매료됐다. 단숨에 명쾌하게 적을 해치우는 모습이며, 비장한 표정, ‘꺄오-’ 하는 ‘괴조음’(怪鳥音), 쌍절곤 묘기 등에 열광하며 유하는 단방에 이소룡 마니아가 됐다. 유하와 동세대들에게 이소룡이라는 존재는 “학교의 일상을 벗어나 기상천외한 모험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밀한 통로 같은 것”이었다. 이소룡에 관한 내용이라면 사소한 것도 화제가 됐던 당시, 그는 일본 잡지를 구하기 위해 세운상가와 명동의 중국대사관 앞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자연 내 관심은 온갖 키치적 풍경들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건들거릴 때였다. 난 거리의 한 점쟁이가 예언했던 귀인을 만났다. 그는 날 ‘0킬로그램의 요정’이라 불렀다.”(‘自序’ 중에서, <무림일기>)

“대학 4년 동안 남은 것이라면, 당구를 500까지 친 것과 친구들을 사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세종대 영문과에 81학번으로 입학해 동기생인 김성수 감독과 안판석 PD를 만났다. 영화, 문학, 스포츠, 그리고 이소룡까지 많은 부분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들은 친구가 됐고 훗날까지도 인연을 맺게 된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인물은 고 진이정 시인이다. 경희대를 다녔고 유하보다 두 학번 위였지만, 그가 쓴 민중시를 좋아했던 진이정은 그의 시작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영화와의 인연도 이들과 함께한 덕분에 만들어졌다. ‘0킬로그램의 요정’(당시 체중이 100kg가 넘어 바늘이 0을 가리켰던 유하에게 진이정 시인이 지어준 별명)인 유하가 군 면제 판정을 받고 시작에 몰두하는 동안 친구인 김 감독과 안 PD는 군대를 마쳤고, 마침내 다시 뭉친 이들은 진이정 시인의 주도 아래서 ‘반(反)영화’라는 동인을 결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게으름의 찬양>이었다. 대학 4학년 때 영어연극 연출을 했던 유하가 감독을 맡고, 진이정 시인이 시나리오를, 김성수 감독이 촬영을, 안판석 PD가 조명을 맡았다. 영화에 관심이 더욱 깊어진 유하는 “유현목 감독님을 만나뵈러”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유하에겐 시 또한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지방에서 외롭게 시를 집필하던 작은 할아버지를 보며 등단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익히 알았던 그는 의도적으로 시의 세계를 회피했었다. 하지만 영화에 본격 몰입하면서 그는 오히려 시와 가까워졌다. 대학 시절 민중시를 쓰면서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그는 영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시는 엄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엔 시의 소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어릴 때 추억이나 영화이야기도 시로 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무림일기’ 시리즈나 ‘영화사회학’ 연작은 이렇게 탄생했다.

두번째 시집, 첫 영화, ‘압구정동’

“<보디가드>와 <나 홀로 집에2> 매표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서 있는 사람들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들이 늘어선 자리와는 대조를 이루는 한산한 매표소 앞이었고, 그 위엔 내가 만든 영화의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미 영화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사실 나는 많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개봉이 임박할 무렵에도 흥행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영화관에서 시간 죽이기?’ 중에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첫 시집 <무림일기>로 키치세계의 포문을 열었던 유하는 91년 두번째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대중스타에 근접한다. 70년대 말 강남으로 이주해, 배밭과 빈가들이 가득하던 압구정동이 차츰 욕망의 결절점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그는 사실 소비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시들을 썼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것이 당시의 ‘오렌지 문화’와 엇물리며 대중문화의 포섭을 받게 된 것이었다. 각종 인터뷰에 불려나갔고 맥주 CF모델이나 라디오 DJ 제안까지 받았다. 압구정동 술집 주인들은 ‘압구정 문화의 전파자’라며 그에게 공짜 안주를 제공하기도 했다. 영화 판권을 팔라는 제의가 들어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접 연출을 하겠다는 ‘객기’를 부렸고, 결국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됐다.

애초 그가 생각했던 영화 <바람부는…>는 우디 앨런식 블랙코미디이자 패러디영화였다. ‘트라이’, ‘티코’ 광고나 <애니홀> <동방불패> 같은 영화를 패러디해 키치적 즐거움을 추구하려던 그의 계획은 상업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제작사에 의해 가로막혔다. 게다가 캐스팅까지 변경되면서 시나리오는 그의 생각과 상당히 다른 모양새를 갖게 됐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내 책임이었다. 경험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지만 내가 다 옳다고 생각했다.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하지 않았던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2)

▶ 유하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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