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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2)
2002-04-24

시의 피가 흐르는 늑대인간, 영화의 달을 베어물다

그치지 않은 열병

“나는 잠시, 돌고 도는 말의 원형 트랙/ 그 견고한 욕망과 권태에 절망을 견딘다// 세상이여, 이 허무맹랑했던 꿈을 용서해다오/ 말의 이미지의 라스베가스,/ 나는 결국 지금 나를 스쳐가는 저 바람에 베팅할 것이다”(‘천일馬화- 경마장의 함정’ 중에서, <천일馬화>)

영화 실패 뒤 그를 스타로 모셔갔던 “블랙홀 같은 대중문화”는 그를 비췄던 관심의 조명탑을 철수하기 시작한다. 따지고보면 키치에 대해 반성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했던 그가 키치에 너무 빠져들었던 탓이지만, “대중문화가 나를 요리했던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첫 영화의 씁쓸한 기억을 지우기도 전인 93년 11월 유하는 또 하나의 충격을 맞이한다. 대학 시절부터 그와 두 친구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장’이었던 진이정 시인이 급작스레 타계한 것.

커다란 정신적 방황이 시작됐다. 간간이 시를 쓰며 허한 나날을 보내던 그의 눈에 경마장의 트랙이 들어온 것도 그 무렵이다. 어딘가 중독돼야 하는 그의 성격 탓이었는지, 경마장에서 그는 “인생이 여기 있구나”라고 뇌까렸다. 95년부터 4년 동안 그는 경주가 열릴 때마다 경마장을 찾았다. 다른 ‘경마인’들처럼 수요일부터 들리는 말발굽 환청에 가슴이 떨렸고, 금요일이면 경마 예상지를 사들고 공부에 몰두했다. 어느 날 과천으로 향하던 발길을 끊었을 때, 그는 4년 통산 1천만원 손실이라는 ‘준수한’ 손익계산서를 들고 있었다.

“오랜 세월 나는 무수히 영화관을 나오면서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그리움, 비극적 희열감, 그리고 끝내 해소되지 않는 갈증 같은 것들로 열병을 앓아왔고, 결국 그 열병의 힘으로 한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영화관에서 시간 죽이기?’ 중에서,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99년 서른일곱의 나이로 결혼을 하면서 그의 삶은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2000년 5월 그동안 기다렸던 기회가 찾아온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무협영화 시나리오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의한 것. 그때 그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사실, 영화계에서의 명예회복보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의식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를 위해 고민하던 중, ‘오늘의 작가상’ 시부문 예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그는 소설부문에 출품된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작품을 보게 된다. 영화화하면 괜찮겠다 싶어 차 대표에게 소개했더니,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다. “무협영화 시나리오 쓰지 말고 이 작품 감독을 맡아라.”

갑작스런 제안에 유하는 당황했다. 재기작으로 삼을 만한 작품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론은 “모럴리티의 층위를 건드려 하나의 의제를 형성할 수 있겠다”는 쪽이었다. 바로 시나리오 작업을 끝낸 뒤 캐스팅에 나섰다. 남자주인공 준영 역은 안판석 PD의 추천과 TV드라마를 통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감우성으로 진작 결정됐지만, 문제는 여자주인공이었다. 노출장면과 다소 과감한 대사 탓에 기존 톱스타들은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갔고, 결국 유하는 엄정화를 떠올렸다. <바람부는…>을 통해 연기 데뷔시켰다는 인연도 있는 데다, 섹시한 매력도 갖고 있고, 연기도 썩 잘한다는 판단에 주위의 걱정스런 시선을 물리치며 그녀를 연희 역할에 앉혔다.

“사내는 결혼식에 간다 친구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결혼에 관한 한 그는 늘 들러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신부 친구와 눈이 맞는다(앤디 맥도웰 같은 여자를 상상하면 좋겠다) 처음 본 그날, 사내와 여자는 돌발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사내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다 우리 결혼하지 않을래요?”(‘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중에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0년 만에 돌아온 촬영장 풍경은 자못 달랐다. <바람부는…> 때만 해도 그가 가장 나이 어린 스탭이었는데, 이젠 최연장자가 됐다. 큰 물이 바뀌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모니터였다. 첫 작품 당시엔 뷰파인더 안에 어떤 그림이 잡히는지도 모르고 레디 고와 컷을 외쳤는데, 이젠 모니터를 보며 그림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오랜만에 복귀해서 그런지 첫 2∼3회 촬영은 버벅”댔지만,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무난하게 촬영을 마쳤다.

<결혼은…>은 보기에 따라선 급진적인 애정관을 담고 있다. 결혼과 연애, 그 둘을 모두 선택하는 연희는 세 남녀 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 그녀는 준영에게 집이라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주며 ‘축첩’을 한다. 유하에 따르면, 그가 애초부터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종손인 그는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부장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 막상 결혼을 하고난 뒤 아내를 보니,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제도와 결혼하는 것이더라. 남자와 그 집안에 귀속되더라. 또 거기서 나오는 고통은 남자에게도 전이된다.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결혼제도라는 게 사람을 철저하게 사람을 소외시킨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결혼은…>에 대해 그는 개인적으로 만족을 표한다. “내 실력대로 나왔다. 85% 만족한다.” 특히 첫 작품의 경우 시를 영화에 맞는 대사로 고치지 못해 어색함투성이었지만, 이번에는 애초 “손 벤다”고 녹음했던 부분을 “손 빈다”로 고쳐 후시녹음할 만큼 소설 속의 문어체를 구어체로 옮기는 데 노력을 기울인 탓에 한결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시와 영화의 융합

“난 모든 예술이 한 우물이라고 생각한다.(중략) 난 제대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쓸 것이며, 제대로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것이다.”(‘보리쌀로 세운 시네마 천국’, <유하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이제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대립돼보이는 시와 영화라는 장르가 유하 안에선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말이다. 그는 답한다. “시가 가장 영화적인 장르일 수도 있다.” 단어끼리의 충돌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시의 세계와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의미망을 형성하는 영화의 그것은 일맥상통한다는 얘기다. 물론 “시가 가장 일상적인 것도 관념의 극대치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반면에 영화는 가장 높은 수준의 관념이라도 일상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궁극엔 두 예술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 잡기를 버리고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는 유하는 현재 다양한 계획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불량서클에 몸담았던 경험담을 그리는 <절권도의 길> 프로젝트나 김영하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 영화, 호금전의 <철수무정> 같은 분위기의 복고풍 무협영화 등 그의 머릿속 영화창고의 문은 바야흐로 들썩거리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그는 떠날 것이다. 무협지와 압구정동과 세운상가와 경마장 같이 ‘남들이 가지말라는 곳’으로, 욕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모순의 결절점으로. 우우우- 절규하며 하얀 달을 따라 표표히 길을 떠나는 늑대인간의 자세로 말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2)

▶ 유하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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