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아가씨 vs 건달
<빵과 장미> 본 아저씨, 두 언어에서 계급성을 생각하다
2002-04-25

영어에 영혼을 사로잡힌 스페인어

●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건물 청소부들의 애환을 경쾌하게 그린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에서 배우들은 스페인어와 영어로 말한다. 미국의 많은 도시 이름들이 그렇듯, ‘천사들’이라는 뜻의 로스앤젤레스(로스앙헬레스)도 스페인어다. 그러나 영화 속의 로스앤젤레스든 실제의 로스앤젤레스든, 스페인어와 영어가 그곳에 대등하게 뿌리내린 것은 아니다.

사회언어학자들은 이(二)언어 병용상태를 흔히 바일링궐리즘과 다이글로시아로 나눈다. <빵과 장미>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히스패닉 등장인물들에게, 스페인어와 영어는 바일링궐리즘이 아니라 다이글로시아를 이룬다. 바일링궐리즘은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사용하는 두 자연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이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예컨대 캐나다의 퀘벡지방에서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둘 다 통용되고, 퀘벡 사람들 다수가 그 두 언어를 병용한다. 그리고 이 두 언어가 기능적 차이를 거의 지니지 않는다. 반면에 <빵과 장미>의 무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히스패닉은 영어로 교육을 받고 영어로 직업 활동을 하지만, 가족이나 가까운 동료와 사적 대화를 나눌 때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스페인어의 기능은 영어의 그것과 다르다. 이 경우가 다이글로시아다.

어떤 공동체가 바일링궐리즘 상태에 있을 때는 한 개인이 한 언어만을 알아도 큰 불이익은 없다. 예컨대 어떤 퀘벡 사람이 프랑스어 하나만 알거나 영어 하나만 알아도 사는 데 큰 불편은 없다. 그러나 한 사회가 다이글로시아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개인이 한 언어만을 안다면, 특히 마이너 언어 배경을 지닌 화자가 메이저 언어를 모른다면, 그것은 그에게 큰 불이익을 낳는다. 예컨대 영어를 모르는 캘리포니아의 히스패닉은 사는 것이 꽤 고달플 것이다. 그래서 <빵과 장미>에서도 영어가 제1언어인 사람은 비교적 스페인어에 무관심하지만, 스페인어가 제1언어인 사람은 영어를 익히려고 애쓴다.

미국 국무부의 호의로 지난해 말 한달 동안 미국을 둘러보았다. 난생 첫 미국 나들이었다. 9·11 참사 직후여서 더 그랬겠지만, 그 나라를 뒤덮고 있는 애국주의의 물결이 섬뜩했다. 애국주의 다음으로 미국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페인어의 위세였다. 물론 나는 그 나라에 가보기 전부터, 역사적으로 멕시코의 유기적 부분이었던 남부 서부의 주에 스페인어 사용자들이 많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들른 미국의 첫 도시인 워싱턴에서 스페인어를 듣는 것은 기묘한, 이중으로 이국적인 경험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튿날 나는 그 도시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려고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녔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행인들이 많지 않았다. 어디선가 좀 시끄러운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거리를 청소하는 몇몇 여성이 깔깔대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히스패닉이 아니라 흑인이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흑인, 그것이 인상적이었다.

남부와 서부로 갈수록 스페인어 사용자들은 더 늘어났다. 몇몇 도시에서는 호텔의 메이드들이 전부 스페인어 사용자들이었다. 뉴멕시코는 제1언어가 영어인 사람과 스페인어인 사람이 거의 반반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거기라고 해서 영어와 스페인어가 대등한 위엄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언어의 구획이 곧 계급적 구획이라는 것은 한눈에도 또렷했다. 영어는 부자들의 언어였고, 스페인어는 가난한 사람들의 언어였다. 물론 숱한 예외가 있었지만, 전반적 인상이 그랬다는 말이다. 그것은, 내 부모님의 언어인 전라도 방언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계급적 표지 구실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겹치며, 내게 씁쓸함을 불러일으켰다.

<빵과 장미>에서, 마야를 좋아하는 루벤은 마야가 공익변호사 샘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놈도 결국 블랑코(백인)야!” 그 대사는 내게 라틴아메리카와 앵글로아메리카 사이의 묘한 인종적 엇갈림을 일깨웠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혼혈은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른바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의 혼혈),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 삼보(흑인과 원주민의 혼혈)가 흔하다. 라틴아메리카의 어떤 나라들에서는 바로 그 혼혈인들이 인종적 다수다. 미국인들이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들을 히스패닉이나 라티노라고 부를 때, 이 말은 본디 뜻대로 진짜 스페인계나 남유럽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백인이 아닌 혼혈인을 가리킨다. 반면에 앵글로아메리카에서는 혼혈이, 있기야 있지만 비교적 덜 흔하다. 원주민 학살의 열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영국인들에게 뒤졌을 리야 없겠지만, 피의 순수성에 대한 열망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영국인들을 따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빵과 장미>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마음 고운 관객은 영화 속의 히스패닉 노동자들에게 연대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연민이나 연대를 바로 우리 눈앞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건네면 어떨까? 그들에게 장미는커녕 빵도 제대로 주지 않는 한국인 악덕 사용자들을 함께 미워하면 어떨까? 영화 속에서 블랑코인 샘이 말했듯, 벤세레모스(우리는 이길 것이다)!